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생곡공(生谷公) 이인환(李寅煥)

생곡공(生谷公) 이인환(李寅煥) 1633(인조 11)~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백(文伯), 호는 생곡(生谷). 판서 시발(時發)의 손자이며 경연(慶衍)의 아들이다. 166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언·수찬 등을 지냈고 1675년(숙종 1)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680년 사간·집의에 이르고 1681년 응교·승지를 거쳐 1684년 대사간이 되었다. 1685년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상소하기도 했다. 대사성·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를 거쳐 1697년 도승지에 오르고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인환(李寅煥) 1633년(인조 11)~1699년(숙종 25) 조선후기 경기도관찰사, 개성부..

송포공(松圃公) 이일로(李逸老)

송포공(松圃公) 이일로(李逸老)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수(晦叟), 호는 송포(松圃). 일영(逸英)의 아우이다. 1613년(광해군 5)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역모로 몰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한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항소하여 흉당을 공박한 일로 투옥되었고 역모로 몰아 가혹한 국문(鞠問)을 하는데도 자기의 소행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일일이 직고(直告)하여 온갖 고초를 겪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15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서 종묘봉사에 배치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므로 형 일영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때에 형수 이씨(李氏)와 부인 이씨(李氏)도 함께 순절하여 한 집안에서 네 사람이 순국하였다. 1834년(순조 34..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일범(李一凡)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일범(李一凡) 1917~1973. 광복군. 일명 경태(敬泰) 1935년 6월 신사참배반대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 중에 북경으로 탈출하여 회잉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39년 난징(南京) 국립중앙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 송지영(宋志英)·조일문(趙一文)·이정선(李正善) 등 10여명의 학우(學友)를 만나 항일비밀결사인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고 그 회장과 대장을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1940년 2월 난징 거주 교포인 정윤관(鄭允官)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각지의 대원에게 분배하고 그해 7월 7일 난징에서 일본인이 출입하는 음식점에 시한 폭탄을 장치하여 일본인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1943년 6월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

상산공(常山公) 이재수(李在秀)

상산공(常山公) 이재수(李在秀) 1912~1974. 국문학자. 호는 상산(常山). 충북 진천 출신. 봉섭(鳳燮)의 4남이다.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진천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청주고등보통학교를 나와서 1938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과(한국고전문학 전공)를 졸업하였다. 1945년 광복까지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明信中學校)와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의 교유(敎諭)로 있었고 1946년 국학대학 교수·연희대학 조교수로 취임했다가 그 해 9월에 사임하였고 숙명여자대학과 중앙대학 강사로 있다가 1948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교수로 2년 동안 근무하다가 1950년 대구사범대학(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취임한 이래 1974년까지 25년간 근무하였다. 1961년부터 10여년간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

안동부사공(安東府使公) 이전(李專)

안동부사공(安東府使公) 이전(李專) 생몰년 미상. 조선 초의 문신 고려말의 호부상서 달충(達衷)의 아들. 벼슬은 동지밀직사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태조의 개국(開國)에 협력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396년(태조 5) 익안대군(益安大君)·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 등과 술자리에서 추중망언한 일로 해남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죽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전(李專) 생몰년 미상 조선전기 안동부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고려 말의 호부상서 이달충(李達衷)이며, 아들은 이조판서 이승상(李升商)이다. 벼슬은 동지밀직사사·안동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태조에 의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1396년..

경림군(慶林君) 이정(李淀)

경림군(慶林君) 이정(李淀) 1589(선조 22)~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조호(淙滈)· 자는 노천(老泉),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9년 금오랑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세력가인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당으로 끌어들이려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뒤에 직장(直長)에 올랐으나 행신(倖臣)의 서자와 같은 벼슬이라 하여 스스로 물러났다. 1623년 (인조 1) 인조반정 뒤 거창현감으로 내려갔고 이괄의 난 때에는 아버지를 도와 반군을 막았다. 뒤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를 핑계로 사양하였고 장례원판결사로 임명되었다. 1661년(현종 2) 노비의 일이 궁액(宮掖)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668년..

김해부사공(金海府使公) 이정(李靖)

김해부사공(金海府使公) 이정(李靖)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위경(衛卿). 정암(廷馣)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김해부사 등을 역임하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수안군수직무대리로서 수안성을 지켜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경군(京軍)에 합류하여 안령(鞍嶺) 북쪽을 지킨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정(李靖) 생몰년 미상 조선후기 진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위경(衛卿). 할아버지는 이정암(李廷馣)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동부승지·김해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수안군수 직무..

첨서승추부사공(僉書承樞府事公) 이정견(李廷堅)

첨서승추부사공(僉書承樞府事公) 이정견(李廷堅) ?~1409(태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고려말의 정랑 육(毓)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한 뒤 좌상시·밀직사사 등을 거쳐 조선 태조 때에는 간관을 역임하고 태종 조에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에 이르렀다. 1402년(태종 2) 예문관제학으로 우의정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명나라의 고명인장(誥命印章)의 하사를 사례하기 위한 대명사행(對明使行)을 수행하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정견(李廷堅) 미상~1409년(태종 9) 조선전기 좌상시, 밀직사사,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고려말의 정랑 이육(李毓)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

후포공(後浦公) 이정원(李挺元)

후포공(後浦公) 이정원(李挺元) 1567(명종 22)~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인(仲仁), 호는 후포(後浦). 충량(忠良)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서·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사간 등을 거쳐 1614년 군기시정·필선이 되었다. 1620년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충주에 살 때에 진사로서 정인홍(鄭仁弘)을 부추기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고 뒤에 대북파에 호응하여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 되었다. 궁중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벼슬을 처거하고 문관의 인사에 관여하는 등 부정을 일삼다가 인조반정 후 정인홍·민심·유세증·서국정·한정국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

익재공(益齋公) 이제현(李齊賢)

익재공(益齋公)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이제현(李齊賢. 충렬왕 13(서기1287)~공민왕 16(서기1367))은 고려말의 정치가이며 성리학자였고 원(元)의 위협속에서 기울어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혼자서 버텨낸 위인이었다.자는 중사(仲思),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서기1301)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문과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다. 성균악정에 이르렀을 때에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부르므로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의 명사들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심오해졌으며 이 때에 진감여(陳鑑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