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 240

북악공(北嶽公) 이해룡(李海龍)

북악공(北嶽公) 이해룡(李海龍) 1600~ 조선 중기의 서예가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 벼슬은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에 이르렀다. 선조 때의 사자관(寫字官)으로 한석봉(韓石峯) 못지 않게 뛰어난 필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588년(선조 21)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통신사의 사자관으로 일본에 가서 많은 글씨를 남기고 왔다. 지금 남아있는 금석문으로는 사현(沙峴)에 있는 가 전한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해룡(李海龍) 생몰년 미상 조선전기 금석문으로 사현의 양호묘비를 쓴 서예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 벼슬은 역관·사자관(寫字官)을 거쳐 내섬시주부(..

한성부판윤공(漢城府判尹公) 이현직(李顯稷)

한성부판윤공(漢城府判尹公) 이현직(李顯稷) 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형(伯衡). 총관(摠管) 격(格)의 아들이며 경상좌수사 학영(鶴榮)의 아버지이다. 1846년(헌종 12) 경상좌도수군절도사․전라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54년(철종 5) 삼도수군통제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65년(고종 2) 총융사에 올랐고, 이듬해 어영대장·공조판서를 겸하면서 경복궁의 중건을 감독하였다. 병인양요 뒤에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변방의 방비를 사찰하도록 하였는데, 그결과 통제사들의 죄가 드러나자 모두 치죄하고 공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1869년 호포전(戶布錢)의 작성에 향리들의 부정이 있어 일어난 고성(固城) 민란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한..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아호는 본명에서 취음(取音)하여 이호우(爾豪愚)라 하였다. 청도 출신이고 시조시인 영도(永道)의 오빠이다. 향리의 의명학당(義明學堂)을 거쳐 밀양보통하교․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으로 중퇴하고 낙향하였다. 1929년 일본 동경예술대학에 유학했으나 신경쇠약증세의 재발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광복후 ≪대구일보≫의 경영과 편집에 참여하면서 1952년 ≪대구일보≫의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지냈고 1956년 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일하면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문학활동으로는, 19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40년 ≪문장≫ 6·7호 합병호에 이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추천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포세공(逋世公) 이홍업(李弘業)

포세공(逋世公) 이홍업(李弘業)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립(時立), 호는 포세(逋世).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병조좌랑·고창현감 등을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미움을 받아 함경도 경성도호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적장 가또(加藤淸正)가 왜군을 이끌고 회령에 침입했을 때 회령부사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비롯하여 수10인을 포박하여 왜적에게 투항했을 때 그도 함께 붙들려갔는데, 적장이 강화문서를 작성하여 왕자와 대신에게 강제로 서명하라 하고 그 문서를 그에게 주면서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에게 전하라 하므로 의주 행재소에 이르렀으나, “적장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짓이므로 사형에 처하여야..

우당공(友堂公) 이회영(李會榮)

우당공(友堂公) 이회영(李會榮) 1867(고종 4)~1932.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년~1932)은 서울 출신으로 호는 우당(友堂), 좌찬성 유승(裕承)과 정경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 7남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안창호(安昌浩) 등과 비밀결사 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의 분야를 담당하고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협의한 다음 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숙장(塾長)으로 선임하여 교육을 시행토록 하였으나 1907년에 이상설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되었으므로 여준(呂準)을 파견하여 교무행정을 ..

설정공(雪汀公) 이흘(李忔)

설정공(雪汀公) 이흘(李忔) 1568(선조 1)~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오계(梧溪).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로 왕비를 해주로 호송하였다. 1595년(선조 28) 승문원정자·박사 등을 거쳐 전적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문학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었다. 이해에 왜적이 재침하자 중국어에 능통한 관계로 명장(明將) 진우층(陳愚衷)과 함께 울산에서 왜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뒤에 전라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황해도도사를 거쳐 배천군수가 되었는데, 봄에 관곡(官穀)..

양희공(襄僖公) 이흥적(李興啇)

양희공(襄僖公) 이흥적(李興啇) ?~1465(세조 11).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연(子衍). 음직(蔭職)으로 나가서 여러 관직을 겨쳐 판선공감사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당시에 의금부진무로 있을 때 수양대군의 지시로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김종서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공으로 정란공신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사에 올랐다. 1454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희(襄僖)이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흥상(李興商) 미상~1465년(세조 11) 조선전기 의금부진무, 첨지중추원사,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연(子衍). 음직으로 행수(行首)에 보직, ..

소남공(少南公) 이희수(李喜秀)

소남공(少南公) 이희수(李喜秀) 1836(헌종 2)~1909(순종 3). 조선 말기의 서화가 자는 지삼(芝三), 호는 소남(少南)·경지당(景止堂). 산수화·난초·대나무의 그림에 모두 능하였고 7세에 전(篆)·예(隸)·해(楷)·행(行)을 잘 썼으며 한 밤중에 어둠 속에서 글씨를 써도 자획이 어긋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문하생들이 모여들었고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왔다고 한다. 성격이 단정하였으며 강하고 기이한 화풍을 즐겼다. 유작 가운데 남종화풍에 바탕한 것으로는 (개인 소장)가 있는데, 제시(題詩)와 함께 독특한 인상을 주며 눈 덮인 강 언덕과 침엽수의 묘사가 거칠고 선명하여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보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

천휴당공(天休堂公) 이몽규(李夢奎)

천휴당공(天休堂公) 이몽규(李夢奎) 1510(중종 5)~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 증이조판서 인신(仁臣)의 계자(季子)이고 명종 때의 명장 몽린(夢麟)의 넷째 아우이다. 태어나면서 특이하여 어려서 말을 배우고 글을 익혀 10세에 대의(大義)를 통달하므로 모두 국기(國器)라고 칭찬하였으며 상공(相公) 김극성(金克誠)이 사위를 삼았다. 거업(擧業)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보령(保寧)으로 내려가서 임석(林石) 사이에 서실(書室)을 짓고 ‘천휴당(天休堂)’이라 편액(扁額)했는데 나중에 그의 호(號)가 되었다. 그는 소쇄(瀟灑. 깨끗함)속에 홀로 앉아 마음을 비우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면서 학문과 수행(修行)을 평생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매죽헌공(梅竹軒公) 이완(李浣)

매죽헌공(梅竹軒公) 이완(李浣) 1602(선조 35)~1674(현종 13).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무공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당시 인조반정 이후 군권(軍權)을 쥐고 있던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滿浦)첨사가 되고 1627년 영유현령을 거쳐 상원군수·숙천부사를 지내고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에 포진하고 적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하여 미리 매복한 군사로 치게 하니 적이 크게 패하였다. 1638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옮기고 이듬해 최명길의 천거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문신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1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