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소남공(少南公) 이희수(李喜秀)

소남공(少南公) 이희수(李喜秀) 1836(헌종 2)~1909(순종 3). 조선 말기의 서화가 자는 지삼(芝三), 호는 소남(少南)·경지당(景止堂). 산수화·난초·대나무의 그림에 모두 능하였고 7세에 전(篆)·예(隸)·해(楷)·행(行)을 잘 썼으며 한 밤중에 어둠 속에서 글씨를 써도 자획이 어긋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문하생들이 모여들었고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왔다고 한다. 성격이 단정하였으며 강하고 기이한 화풍을 즐겼다. 유작 가운데 남종화풍에 바탕한 것으로는 (개인 소장)가 있는데, 제시(題詩)와 함께 독특한 인상을 주며 눈 덮인 강 언덕과 침엽수의 묘사가 거칠고 선명하여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보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

천휴당공(天休堂公) 이몽규(李夢奎)

천휴당공(天休堂公) 이몽규(李夢奎) 1510(중종 5)~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 증이조판서 인신(仁臣)의 계자(季子)이고 명종 때의 명장 몽린(夢麟)의 넷째 아우이다. 태어나면서 특이하여 어려서 말을 배우고 글을 익혀 10세에 대의(大義)를 통달하므로 모두 국기(國器)라고 칭찬하였으며 상공(相公) 김극성(金克誠)이 사위를 삼았다. 거업(擧業)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보령(保寧)으로 내려가서 임석(林石) 사이에 서실(書室)을 짓고 ‘천휴당(天休堂)’이라 편액(扁額)했는데 나중에 그의 호(號)가 되었다. 그는 소쇄(瀟灑. 깨끗함)속에 홀로 앉아 마음을 비우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면서 학문과 수행(修行)을 평생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매죽헌공(梅竹軒公) 이완(李浣)

매죽헌공(梅竹軒公) 이완(李浣) 1602(선조 35)~1674(현종 13).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무공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당시 인조반정 이후 군권(軍權)을 쥐고 있던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滿浦)첨사가 되고 1627년 영유현령을 거쳐 상원군수·숙천부사를 지내고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에 포진하고 적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하여 미리 매복한 군사로 치게 하니 적이 크게 패하였다. 1638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옮기고 이듬해 최명길의 천거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문신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1640..

재사당공(再思堂公) 이원(李黿)

재사당공(再思堂公) 이원(李黿) ?~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 명상 제현(齊賢)의 7세손으로 현령 공린(公麟)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이조판서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19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495년(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그 뒤 호조좌랑을 거쳐 봉상시에 재직하면서 공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줄 것을 제안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이로 인하여 곽산에 장류(杖流)되었다가 4년만에 다시 나주로 이배되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로 참형을 당하였다.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신원(伸寃)되었고 뒤에 나주의 영강사(榮江祠)와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지퇴당공(知退堂公) 이정형(李廷馨)

지퇴당공(知退堂公) 이정형(李廷馨) 1549(명종 4)~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사직서령 탕(宕)의 아들이고 지중추부사 정암(廷馣)의 아우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평시서직장이 되고 1570년(선조 3) 형조좌랑·전적·호조좌랑·사관·형조정랑을 거쳐 1574년 사간원정언·경성판관이 되고 1576년 개성부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穀)·사송(詞訟)을 잘 처리하여 부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함경도순무어사·광주목사·홍문관부수찬·의정부검상·승정원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국당공(菊堂公) 이천(李蒨)

국당공(菊堂公) 이천(李蒨) ?~ 1349(충정왕 1).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군실(君實), 호는 국당(菊堂). 1299년(충렬왕 25) 성균시에 장원급제하고 1321년(충숙왕 8) 우사보(右思補)로서 폐인(嬖人) 이인길(李仁吉)의 첩의 아버지 서경낭장(西京郎將) 최득화(崔得和)을 수주수령(隨州守令)으로 임명하려 하자 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으므로 왕이 진노하여 곤장을 치고 섬에 유배하니 공의 직성(直聲)이 일세에 떨쳤다. 1344년(충혜왕 복위5) 지공거(知貢擧) 박충좌(朴忠佐)와 함께 동지공거로 진사 33인을 뽑았고,충목왕 즉위 원년 첨의평리상의로 교사(郊赦. 하늘에 제사 지내고 은사(恩赦)를베푸는 일)를 축하하고 돌아왔다. 뒤에 정당문학·밀직사사·추성보리공신 삼중대광첨의정승(推誠輔理功臣三重大匡僉議..

정렬공(貞烈公) 이규(李揆)

정렬공(貞烈公) 이규(李揆) 대호군 고려후기의 무신 충선왕 때 대호군을 거쳐 1324년(충숙왕 11) 우대언에 등용되고, 다음해 충숙왕의 비(妃)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가 용산행궁(龍山行宮)에서 죽자 원나라에 가서 공주의 상을 알렸다. 1327년 밀직부사로서 충숙왕이 1321∼1325년까지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충성을 다하여 충숙왕을 섬긴 공으로 2등공신이 되고, 다음해 원나라에 가서 연호를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올랐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충혜왕으로 다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는 충숙왕의 유명에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충혜왕의 복위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346년(충목왕 2)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이규는 월성..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이총섬(李寵暹)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이총섬(李寵暹) 門下侍中○高麗成宗에 置門下하니 秩二品. *1987년 경주이씨 대종보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성종(高麗成宗)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설치하니 2품(二品)관직이다.] 이총섬(李寵暹)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문신 고려 목종 때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의 건립을 주관하였고, 국자감 시험제도를 청원하여 성사시켰다. 그는 남궁원청(南宮元淸), 이윤관(李允寬), 중국에서 온 오인유(吳仁裕) 등과 함께 고려에도 오묘와 사직의 건립을 주청하여 성사시킨 뒤 이를 주관하였고, 광종 때 들어온 과거 시험과는 별도로 국자감에서 별도로 주관하는 국자감시 설립을 청원하여 성사시켰다. 과거 제도는 광종 때 이미 들어왔으나 국자감시는 그의 건의로 처음 창설되었다. 그 뒤 벼슬은 문하..

중흥조(中興祖) 15세 열헌공(悅軒公) 휘 핵(翮)

중흥조(中興祖) 15세 열헌공(悅軒公) 휘 핵(翮) 자(字)는 만리(萬里)이고 호(號)는 열헌(悅軒)이며 초휘(初諱-처음 이름)는 타(駝)이다. 중조 14세손인 문하평리 열헌공(悅軒公) 휘 핵에 이르러 3자 9손이 모두 현달하여 이름을 떨쳤으므로 열헌공을 경주 이문(慶州李門)의 ‘중흥조(中興祖)’로 받들고 있다. 열헌공은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벼슬이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인덕이 겸비하여 3대(본인, 아들, 손자)에 13명 중 5인(송암공 세기. 사인공 부. 이암공 관. 익재공 제현. 국당공 천)이 성균괴(成均魁)로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충렬왕(忠烈王) 때는 진(瑱- 東菴公)과 세기(世基)가 2.3위로 천장급제(天場及第)하여 황패(黃牌)를 받았고 나머지 손자들도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