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효정공(孝靖公) 이유응(李裕膺)

효정공(孝靖公) 이유응(李裕膺) 1817(순조17)~?.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창(景昌). 익재공 제현(齊賢)의 후손 계정(啓禎)의 아들이다. 1842(헌종8)년 정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1853(철종4)년 이조참의를 지내고 1862(철종13)년 이조참판을 지내다 1863(철종14)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1869(고종6)년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시(諡)는 효정(孝靖)이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장례원판결사공(掌隷院判決事公) 이형만(李衡萬)

장례원판결사공(掌隷院判決事公) 이형만(李衡萬) 1711(숙종37)~?. 조선 후기 문신 자는 평일(平一). 판서공 성룡(聖龍)의 아들이다. 1735(영조11)년 증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지내고 사간원정언을 거쳐 1742(영조18)년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이후 기장현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1746(영조22)년 세자시강원문학 사서를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내면서 숙마한필(熟馬一匹)을 하사 받았다. 1748(영조24)년 사헌부장령 필선을 지내고 1751(영조27)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어 민백창 이태 사건의 진위를 가려서 보고하였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

초천공(椒泉公) 이형좌(李衡佐)

초천공(椒泉公) 이형좌(李衡佐) 1668(현종9)~1746(영조22).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윤(景尹). 호는 초천(椒泉). 구천공 세필(世弼)의 아들이다. 1702(숙종28)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영유현령 천안군수를 지냈다. 1712(숙종38)년 인천현에 전임되어 1715(숙종41)년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임한지 1개월 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형좌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인천향교에 세워졌다. 1717(숙종43)년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어 선정을 베푼다는 암행어사 보고에 따라 포상을 받았다. 1728(영조4)년 원주목사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732(영조8)년 호조참의 수원부사를 지내다 1736(영조12)년 충청도관찰사 한성우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에 ..

승정원승지공(承政院承旨公) 이단장(李端章)

승정원승지공(承政院承旨公) 이단장(李端章) 1664(현종5)~1727(영조3).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상보(相甫). 초려공 유태(惟泰)의 손자이다. 1705(숙종31)년 증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사간에 이르렀다. 1709(숙종35)년 세자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717(숙종43)년 함평현감을 지낼 때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어사 조영복에 의해 파직되었다. 1724(경종4)년 사간원장령을 지내다 다시 파직되었다가 1725(영조1)년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사간원집의를 지냈다. 1726(영조2)년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지내다 1727(영조3)년 정미환국 때 파직되었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

가은공(加隱公) 이수종(李秀宗)

가은공(加隱公) 이수종(李秀宗) 1614(광해군5)~1666(현종7).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종(士宗). 호는 가은(加隱). 관수재공 응윤(應胤)의 아들이다. 1636(인조14)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성균진사로서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던 삼학사(三學士)(홍익한 오달제 윤집)가 심양으로 잡혀가자 백의의 몸으로 뜻을 함께하여 그들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갔다. 22년간을 청나라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가 1657(효종8)년 귀환하였다. 효종이 특별히 등용하는 벼슬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유망한 인재였으나 병자호란 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 절개를 지켰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

양서공(讓西公) 이광윤(李光胤)

양서공(讓西公) 이광윤(李光胤) 1564(명종19)~1637(인조15).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 진사 잠(潛)의 아들이다. 1594(선조27)년 별시문과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내다 1602(선조35)년 호조좌랑 홍문관수찬을 거쳐 1604(선조37)년 부교리 성균관직강을 지냈다. 1607(선조40)년 서천군수를 거쳐 공조정랑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1620(광해군12)년 사간원장령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그는 3세에 글자를 배우고 8세에 문장을 지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광윤(李光胤) 출생: 1564년(명종 19) 사망: 1637..

기봉공(騏峰公) 이시성(李時省)

기봉공(騏峰公) 이시성(李時省) 1598(선조31)~1668(현종9).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기봉(騏峰). 현감공 태남(泰男)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 읽기를 즐겨 백사/이항복에게 학문을 배워 사마양시에 급제하고 사옹원참봉이 되었으나 술 마시고 시(詩) 짓는 것을 좋아하여 틈나는 대로 벗들과 명승지를 찾아 다니며 시를 짖고 노래하며 보내다가 1650(효종1)년 52세 늦은 나이에 증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공.예조정랑을 거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다. 다시 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회양부사 통례원통례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다 1667(현종8)년 승정원가승지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에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저서: 기봉집(騏峰集) 등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예빈시정(禮賓寺正) 이정남(李井男)

예빈시정(禮賓寺正) 이정남(李井男) 1585(선조18)~1653(효종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문숙(文叔). 백사공 항복(恒福)의 차남이다. 1612(광해군4)년 사마양시에 급제하고 장원서별제 풍저창주부를 거쳐 사헌부감찰을지냈다. 1623(인조1)년 공.호조정랑 통천군수를 지내다 1629(인조7)년 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를 거쳐 사복시첨정 강화부경력을 지냈다. 1632(인조10)년 한성서윤(漢城庶尹)을 지내고 외직으로 담양부사를 거쳐 선공감첨정 광흥창수 사도시정을 지내고 이어 성천부사를 거쳐 중추부경력 예빈시정에 이르렀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정남(李井男) 1585년(선조 18)~1653년(효종..

오흥군(鰲興君) 이성남(李星男)

오흥군(鰲興君) 이성남(李星男) 1578(선조11)~1642(인조2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명숙(明叔). 백사공 항복(恒福)의 아들이다. 1607(선조40)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인조반정 때 부여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한산군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뜻에 안맞아 사임하였다. 이후 충훈부도사를 거쳐 광흥창수를 지냈다. 1627(인조5)년 중추부경력을 지내고 1635(인조13)년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을 거쳐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전임되었으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36(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피난시키려고 대가(大駕)를 준비하였으나 어마(御馬)를 관리하던 관원들이 도망쳐 없어져 직접 말을 끌고와 남한산성으로 모셨다. 1637(인조15)년 종친부전첨(宗親府..

사유재공(四留齋公) 이정암(李廷馣)

사유재공(四留齋公) 이정암(李廷馣) 1541(중종36)~1600(선조3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유재(四留齋). 오재공 탕(宕)의 차남이다. 1560(명종15)년 식년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발탁되었다. 1578(선조11)년 양주목사에 등용되어 조광조의 도봉서원을 증수하였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1584(선조17)년 사헌부장령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을 지내다 1587(선조20)년 동래부사 대사간을 거쳐 우승지 이조참의를 지내고 1592(선조25)년 선조를 호종하여 개성에서 방어하였고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활약하였다. 황해도초토사가 되어 왜군 삼천여명을 격파하였다. 이어 황해도관찰사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1596(선조29)년 정라도관찰사지내고 충청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