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 240

구천공(龜川公) 이세필(李世弼)

구천공(龜川公) 이세필(李世弼) 1642(인조 20)~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군보(君輔)·호는 구천(龜川). 명상 항복의 증손이고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며 좌의정 태좌의 아버지이고 영의정 종성의 조부이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광에 유배되어 5년 동안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78년(숙종 4) 유배에서 풀려나 1680년 창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동몽교관이 되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으로 부임하여 가뭄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과세를 감하여 주고 부역(賦役)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푸는 한편 학교를 일으켜 준재(俊才)를 뽑아 가르쳤다. 이어서 진위현령(振威縣令)..

예조좌랑공(禮曹佐郞公) 이세현(李世賢)

예조좌랑공(禮曹佐郞公) 이세현(李世賢) 1656(효종 7)~1697(숙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석경(碩卿). 1681년(숙종 7) 성균시에 급제하고 출사(出仕)하여 예조좌랑·형조좌랑·공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났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이 이를 지지한 남인(南人)에 의하여 패배하고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간 사건을 이른다. 극력 반대하던 송시열은 파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고 그를 따르던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 수명이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이렇게 정국이 삼엄한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홀로 상소를 올려서 그 부당함을 통박했으나 미치지 못하..

송사공(松史公) 이수경(李壽卿)

송사공(松史公) 이수경(李壽卿) 1882(고종 19)~1955. 거문고의 명인 자는 치일(致一), 호는 송사(松史). 서울 출신. 헌종 때의 피리의 명인인 이인식(李寅植)의 장손이고 고종 때 피리의 명인인 이원근(李源根)의 장남이며 가곡의 명창 이병성(李炳星)의 아버지이다. 1892년(고종 29) 장악원에 보임되고 1901년의 진연(進宴) 때는 방향(方響)을 맡았고 1902년의 진연에는 편경(編磬)을 담당했다. 1903년에 가전악(假典樂)이 되고, 1913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거쳐서 아악사(雅樂師)가 되었다. 1939년 이왕직아악부를 사임할 때까지 김영제(金寧濟)·함화진(咸和鎭)·최순영(崔淳永) 등과 함께 아악의 보존과 육성에 공헌하였다. 그는 특히 영산회상(靈山會相. 일명 거문고회상)과 도드리의 연..

밀직원사공(密直院使公) 이수림(李壽林)

밀직원사공(密直院使公) 이수림(李壽林) ?~1369(공민왕 18). 고려말의 문신 명상 제현(齊賢)의 손자이고 전법총랑 달존(達尊)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성리학자 백이정(白頤正)의 딸로서 고려 후기의 손꼽히던 명문세족의 후예이다.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가 되고 이어서 이부판서를 역임하고 1356년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3년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으로 왕을 삼으려하자 동지밀직시사가 되어 홍순(洪淳)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백관과 기로(耆老)들이 공민왕을 옹호하는 글을 어사대에 바쳤다. 1369년 고려가 북원(北元)의 사신 노은(盧訔)을 죽인 뒤에 배원(排元)정책을 천명하면서 지난날의 친원파들을 숙청할 때에 당시 밀직원사(密直院使)였던 공도 해를 입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은암공(隱庵公) 이수일(李守一)

은암공(隱庵公) 이수일(李守一) 1554(명종 9)~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증영의정 난(鸞)의 아들이고 우의정 완(浣)의 아버지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 1590년 선전관이 되었고 이듬해에 장기현감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분전했으나 예천·용궁에서 패하였으나 오히려 밀양부사로 승진하였고 이어서 경상좌도 수군정도사에 올라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가선대부가 가자되었다.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로 보임되었으며 다음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6년에 다시 길주목사에 방어사..

공의공(恭懿公) 이승상(李升商)

공의공(恭懿公) 이승상(李升商) ?~1413(태종 13). 조선 초기의 문신 문정공(文靖公) 달충(達衷)의 손자이다. 1382년(우왕 8) 성균시에 장원하였는데, 특히 방원(芳遠. 태종)과 동방(同榜)이었으므로 그 뒤에 태종의 후대를 받게 된다. 1400년(정종 2) 반간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이듬해에 좌대언이 되었으며 1407년 이조판서 남재번(南在潘)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12년 4월 형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처음에 공정(恭靖)이라 했으나 나중에 공의(恭懿)로 개시(改諡)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승상(李升商) 미상~141..

관란공(觀瀾公) 이승증(李承曾)

관란공(觀瀾公) 이승증(李承曾) 1515(중종 10)~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자는 희로(希魯), 호는 관란(觀瀾)이며 경주 출신으로 태종 때의 위사공신(衛社功臣) 공조판서 양(良)의 증손이다. 성리학자 김대유(金大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60년 추천으로 건원릉참봉·1562년 사옹원제조·1564년 상의원제조·1580년 종부시전첨(宗簿寺典籤)·사도시직장 등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절하던 자리가 1척이나 움푹 파였으며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관찰사가 공의 학문과 효행을 장계하여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마을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충효동(忠孝洞)’으..

벽오공(碧梧公) 이시발(李時發)

벽오공(碧梧公) 이시발(李時發) 1569(선조 2)~1626(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양구(良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상지(駱尙志)가 이끄는 명나라 군사가 경주에 주둔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복무하였다. 1594년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하기도 하였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 순무어사를 겸하였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한 공으로 장악원정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해 겨울에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 이시술(李時術)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 이시술(李時術) 1606(선조 39)~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강(士强). 명상 항복(恒福)의 손자이며 부사 정남(井男)의 아들이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급제하고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등을 지낸 다음 1652년(효종 3) 정랑으로 있을 때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1655년 정언에 오르고 사서·헌납·부수찬·부교리·사간·교리 등을 역임하고 1659년(현종 1) 사은정사(謝恩正使)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선천부사와 의주부윤을 지내고 형조참의·부승지·대사간·호조참의·병조참의·이조참의·승지 등을 거쳐 1668년에 가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669년 변조참판과 이조참판에 이르러 1671년 12월에 ..

성재공(省齋公) 이시영(李始榮)

성재공(省齋公) 이시영(李始榮) 1869(고종 6)~1953. 선생은 저 유명한 구국의 명신 백사공(白沙公)의 10대손이다. 아시는 바와같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공은 임진왜란 때에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으면서 끝까지 이 땅에서 왜적(倭賊)을 몰아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으로서 임진, 정유의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뒤에 선조대왕께서 “종사(宗社)가 한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참으로 모든 대신들이 한 몸이 되어 애쓴 공로에 의함이지마는, 반드시 그 공로의 순위를 따지기로 한다면 그 첫 번째의 공훈은 부득불 경(卿)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宗社還于舊都只是賴諸卿力爾諸卿誠同功一體然必欲論首功不得不歸之卿耳)”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다. 백사공의 가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