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벽오공(碧梧公) 이시발(李時發)

벽오공(碧梧公) 이시발(李時發) 1569(선조 2)~1626(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양구(良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상지(駱尙志)가 이끄는 명나라 군사가 경주에 주둔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복무하였다. 1594년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하기도 하였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 순무어사를 겸하였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한 공으로 장악원정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해 겨울에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 이시술(李時術)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 이시술(李時術) 1606(선조 39)~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강(士强). 명상 항복(恒福)의 손자이며 부사 정남(井男)의 아들이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급제하고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등을 지낸 다음 1652년(효종 3) 정랑으로 있을 때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1655년 정언에 오르고 사서·헌납·부수찬·부교리·사간·교리 등을 역임하고 1659년(현종 1) 사은정사(謝恩正使)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선천부사와 의주부윤을 지내고 형조참의·부승지·대사간·호조참의·병조참의·이조참의·승지 등을 거쳐 1668년에 가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669년 변조참판과 이조참판에 이르러 1671년 12월에 ..

성재공(省齋公) 이시영(李始榮)

성재공(省齋公) 이시영(李始榮) 1869(고종 6)~1953. 선생은 저 유명한 구국의 명신 백사공(白沙公)의 10대손이다. 아시는 바와같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공은 임진왜란 때에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으면서 끝까지 이 땅에서 왜적(倭賊)을 몰아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으로서 임진, 정유의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뒤에 선조대왕께서 “종사(宗社)가 한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참으로 모든 대신들이 한 몸이 되어 애쓴 공로에 의함이지마는, 반드시 그 공로의 순위를 따지기로 한다면 그 첫 번째의 공훈은 부득불 경(卿)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宗社還于舊都只是賴諸卿力爾諸卿誠同功一體然必欲論首功不得不歸之卿耳)”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다. 백사공의 가문은 ..

공주목사공(公州牧使公) 이시현(李時顯)

공주목사공(公州牧使公) 이시현(李時顯) 1622(광해군 14)~1678(숙종 4) 자는 사영(士榮). 명상 항복(恒福)의 손자이고 부사 성남(星男)의 아들이다. 1659년(효종 10) 병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의 추천으로 사옹원봉사가 된 뒤에 사복시직장·홍산현감을 거쳐 개령현감에 이르렀다. 때마침 가뭄으로 기근이 들었으나 비축미가 없어서 경비의 절약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비상수단으로 많은 백성을 죽음에서 건졌다. 이 사실이 암행어사 신정(申晸)이 장계(狀啓)하여 이듬해에 성주목사로 승진하였다. 이곳에서도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고 이어서 공주목사에 이르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시현(李時顯) 1622년(광해군 14)~1678년(..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1423(세종 5)~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무신 군수 종직(從直)의 아들. 서자로 태어나 어릴 때는 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했으나 비록 공부는 못했으나 무예에 능하여 장용위(壯勇衛)의 군졸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충의교위행호분위중부사직겸사복(忠毅校尉行虎賁衛中部司直兼司僕)이 되었다. 서얼출신이기 때문에 가선대부까지는 이르렀으나 한 번도 현직(顯職)에는 나아가지 못했고 평생을 겸사복으로 포도장을 맡아 도성을 물론 전국의 도적을 소탕하였다. 그 가운데 관악산을 근거로 출몰하는 고도(古道)·김말응(金末應) 등의 도적을 소탕하고 충주의 수리산(愁里山)·여주의 ..

공조참판공(工曹參判公) 이연손(李延孫)

공조참판공(工曹參判公) 이연손(李延孫) 1404(태종 4)~1463(세조 9). 조선 초기의 무신 상서공(尙書公) 과의 증손이고 첨지중추부사 숭수(崇壽)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의·형조참의·예조참의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졸후에 영의정이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예조정랑공(禮曹正郞公) 이영(李瑛)

예조정랑공(禮曹正郞公) 이영(李瑛) 1501(연산군 7)~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들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에 뽑혔으며 1544년 에조정랑이 되었고 병조정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면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명종 5)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명나라가 우리 나라 사신을 홀대(忽待)함을 지적하고 북경(北京)과의 무역을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성품이 총효·공검하였다 한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영(李瑛) 1501년(연산군 7)~1558년(명종 13) 조선전기 예조정랑, 병조정랑, 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윤(子潤). 이혁손..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1916~1976.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출신. 시조시인 호우(鎬雨)의 누이동생이다. 1945년 대구의 문예동인지 ≪죽순(竹筍)≫에 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뒤 통영여자고동학교·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거쳐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였다. 1964년 부산직할시 어린이회관 관장을 맡았고 ≪현대시학≫ 편집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66년 문학을 통한 사회봉사의 공로로 눌월문화상(訥月文化賞)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 (1956)·(1956)·(1957)·(1958)·(1959)·(1961)·(1965)·(1966)·(1968)·(1969)·(1970)·(1970) 등이 있다. 그녀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가는 고유의 가락을 재현하..

국악인(國樂人) 이원근(李源根)

국악인(國樂人) 이원근(李源根) 1850(철종 1)~1918. 한말 피리의 명인 자는 경재(景哉). 서울 출신. 피리의 대가인 인식(寅植)의 아들이다. 1860년 2월 장악원 악공이 되고 1869년 12월 가전악(假典樂), 1906년 1월 악사(樂師), 1908년 7월 전악(典樂), 1913년 8월 이왕직의 아악수장(雅樂手長), 1915년 4월 제사과(祭祀課)에 근무하였다. 아버지를 이어 피리 주자(奏者)로 활동했으며 맏아들 수경(壽卿)은 거문고의 명인이고, 넷째 아들 수억(壽億)은 관악기를 다루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원근(李源根) 1850년(철종 1)~1918년 대한제국기 악사, 전악 등을 역임한 국악인. 피리명인. 본관은 경주..

효정공(孝貞公) 이유승(李裕承)

효정공(孝貞公) 이유승(李裕承) 1835(헌종 1)~1906.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선(景先). 명상 항복(恒福)의 9대손이며 독립운동가 회영(會榮), 부통령 시영(始榮)의 아버지이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1866년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1868년에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고 이듬해 승지를 지냈다. 1878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1881년 고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려던 이재선(李載先)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1883년 호조참판·18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90년 대왕대비가 돌아가시자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예조판서에 임명되었고 형조판서를 거쳐 1891년 다시 한성부판윤이 되고 1893년 공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