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 240

공주목사공(公州牧使公) 이시현(李時顯)

공주목사공(公州牧使公) 이시현(李時顯) 1622(광해군 14)~1678(숙종 4) 자는 사영(士榮). 명상 항복(恒福)의 손자이고 부사 성남(星男)의 아들이다. 1659년(효종 10) 병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의 추천으로 사옹원봉사가 된 뒤에 사복시직장·홍산현감을 거쳐 개령현감에 이르렀다. 때마침 가뭄으로 기근이 들었으나 비축미가 없어서 경비의 절약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비상수단으로 많은 백성을 죽음에서 건졌다. 이 사실이 암행어사 신정(申晸)이 장계(狀啓)하여 이듬해에 성주목사로 승진하였다. 이곳에서도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고 이어서 공주목사에 이르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시현(李時顯) 1622년(광해군 14)~1678년(..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1423(세종 5)~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무신 군수 종직(從直)의 아들. 서자로 태어나 어릴 때는 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했으나 비록 공부는 못했으나 무예에 능하여 장용위(壯勇衛)의 군졸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충의교위행호분위중부사직겸사복(忠毅校尉行虎賁衛中部司直兼司僕)이 되었다. 서얼출신이기 때문에 가선대부까지는 이르렀으나 한 번도 현직(顯職)에는 나아가지 못했고 평생을 겸사복으로 포도장을 맡아 도성을 물론 전국의 도적을 소탕하였다. 그 가운데 관악산을 근거로 출몰하는 고도(古道)·김말응(金末應) 등의 도적을 소탕하고 충주의 수리산(愁里山)·여주의 ..

공조참판공(工曹參判公) 이연손(李延孫)

공조참판공(工曹參判公) 이연손(李延孫) 1404(태종 4)~1463(세조 9). 조선 초기의 무신 상서공(尙書公) 과의 증손이고 첨지중추부사 숭수(崇壽)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의·형조참의·예조참의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졸후에 영의정이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예조정랑공(禮曹正郞公) 이영(李瑛)

예조정랑공(禮曹正郞公) 이영(李瑛) 1501(연산군 7)~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들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에 뽑혔으며 1544년 에조정랑이 되었고 병조정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면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명종 5)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명나라가 우리 나라 사신을 홀대(忽待)함을 지적하고 북경(北京)과의 무역을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성품이 총효·공검하였다 한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영(李瑛) 1501년(연산군 7)~1558년(명종 13) 조선전기 예조정랑, 병조정랑, 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윤(子潤). 이혁손..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1916~1976.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출신. 시조시인 호우(鎬雨)의 누이동생이다. 1945년 대구의 문예동인지 ≪죽순(竹筍)≫에 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뒤 통영여자고동학교·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거쳐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였다. 1964년 부산직할시 어린이회관 관장을 맡았고 ≪현대시학≫ 편집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66년 문학을 통한 사회봉사의 공로로 눌월문화상(訥月文化賞)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 (1956)·(1956)·(1957)·(1958)·(1959)·(1961)·(1965)·(1966)·(1968)·(1969)·(1970)·(1970) 등이 있다. 그녀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가는 고유의 가락을 재현하..

국악인(國樂人) 이원근(李源根)

국악인(國樂人) 이원근(李源根) 1850(철종 1)~1918. 한말 피리의 명인 자는 경재(景哉). 서울 출신. 피리의 대가인 인식(寅植)의 아들이다. 1860년 2월 장악원 악공이 되고 1869년 12월 가전악(假典樂), 1906년 1월 악사(樂師), 1908년 7월 전악(典樂), 1913년 8월 이왕직의 아악수장(雅樂手長), 1915년 4월 제사과(祭祀課)에 근무하였다. 아버지를 이어 피리 주자(奏者)로 활동했으며 맏아들 수경(壽卿)은 거문고의 명인이고, 넷째 아들 수억(壽億)은 관악기를 다루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원근(李源根) 1850년(철종 1)~1918년 대한제국기 악사, 전악 등을 역임한 국악인. 피리명인. 본관은 경주..

효정공(孝貞公) 이유승(李裕承)

효정공(孝貞公) 이유승(李裕承) 1835(헌종 1)~1906.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선(景先). 명상 항복(恒福)의 9대손이며 독립운동가 회영(會榮), 부통령 시영(始榮)의 아버지이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1866년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1868년에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고 이듬해 승지를 지냈다. 1878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1881년 고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려던 이재선(李載先)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1883년 호조참판·18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90년 대왕대비가 돌아가시자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예조판서에 임명되었고 형조판서를 거쳐 1891년 다시 한성부판윤이 되고 1893년 공조..

귤산공(橘山公) 이유원(李裕元)

귤산공(橘山公) 이유원(李裕元) 1814(순조 14)~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고 홍문관대제학·예조판서·좌찬성·병조판서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아 1865년(고종 2)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영중추부사로 회복되고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세자책봉문제로 1875년 주청사(奏淸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의논하였다. ..

초려공(草廬公) 이유태(李惟泰)

초려공(草廬公) 이유태(李惟泰) 1607(선조 40)~1684(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유학 서(曙)의 아들이다. 김집(金集)의 천거에 의하여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진선·집의를 거쳐 1660년(현종 1)의 복제시비 때에 호군에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그뒤에 효종 말년부터 준비하여 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조목조목 따지고 구국(救國)·휼민(恤民)의 계책을 제시하므로, 왕이 비변사(備邊司)의 제신들에게 검토하라고까지 했..

퇴사암공(退思菴公) 이윤(李潤)

퇴사암공(退思菴公) 이윤(李潤) ?~1592(선조 25). 자는 존중(存中), 호는 퇴사암(退思菴) 감사 감(堪)의 손자이다. 이이(李珥)·조헌(趙憲)과 더불어 수학하고 1582년(선조 15) 죽산현감으로 재임 중 포탈혐의로 파면되었으나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청주에서 조헌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무찌르고 금산에서 조헌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윤(李潤) 미상~1592년(선조 25) 조선전기 죽산현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존중(存中), 호는 퇴사암(退思菴). 할아버지는 감사 이감(李堪)이다. 이이(李珥)·조헌(趙憲) 등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였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