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귤산공(橘山公) 이유원(李裕元)

귤산공(橘山公) 이유원(李裕元) 1814(순조 14)~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고 홍문관대제학·예조판서·좌찬성·병조판서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아 1865년(고종 2)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영중추부사로 회복되고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세자책봉문제로 1875년 주청사(奏淸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의논하였다. ..

초려공(草廬公) 이유태(李惟泰)

초려공(草廬公) 이유태(李惟泰) 1607(선조 40)~1684(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유학 서(曙)의 아들이다. 김집(金集)의 천거에 의하여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진선·집의를 거쳐 1660년(현종 1)의 복제시비 때에 호군에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그뒤에 효종 말년부터 준비하여 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조목조목 따지고 구국(救國)·휼민(恤民)의 계책을 제시하므로, 왕이 비변사(備邊司)의 제신들에게 검토하라고까지 했..

퇴사암공(退思菴公) 이윤(李潤)

퇴사암공(退思菴公) 이윤(李潤) ?~1592(선조 25). 자는 존중(存中), 호는 퇴사암(退思菴) 감사 감(堪)의 손자이다. 이이(李珥)·조헌(趙憲)과 더불어 수학하고 1582년(선조 15) 죽산현감으로 재임 중 포탈혐의로 파면되었으나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청주에서 조헌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무찌르고 금산에서 조헌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윤(李潤) 미상~1592년(선조 25) 조선전기 죽산현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존중(存中), 호는 퇴사암(退思菴). 할아버지는 감사 이감(李堪)이다. 이이(李珥)·조헌(趙憲) 등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였다. 15..

간옹공(艮翁公) 이익(李瀷)

간옹공(艮翁公) 이익(李瀷) 1579(선조 12)~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 옥포(玉浦). 판관 유일(惟一)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고 뒤에 사서·전언·헌납·지평·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 직강에 이르렀다. 인목대비의 폐비논의가 일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다행히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안치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사예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사후에 전한(典翰)에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

애산공(愛山公) 이인(李仁)

애산공(愛山公) 이인(李仁) 1896~1979. 변호사·정치인. 호는 애산(愛山). 대구출생. 할아버지는 성리학자였고 아버지는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중심인물이었다. 대구의 달동의숙과 경북실업보습학교를 하고 1912년 일본 세이소중학교(正則中學校)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과정인 고등전공과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변호사의 꿈을 안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돌아와 서울에서 개업을 한 다음 처음 변론을 맡은 것이 의열단사건(義烈團事件)이었다. 당시의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사에 남을만한 사건에는 빠지지 않고 관여하여 변론하였다. 수원고농사건(水原高農事件) 때에는 법정불온변론문제로 변호사정..

노포공(老圃公) 이인소(李寅燒)

노포공(老圃公) 이인소(李寅燒) 1637(인조 15)~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명(子明), 호는 노포(老圃). 좌의정 경억(慶億)의 아들. 1663년(현종 4) 진사가 되고 문음(門蔭)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다. 정승 정재승(鄭載嵩)이 “몸가짐이 맑고 신실하다.”고 천거하여 낭관에 올랐다. 1693년(숙종 19) 57세로 아우 인병(寅炳)과 함께 급제하여 수찬으로 있으면서 화폐 유통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였고 뒤에 교리에 이르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인소(李寅燒) 1637년(인조 15)~1698년(숙종 24) 조선후기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명(子明),..

악사(樂師) 이인식(李寅植)

악사(樂師) 이인식(李寅植) 생몰년 미상. 조선 헌종~고종 때의 악사(樂師)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가전악(假典樂)·1876년과 1892년의 진찬(進饌) 때에는 집사악사(執事樂師)로 활약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李壽卿)의 할아버지이고 가곡(歌曲)의 명인 이병성(李炳星)의 고조부이다. 이 집안은 피리의 대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세습궁중악’의 가문이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인식(李寅植) 생몰년 미상 개항기 전악, 집사악사 등을 역임한 국악인. 악사(樂師).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가전악(假典樂), 1876년(고종 13) 7월 전악(典樂)이 되..

회와공(晦窩公) 이인엽(李寅燁)

회와공(晦窩公) 이인엽(李寅燁) 1656(효종 7)~1710(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장(季章). 호는 회와(晦窩). 좌의정 경억의 아들이다. 1684년(숙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 숙종이 희빈 장씨(禧嬪 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하려하자 서인들이 실권하게 되었는데, 숙종이 중전 민씨(閔氏)까지 폐하려 하자 공이 전 한림으로 전 판서 오두인(吳斗寅)·전 참판 이세화(李世華)·전 응교 박태보(朴泰輔) 등 서인들과 반대상소를 올렸다. 뒤에 양역변통(良役變通)을 주관하였고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강화부 방비를 위한 진(鎭) 설치를 위한 그의 견해는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되어 종종 인용되다가 정조 때에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에 이르렀..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 1241(고종 29)~?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문하평리 핵(翮)의 장남이고 검교정승 진(瑱), 대제학 세기(世基)의 장형이며 정승 제현(齊賢)의 큰아버지이다. 호는 성암(誠菴). 일찍이 문과에 등제하여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다가 1276년(충렬왕 2) 2월에 전중시어사로 승진했는데, 3월에 왕이 본궐(本闕)에 설치한 장경도장(藏經道場)에 가다가 전후(殿後)에 두견화(杜鵑花)가 만발한 것을 보고 4운(四韻)을 내리어 시를 지으라 하니 공이 민지(閔漬)·백문절(白文節) 등 18 사신(詞臣)과 함께 시를 지어올렸다. 뒤에 정언에 이르렀는데, 여러 낭사(郎舍)와 더불어 말하기를 “근래 내수(內豎)로 있는 미천한 자들이 임금을 수종(隨從)한 공로로 사도(仕途. 벼슬길)가 허..

한성부좌윤공(漢城府左尹公) 이인하(李仁夏)

한성부좌윤공(漢城府左尹公) 이인하(李仁夏)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우의정 완(浣)의 조카. 자는 하숙(夏叔). 효종 초에 현감·도총부경력 등을 거쳐 1654년(효종 5) 어영대장·1656년 충청도수군절도사·1660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과오로 파직되었다. 다시 복직되어 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9년(숙종 5) 삼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덕원에서 거제도로 이배(移配)되던 송시열(宋時烈)을 중도에서 대접한 일로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1680년 송시열이 풀려나자 복직되어 1682년 병조참판·총융사에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나 복직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