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눌헌공(訥軒公) 이사균(李思鈞)

눌헌공(訥軒公) 이사균(李思鈞) 1471(성종 2)~1536(중종 31) 자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1498년에 문과에 급제, 1509년 교리를 거쳐 장악원정․우승지에 이르고 1513년 도승지가 되고 1517년 공조, 형조참의 때에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한 때 조광조일파로 몰리어 좌천되었으나 이조판서․참찬으로 승진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강(文剛)이고 ≪訥軒集≫이 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사균(李思鈞) 1471년(성종 2)~1536년(중종 31) 조선전기 우승지,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이희(李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

사학자 상백(想白) 이상백(李相佰)

사학자 상백(想白) 이상백(李相佰) 1904~1966 사화학자*사학자*체육인 호는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시우(時雨)의 3남이며 맏형은 독립운동가이며 중국군 중장인 상정(相定)이고, 중형은 시인 상화(相和)이며 아우는 수렵인(狩獵人) 상오(相旿)이다. 백부 일우(一雨)가 세운 우현서루(友絃書樓)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대구보통학교와 와세다제일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대학문학부 사화철학과를 마치고 와세다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더욱 고구하였다. 그 사이에 본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진단학보≫에도 무게있는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1945년에 경성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화학과를 신설하였으며 죽..

보재공(溥齋公) 이상설(李相卨)

보재공(溥齋公)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이상설(相卨)은 서기 1870년~1917에 출생하였는 바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충북 진천(鎭川) 출신으로 행우(行雨)의 장남이며 7세 때 용우(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불어를 익히고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고종 31년(서기 1894) 문과에 급제하고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만한 학자라는 평을 받았다. 2년 후에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탁지부 재무관 등을 거쳐서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의 요..

한학자 한파(漢坡) 이상옥(李相玉)

한학자 한파(漢坡) 이상옥(李相玉) 1908~1981. 사학자, 한학자 호는 한파(漢坡). 경기도 파주 출신. 1922년 양정고등보통하고교에 진학하고 1928년 일본 동양대학(東洋大學) 문학부에 입학, 중국문하고과 역사를 전공하고 1933년에 졸업과 동시에 서울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연구실에서 연구하다가 1934년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동양철학을 연구하고 1946년 경기고등학교에서 한국사와 동양사를 담당하였고, 1950년 이후에는 서울대 치대에서 한국사를 강의하였고, 1956년 국학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한국사연구에 전념하고 1960년 국학대학장, 우석대학교대학원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끝으로 정년퇴임하였다. 1963년 ≪한국의 역사≫ 전 12권을 저술하여 제4회 한국출판문화..

독립운동가 청남공(晴南公) 이상정(李相定)

독립운동가 청남공(晴南公) 이상정(李相定) 1897~1947. 독립운동가 별명은 연호(然浩), 직(直). 호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구 출신. 상화(相和)·상백(相佰)의 장형.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강의원(講義院)에서 수학하고 1912년 동경에 있는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미술학교와 상업학교를 거쳐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오산(五山)·경신(儆新)·계성(啓聖) 등의 학교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1923년 만주로 망명, 항일독립운동을 한 다음에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 등과 풍옥상(馮玉祥) 장군의 서북국민부대의 장성참모, 장개석(蔣介石) 군대와의 통합으로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 항일전선에 참여하였다. 그..

언론인 하몽(何夢) 이상협(李相協)

언론인 하몽(何夢) 이상협(李相協) 1893~1957. 언론인. 소설가 호는 하몽(何夢). 서울 출신.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1909년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여 1912년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1916년 편집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 퇴사하여 동아일보 창간 때 발행인으로 허가를 얻고 주식회사로 발족하게 되자 28세로 편집국장에 오르니 우리나라 언론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초대 편집국장·논설위원·사회부장·정리부장 등을 겸하고 1면의 란과 사회면에 란을 신설하여 집필을 도맡는 등 1인 10역의 만능신문인으로 당시의 언론계에서 혜성같은 존재가 되었다. 1921년 편집 겸 발행인이라는 명예직을 사임하고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면서 1922년 4월 12일자 창간 2..

의병(義兵) 이석(李錫)

의병(義兵) 이석(李錫) 1882~1909 한말의 의병 자는 사옥(士玉). 경상북도 청송 출신. 1896년 의병이 각처에서 일어날 때 의병으로 나섰으나 정부의 의병 해산 조치로 산에 들어갔다가 1906년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이루어지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수하 좌영장(左領將)이 되고 1907년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영덕에서 의병을 모집하다가 남석문이 잡혀 처형되니 본대로 돌아갔고 마침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으며 얼마후 의병장 정환직이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 무렵 산남의진은 의병장이 없는 소수부대로 전락하여 유격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장기와 청하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울산으로 ..

동강공(東江公) 이석규(李錫奎)

동강공(東江公) 이석규(李錫奎) 1758(영조 34)~1839(헌종 5) 조선 후기의 문신·초명은 영석(永錫)·자는 치성(穉成)·호는 동강(東江). 경기도 진위(振威) 출신. 항복(恒福)의 7대손으로 경관(敬寬)의 아들이다. 1783년 사마시에 올라 참봉을 거쳐 고양군수로 재직 중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 성균관 대사성, 1820년 대사간을 거쳐 1821년 충청도 관찰사로 나아가 단양군의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군포(軍布) 등을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여 민폐를 줄였다. 1825년 형조판서에 오른 뒤에 이조·공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의정부 좌우참찬, 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보국승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

남록공(南麓公) 이석표(李錫杓)

남록공(南麓公) 이석표(李錫杓) 1704(숙종 30)~미상 자는 운원(運元), 호는 남록(南麓). 판서 인엽(寅燁)의 손자, 학자 하곤(夏坤)의 아들. 1729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1733년에 알성분과에 장원급제한 뒤 6품직에 등용되어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1735년 8가지 시폐(時弊)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당시의 영상 김흥경(金興慶)이 논척되었다. 영조는 겉으로는 직서하는 자를 우대한다는 구실로 함열현감을 제수하고 말을 하사하였으나 사실은 좌천이었다. 결국 김흥경은 귀양가고 대사헌과 대사간이 바뀌는 파란이 일어난 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변호로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교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학문이 뛰어나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

기헌공(杞軒公) 이성룡(李聖龍)

기헌공(杞軒公) 이성룡(李聖龍) 1672(현종 13)~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운룡(雲龍), 자는 자우(子雨), 호는 기헌(杞軒).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종 때에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으로 몇 차례 군덕(君德)에 관한 소를 올렸다. 여러번 승지로 발탁되고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전라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1740년 대시간으로 있을 때 죽은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의 삭탈관직과 이광좌(李光佐)의 파직을 주장하다가 삭직되고 이듬해 공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성룡(李聖龍) 1672년(현종 13)~1748년(영조 24) 조선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