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1331(충혜 1)~1410(태종 10).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계저(季著). 대제학 검교정승(檢校政丞) 세기(世基)의 손자이고 대제학 문하시랑평장사 천(蒨)의 아들이다.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대언·호부랑중·병부령·상서·판밀직사사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고 이어서 공안부사(恭安府事)에 임명되었다. 태종과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개국에 협력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보국승록대부가 가자되었으며 검교좌정승에 이르러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1410년(태종 10)에 졸하니 왕이 명으로 예장(禮葬)하라 하고 하교(下敎)하기를 “검교정승 이성중은 노덕(老德)이 있으니 마땅히 예(禮)로써 우대할 것이요 또 종1품 이상은 모두 예장(禮葬)하니 비록 검교..

양와공(養窩公) 이세구(李世龜)

양와공(養窩公) 이세구(李世龜) 1646(인조 24)~1700(숙종 2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수옹(壽翁)·호는 양와(養窩).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목사 시현(時顯)의 아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들고 1695년(숙종 21)에 추천을 받아 예산(禮山)현감에 보임되고 2년뒤 장령을 거쳐 서연관(書筵官)·홍주목사 등을 엮임하였다. 그는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에 박통(博通)하였고, ≪대학(大學)≫의 ‘물격설(物格說)’에 있어서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와 다르다고 반박했으며,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의 잘못을 지적했다. ‘기해예설(己亥禮說)’에 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이었으며 ≪가례(家禮)≫도 여러 학설을 집대성하여 독자적인 주석을 붙였..

이조정랑공(吏曹正郞공) 이세장(李世長)

이조정랑공(吏曹正郞公) 이세장(李世長) 1628(인조 6)~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도원(道遠), 영의정 항복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1652년(효종 3)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갔으며, 1662년(현종 3)에 증광문과 을과에 올라 승문원 가주서가 되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어서 성균관 전적에 이르고 예조좌랑을 거쳐 영남어사가 되고 사람들이 꺼리는 절해9絶海)의 도서(島嶼)들을 두루 살피고 그 실정을 보고하였다. 1667년 사강원 사서·지평·지제교에 오르고 옥당(玉堂)에 선입되었으며 이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1668년 병조좌랑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조로 보임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

구천공(龜川公) 이세필(李世弼)

구천공(龜川公) 이세필(李世弼) 1642(인조 20)~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군보(君輔)·호는 구천(龜川). 명상 항복의 증손이고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며 좌의정 태좌의 아버지이고 영의정 종성의 조부이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광에 유배되어 5년 동안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78년(숙종 4) 유배에서 풀려나 1680년 창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동몽교관이 되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으로 부임하여 가뭄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과세를 감하여 주고 부역(賦役)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푸는 한편 학교를 일으켜 준재(俊才)를 뽑아 가르쳤다. 이어서 진위현령(振威縣令)..

예조좌랑공(禮曹佐郞公) 이세현(李世賢)

예조좌랑공(禮曹佐郞公) 이세현(李世賢) 1656(효종 7)~1697(숙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석경(碩卿). 1681년(숙종 7) 성균시에 급제하고 출사(出仕)하여 예조좌랑·형조좌랑·공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났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이 이를 지지한 남인(南人)에 의하여 패배하고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간 사건을 이른다. 극력 반대하던 송시열은 파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고 그를 따르던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 수명이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이렇게 정국이 삼엄한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홀로 상소를 올려서 그 부당함을 통박했으나 미치지 못하..

송사공(松史公) 이수경(李壽卿)

송사공(松史公) 이수경(李壽卿) 1882(고종 19)~1955. 거문고의 명인 자는 치일(致一), 호는 송사(松史). 서울 출신. 헌종 때의 피리의 명인인 이인식(李寅植)의 장손이고 고종 때 피리의 명인인 이원근(李源根)의 장남이며 가곡의 명창 이병성(李炳星)의 아버지이다. 1892년(고종 29) 장악원에 보임되고 1901년의 진연(進宴) 때는 방향(方響)을 맡았고 1902년의 진연에는 편경(編磬)을 담당했다. 1903년에 가전악(假典樂)이 되고, 1913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거쳐서 아악사(雅樂師)가 되었다. 1939년 이왕직아악부를 사임할 때까지 김영제(金寧濟)·함화진(咸和鎭)·최순영(崔淳永) 등과 함께 아악의 보존과 육성에 공헌하였다. 그는 특히 영산회상(靈山會相. 일명 거문고회상)과 도드리의 연..

밀직원사공(密直院使公) 이수림(李壽林)

밀직원사공(密直院使公) 이수림(李壽林) ?~1369(공민왕 18). 고려말의 문신 명상 제현(齊賢)의 손자이고 전법총랑 달존(達尊)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성리학자 백이정(白頤正)의 딸로서 고려 후기의 손꼽히던 명문세족의 후예이다.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가 되고 이어서 이부판서를 역임하고 1356년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3년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으로 왕을 삼으려하자 동지밀직시사가 되어 홍순(洪淳)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백관과 기로(耆老)들이 공민왕을 옹호하는 글을 어사대에 바쳤다. 1369년 고려가 북원(北元)의 사신 노은(盧訔)을 죽인 뒤에 배원(排元)정책을 천명하면서 지난날의 친원파들을 숙청할 때에 당시 밀직원사(密直院使)였던 공도 해를 입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은암공(隱庵公) 이수일(李守一)

은암공(隱庵公) 이수일(李守一) 1554(명종 9)~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증영의정 난(鸞)의 아들이고 우의정 완(浣)의 아버지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 1590년 선전관이 되었고 이듬해에 장기현감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분전했으나 예천·용궁에서 패하였으나 오히려 밀양부사로 승진하였고 이어서 경상좌도 수군정도사에 올라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가선대부가 가자되었다.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로 보임되었으며 다음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6년에 다시 길주목사에 방어사..

공의공(恭懿公) 이승상(李升商)

공의공(恭懿公) 이승상(李升商) ?~1413(태종 13). 조선 초기의 문신 문정공(文靖公) 달충(達衷)의 손자이다. 1382년(우왕 8) 성균시에 장원하였는데, 특히 방원(芳遠. 태종)과 동방(同榜)이었으므로 그 뒤에 태종의 후대를 받게 된다. 1400년(정종 2) 반간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이듬해에 좌대언이 되었으며 1407년 이조판서 남재번(南在潘)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12년 4월 형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처음에 공정(恭靖)이라 했으나 나중에 공의(恭懿)로 개시(改諡)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승상(李升商) 미상~141..

관란공(觀瀾公) 이승증(李承曾)

관란공(觀瀾公) 이승증(李承曾) 1515(중종 10)~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자는 희로(希魯), 호는 관란(觀瀾)이며 경주 출신으로 태종 때의 위사공신(衛社功臣) 공조판서 양(良)의 증손이다. 성리학자 김대유(金大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60년 추천으로 건원릉참봉·1562년 사옹원제조·1564년 상의원제조·1580년 종부시전첨(宗簿寺典籤)·사도시직장 등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절하던 자리가 1척이나 움푹 파였으며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관찰사가 공의 학문과 효행을 장계하여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마을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충효동(忠孝洞)’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