경주이씨 인물 과거 240

송와공(松窩公) 이종윤(李從允)

송와공(松窩公) 이종윤(李從允) 1431(세종 13)~1490(성종 21).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가정(可貞), 호는 송와(松窩). 현감 형(衡)의 아들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경력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직언으로 인하여 장기에 귀양갔다가 1472년 풀려서 내자시주부·예조좌랑·정랑이 되었다. 1482년 헌납이 되고 장령·봉상시부정·시강원보덕을 거쳐 1489년 집의에 올랐다. 1490년 제주목사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강직한 성격으로 직언과 충간을 사명으로 하였고 간신의 처벌, 궁중 불사(佛事)의 저지, 환관들의 농간, 내수사의 장리행위(長利行爲)를 탄핵하였다. 모현사(慕賢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송와문집(松窩文集)≫ 4권..

송계공(松溪公) 이종적(李宗迪)

송계공(松溪公) 이종적(李宗迪) 1710(숙종 36)~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순(子順), 호는 송계(松溪). 명상 항복(恒福)의 5대손으로 정좌(鼎佐)의 아들이다. 일찍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문장이 우아하고 세련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다음해 예문관 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겸하였고 1740년 승문원교리·홍문관수찬·세자시강원문학을 겸하였으며 1744년 상주목사·대사간·승정원승지·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대과에 급제한 다음날 영조를 배행하여 문묘에 다녀 온 뒤 임금의 언행 수만언(數萬言)을 기록하여 올리니 그의 사재(史才)를 이정 받았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론에는 따르지 않았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1499(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며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으며 의성현령으로 나가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 사헌부지평이되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은 풍료로도 이름이 있어 일본호송관, 북평사 등의 직책을 맡았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령을 지나다가, 옛날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 말을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

소농공(筱農公) 이종태(李鍾泰)

소농공(筱農公) 이종태(李鍾泰) 1850(철종 1)~? 서예가 자는 공래(公來), 호는 소농(筱農). 조선 선조 때의 사자관이었던 이해룡(李海龍)의 10대손으로 벼슬은 부경이었다. 대대로 붓글씨를 가업으로 하였으며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의 액서(額書)가 그의 필적이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종태(李鍾泰) 1850년(철종 1)~미상 조선후기 『진명휘론』을 저술한 서예가. 자는 공래(公來), 호는 소농(筱農). 본관은 경주(慶州). 조선 선조 때의 사자관이었던 이해룡(李海龍)의 10대손으로, 벼슬은 부경(副卿)을 지냈다. 집안이 대대로 글씨를 가업으로 하였으며, 덕수궁 대한문(大漢門)의 액서(額書)가 그의 필적이다. 저서로 『진명휘론(進..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주영(李胄榮)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주영(李胄榮) 1837(헌종 3)~1917.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순경(舜敬), 군수 유헌(裕憲)의 아들이다. 1874년(고종 11) 증광시에 급제하고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의정부겸문공사관이 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1877년 대사성·병조참의로 승지했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에 은거하였다. 1890년 동자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94년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가 있자 고종이 대경장을 표방하면서 그를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광무연간에 장례원귀족사장·시강원첨사·궁내부특진관·태의원경 등을 역임하고 한일합방 때에 남작(男爵)을 받았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주영(李胄榮) 1837년(헌종 3) 3월 13일 ~ 19..

사공상서우복야공(司空尙書右僕射公) 이주좌(李周佐)

사공상서우복야공(司空尙書右僕射公) 이주좌(李周佐) ?~1040(정종 6). 고려의 문신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좌복야 이성공(李成功)의 천거로 국학에 입학하고 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목기실참군사로 나갔고 이어 감찰어사에 올랐다. 현종 때 기거사인․동북면병마사가 되었는데, 삭방도내의 19현이 번적(蕃賊)의 피해를 입은 지역이므로 조세의 감면을 요청하여 실현하는 등 백성의 안주(安住)에 힘썼다. 덕종초에 우간의대부에 이르고 1036년(정종 2) 우산기상시를 거쳐 1040년 형부상서판어사대사에 이르렀다. 사후에 사공상서우복야(司空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주좌(李周佐) 미상~1040년(정종 6) 고려전기 우간의대..

안곡공(安谷公) 이중명(李重明)

안곡공(安谷公) 이중명(李重明) 1615(광해군 7)~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문(子文), 호는 안곡(安谷).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67년(현종 8) 임진왜란 때에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사우건립과 양호(楊鎬)와 이여송(李如松)의 배향을 상소하였는데, 그후 7년후 숙종 30년에 창덕궁 금원(禁苑)에 설치된 대보단(大報壇) 창설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이후 서리(胥吏)의 폐단과 시폐(時弊)에 대한 상소를 하기도 했다. 1671년(현종 12) 광흥창봉사에 제수되었다. 1806년(순조 6) 천안의 육현사(六賢祠)에 배향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중명(..

청하자(靑霞子) 이중약(李仲若)

청하자(靑霞子) 이중약(李仲若) ?~1122(인종 1). 고려 중기의 문신 자는 자진(子眞), 호는 청하자(靑霞子). 7대를 이은 명문 출신으로 어머니 이씨가 도사(道士)를 의미하는 노란색 관을 꿈에 보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여러서부터 도장(道藏)을 탐독하고 도풍(道風)을 섬겼다. 출가하여 가야산에 은거하여 스스로 청하자라 칭하며 수련을 쌓다가, 처사(處士) 은원충(殷元忠)과 선사(禪師) 익종(翼宗)의 주선으로 월출산으로 옮겨 일재(逸齋)를 짓고≪황정경(黃庭經≫에 으지하여 부상공(夫桑公-少明)·도은거(陶隱居-弘景)·장천사(張天師-道陵) 등을 받들고 연단(鍊丹) 수련을 하였다. 도교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조야에 명성을 떨쳤으며 숙종의 치료를 위하여 상경한 뒤 궁주에서 태자를 시봉했는데, 그 태자가 즉위하..

도승지(都承旨) 이중협(李重協)

도승지(都承旨) 이중협(李重協) 1681(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화중(和仲), 정언 익(瀷)의 증손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715년 사간원 정언을 거쳐 1717년 사헌부지평에 이르고 동지사 유명웅(兪命雄)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경종의 비 단의빈심씨(端懿嬪沈氏)가 죽으므로 대전(大殿)인 숙종의 며느리의 복상이 부장기(不杖朞)로 결정되자 대공복(大功服)으로 해야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719년 흉년을 당하여 기민구제를 하기한 공명첩(空名帖)의 발행을 중지하라고 상소하였다. 1722년(경종 2) 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에 갇히고 해남으로 귀양갔으며 다시 경원..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 1244(고종 31)~1321(충숙 8). 고려의 문신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 문하평리 핵(翮)의 둘째 아들이고 명상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체구(體軀)가 컸고 관홍(寬弘)하였으며 백가(百家)에 널리 통하고 운(韻)을 부르는 즉시 시를 지으므로 상서(尙書) 이송진(李松縉)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이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다음 1298년(충렬왕 24) 사림원(詞林院)에 들어갔는데 학사 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권영(權永) 등과 함께 왕이 홍정(붉은 가죽 띠)을 내렸다. 충렬왕이 친시(親試)로 문신들의 재능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아우 세기(世基)와 함께 2등과 3등에 뽑히어 그때 사람들이 ‘천장급제(天場及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