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 240

간옹공(艮翁公) 이익(李瀷)

간옹공(艮翁公) 이익(李瀷) 1579(선조 12)~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 옥포(玉浦). 판관 유일(惟一)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고 뒤에 사서·전언·헌납·지평·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 직강에 이르렀다. 인목대비의 폐비논의가 일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다행히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안치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사예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사후에 전한(典翰)에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

애산공(愛山公) 이인(李仁)

애산공(愛山公) 이인(李仁) 1896~1979. 변호사·정치인. 호는 애산(愛山). 대구출생. 할아버지는 성리학자였고 아버지는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중심인물이었다. 대구의 달동의숙과 경북실업보습학교를 하고 1912년 일본 세이소중학교(正則中學校)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과정인 고등전공과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변호사의 꿈을 안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돌아와 서울에서 개업을 한 다음 처음 변론을 맡은 것이 의열단사건(義烈團事件)이었다. 당시의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사에 남을만한 사건에는 빠지지 않고 관여하여 변론하였다. 수원고농사건(水原高農事件) 때에는 법정불온변론문제로 변호사정..

노포공(老圃公) 이인소(李寅燒)

노포공(老圃公) 이인소(李寅燒) 1637(인조 15)~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명(子明), 호는 노포(老圃). 좌의정 경억(慶億)의 아들. 1663년(현종 4) 진사가 되고 문음(門蔭)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다. 정승 정재승(鄭載嵩)이 “몸가짐이 맑고 신실하다.”고 천거하여 낭관에 올랐다. 1693년(숙종 19) 57세로 아우 인병(寅炳)과 함께 급제하여 수찬으로 있으면서 화폐 유통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였고 뒤에 교리에 이르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인소(李寅燒) 1637년(인조 15)~1698년(숙종 24) 조선후기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명(子明),..

악사(樂師) 이인식(李寅植)

악사(樂師) 이인식(李寅植) 생몰년 미상. 조선 헌종~고종 때의 악사(樂師)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가전악(假典樂)·1876년과 1892년의 진찬(進饌) 때에는 집사악사(執事樂師)로 활약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李壽卿)의 할아버지이고 가곡(歌曲)의 명인 이병성(李炳星)의 고조부이다. 이 집안은 피리의 대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세습궁중악’의 가문이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인식(李寅植) 생몰년 미상 개항기 전악, 집사악사 등을 역임한 국악인. 악사(樂師).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가전악(假典樂), 1876년(고종 13) 7월 전악(典樂)이 되..

회와공(晦窩公) 이인엽(李寅燁)

회와공(晦窩公) 이인엽(李寅燁) 1656(효종 7)~1710(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장(季章). 호는 회와(晦窩). 좌의정 경억의 아들이다. 1684년(숙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 숙종이 희빈 장씨(禧嬪 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하려하자 서인들이 실권하게 되었는데, 숙종이 중전 민씨(閔氏)까지 폐하려 하자 공이 전 한림으로 전 판서 오두인(吳斗寅)·전 참판 이세화(李世華)·전 응교 박태보(朴泰輔) 등 서인들과 반대상소를 올렸다. 뒤에 양역변통(良役變通)을 주관하였고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강화부 방비를 위한 진(鎭) 설치를 위한 그의 견해는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되어 종종 인용되다가 정조 때에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에 이르렀..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 1241(고종 29)~?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문하평리 핵(翮)의 장남이고 검교정승 진(瑱), 대제학 세기(世基)의 장형이며 정승 제현(齊賢)의 큰아버지이다. 호는 성암(誠菴). 일찍이 문과에 등제하여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다가 1276년(충렬왕 2) 2월에 전중시어사로 승진했는데, 3월에 왕이 본궐(本闕)에 설치한 장경도장(藏經道場)에 가다가 전후(殿後)에 두견화(杜鵑花)가 만발한 것을 보고 4운(四韻)을 내리어 시를 지으라 하니 공이 민지(閔漬)·백문절(白文節) 등 18 사신(詞臣)과 함께 시를 지어올렸다. 뒤에 정언에 이르렀는데, 여러 낭사(郎舍)와 더불어 말하기를 “근래 내수(內豎)로 있는 미천한 자들이 임금을 수종(隨從)한 공로로 사도(仕途. 벼슬길)가 허..

한성부좌윤공(漢城府左尹公) 이인하(李仁夏)

한성부좌윤공(漢城府左尹公) 이인하(李仁夏)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우의정 완(浣)의 조카. 자는 하숙(夏叔). 효종 초에 현감·도총부경력 등을 거쳐 1654년(효종 5) 어영대장·1656년 충청도수군절도사·1660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과오로 파직되었다. 다시 복직되어 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9년(숙종 5) 삼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덕원에서 거제도로 이배(移配)되던 송시열(宋時烈)을 중도에서 대접한 일로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1680년 송시열이 풀려나자 복직되어 1682년 병조참판·총융사에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나 복직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

생곡공(生谷公) 이인환(李寅煥)

생곡공(生谷公) 이인환(李寅煥) 1633(인조 11)~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백(文伯), 호는 생곡(生谷). 판서 시발(時發)의 손자이며 경연(慶衍)의 아들이다. 166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언·수찬 등을 지냈고 1675년(숙종 1)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680년 사간·집의에 이르고 1681년 응교·승지를 거쳐 1684년 대사간이 되었다. 1685년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상소하기도 했다. 대사성·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를 거쳐 1697년 도승지에 오르고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인환(李寅煥) 1633년(인조 11)~1699년(숙종 25) 조선후기 경기도관찰사, 개성부..

송포공(松圃公) 이일로(李逸老)

송포공(松圃公) 이일로(李逸老)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수(晦叟), 호는 송포(松圃). 일영(逸英)의 아우이다. 1613년(광해군 5)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역모로 몰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한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항소하여 흉당을 공박한 일로 투옥되었고 역모로 몰아 가혹한 국문(鞠問)을 하는데도 자기의 소행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일일이 직고(直告)하여 온갖 고초를 겪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15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서 종묘봉사에 배치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므로 형 일영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때에 형수 이씨(李氏)와 부인 이씨(李氏)도 함께 순절하여 한 집안에서 네 사람이 순국하였다. 1834년(순조 34..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일범(李一凡)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일범(李一凡) 1917~1973. 광복군. 일명 경태(敬泰) 1935년 6월 신사참배반대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 중에 북경으로 탈출하여 회잉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39년 난징(南京) 국립중앙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 송지영(宋志英)·조일문(趙一文)·이정선(李正善) 등 10여명의 학우(學友)를 만나 항일비밀결사인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고 그 회장과 대장을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1940년 2월 난징 거주 교포인 정윤관(鄭允官)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각지의 대원에게 분배하고 그해 7월 7일 난징에서 일본인이 출입하는 음식점에 시한 폭탄을 장치하여 일본인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1943년 6월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