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 240

상산공(常山公) 이재수(李在秀)

상산공(常山公) 이재수(李在秀) 1912~1974. 국문학자. 호는 상산(常山). 충북 진천 출신. 봉섭(鳳燮)의 4남이다.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진천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청주고등보통학교를 나와서 1938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과(한국고전문학 전공)를 졸업하였다. 1945년 광복까지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明信中學校)와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의 교유(敎諭)로 있었고 1946년 국학대학 교수·연희대학 조교수로 취임했다가 그 해 9월에 사임하였고 숙명여자대학과 중앙대학 강사로 있다가 1948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교수로 2년 동안 근무하다가 1950년 대구사범대학(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취임한 이래 1974년까지 25년간 근무하였다. 1961년부터 10여년간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

안동부사공(安東府使公) 이전(李專)

안동부사공(安東府使公) 이전(李專) 생몰년 미상. 조선 초의 문신 고려말의 호부상서 달충(達衷)의 아들. 벼슬은 동지밀직사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태조의 개국(開國)에 협력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396년(태조 5) 익안대군(益安大君)·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 등과 술자리에서 추중망언한 일로 해남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죽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전(李專) 생몰년 미상 조선전기 안동부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고려 말의 호부상서 이달충(李達衷)이며, 아들은 이조판서 이승상(李升商)이다. 벼슬은 동지밀직사사·안동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태조에 의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1396년..

경림군(慶林君) 이정(李淀)

경림군(慶林君) 이정(李淀) 1589(선조 22)~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조호(淙滈)· 자는 노천(老泉),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9년 금오랑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세력가인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당으로 끌어들이려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뒤에 직장(直長)에 올랐으나 행신(倖臣)의 서자와 같은 벼슬이라 하여 스스로 물러났다. 1623년 (인조 1) 인조반정 뒤 거창현감으로 내려갔고 이괄의 난 때에는 아버지를 도와 반군을 막았다. 뒤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를 핑계로 사양하였고 장례원판결사로 임명되었다. 1661년(현종 2) 노비의 일이 궁액(宮掖)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668년..

김해부사공(金海府使公) 이정(李靖)

김해부사공(金海府使公) 이정(李靖)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위경(衛卿). 정암(廷馣)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김해부사 등을 역임하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수안군수직무대리로서 수안성을 지켜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경군(京軍)에 합류하여 안령(鞍嶺) 북쪽을 지킨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정(李靖) 생몰년 미상 조선후기 진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위경(衛卿). 할아버지는 이정암(李廷馣)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동부승지·김해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수안군수 직무..

첨서승추부사공(僉書承樞府事公) 이정견(李廷堅)

첨서승추부사공(僉書承樞府事公) 이정견(李廷堅) ?~1409(태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고려말의 정랑 육(毓)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한 뒤 좌상시·밀직사사 등을 거쳐 조선 태조 때에는 간관을 역임하고 태종 조에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에 이르렀다. 1402년(태종 2) 예문관제학으로 우의정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명나라의 고명인장(誥命印章)의 하사를 사례하기 위한 대명사행(對明使行)을 수행하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정견(李廷堅) 미상~1409년(태종 9) 조선전기 좌상시, 밀직사사,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고려말의 정랑 이육(李毓)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

후포공(後浦公) 이정원(李挺元)

후포공(後浦公) 이정원(李挺元) 1567(명종 22)~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인(仲仁), 호는 후포(後浦). 충량(忠良)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서·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사간 등을 거쳐 1614년 군기시정·필선이 되었다. 1620년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충주에 살 때에 진사로서 정인홍(鄭仁弘)을 부추기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고 뒤에 대북파에 호응하여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 되었다. 궁중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벼슬을 처거하고 문관의 인사에 관여하는 등 부정을 일삼다가 인조반정 후 정인홍·민심·유세증·서국정·한정국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

익재공(益齋公) 이제현(李齊賢)

익재공(益齋公)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이제현(李齊賢. 충렬왕 13(서기1287)~공민왕 16(서기1367))은 고려말의 정치가이며 성리학자였고 원(元)의 위협속에서 기울어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혼자서 버텨낸 위인이었다.자는 중사(仲思),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서기1301)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문과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다. 성균악정에 이르렀을 때에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부르므로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의 명사들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심오해졌으며 이 때에 진감여(陳鑑如..

석탄공(石灘公) 이존오(李存吾)

석탄공(石灘公) 이존오(李存吾)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쳐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율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대사성을 추증..

목천공(牧川公) 이종백(李宗白)

목천공(牧川公) 이종백(李宗白) 1699(숙종 25)~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태소(太素), 호는 목천(牧川). 관찰사 형좌(衡佐)의 아들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교리·부수찬·헌납·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대사간·승지를 거쳐 이듬해 대사성에 오르고 광주부윤으로 나갔으며 1939년 대사헌이 되었다. 1749년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1751년 이조참판·1752년 함경도관찰사·호조참판에 이르고 1754년 형조판서가 된 뒤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에 내의원제조·공조판서·호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56년 경기감사에 이어 다시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

오천공(梧川公) 이종성(李宗城)

오천공(梧川公) 이종성(李宗城) 1692(숙종 18)~1759(영조 35).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명상 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일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이듬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朋黨) 200년의 폐단을 논의했고, 그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근절했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있는 것을 상주(上奏)하여 풀어주었다. 그 뒤 부수찬·헌납·수찬·교리를 거쳐 1729년 다시 영남어사로 나갔고 함경남도와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使)로 다녀와서 응교에 올랐다. 1731년 관서어사로 파견되어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