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청하자(靑霞子) 이중약(李仲若)

청하자(靑霞子) 이중약(李仲若) ?~1122(인종 1). 고려 중기의 문신 자는 자진(子眞), 호는 청하자(靑霞子). 7대를 이은 명문 출신으로 어머니 이씨가 도사(道士)를 의미하는 노란색 관을 꿈에 보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여러서부터 도장(道藏)을 탐독하고 도풍(道風)을 섬겼다. 출가하여 가야산에 은거하여 스스로 청하자라 칭하며 수련을 쌓다가, 처사(處士) 은원충(殷元忠)과 선사(禪師) 익종(翼宗)의 주선으로 월출산으로 옮겨 일재(逸齋)를 짓고≪황정경(黃庭經≫에 으지하여 부상공(夫桑公-少明)·도은거(陶隱居-弘景)·장천사(張天師-道陵) 등을 받들고 연단(鍊丹) 수련을 하였다. 도교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조야에 명성을 떨쳤으며 숙종의 치료를 위하여 상경한 뒤 궁주에서 태자를 시봉했는데, 그 태자가 즉위하..

도승지(都承旨) 이중협(李重協)

도승지(都承旨) 이중협(李重協) 1681(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화중(和仲), 정언 익(瀷)의 증손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715년 사간원 정언을 거쳐 1717년 사헌부지평에 이르고 동지사 유명웅(兪命雄)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경종의 비 단의빈심씨(端懿嬪沈氏)가 죽으므로 대전(大殿)인 숙종의 며느리의 복상이 부장기(不杖朞)로 결정되자 대공복(大功服)으로 해야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719년 흉년을 당하여 기민구제를 하기한 공명첩(空名帖)의 발행을 중지하라고 상소하였다. 1722년(경종 2) 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에 갇히고 해남으로 귀양갔으며 다시 경원..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 1244(고종 31)~1321(충숙 8). 고려의 문신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 문하평리 핵(翮)의 둘째 아들이고 명상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체구(體軀)가 컸고 관홍(寬弘)하였으며 백가(百家)에 널리 통하고 운(韻)을 부르는 즉시 시를 지으므로 상서(尙書) 이송진(李松縉)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이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다음 1298년(충렬왕 24) 사림원(詞林院)에 들어갔는데 학사 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권영(權永) 등과 함께 왕이 홍정(붉은 가죽 띠)을 내렸다. 충렬왕이 친시(親試)로 문신들의 재능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아우 세기(世基)와 함께 2등과 3등에 뽑히어 그때 사람들이 ‘천장급제(天場及第..

덕봉공(德峯公) 이진택(李鎭宅)

덕봉공(德峯公) 이진택(李鎭宅) 1738(영조 14)~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양중(養重), 호는 덕봉(德峯). 경주 출신으로 이진원(李晉遠)의 문인으로 8세 때에 닭싸움을 보고 “상앙(商鞅)의 법으로 논죄할 것 같으면 이 닭은 당장 삶아 먹을 것을.....(若論商鞅法 此鷄當烹食.....)”이라는 글을 지어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전적·예조정랑·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헌부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의 사건에 책임이 있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793년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상소하여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하였으며 1801년(순조 ..

파서공(琶西公) 이집두(李集斗)

파서공(琶西公) 이집두(李集斗) 1744(영조 20)~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중휘(重輝), 호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臞鶴). 좌의정 경억(慶億)의 5대손으로 감역 진원(進源)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 진사가 되고,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뒤에 이조좌랑·장령·이조참의·대사성·승지를 거쳐 강릉현감으로 나갔을 때 상소하여 해폐(海弊)·군폐(軍弊)·세폐(稅弊)·삼폐(參弊) 등의 읍폐(邑弊)를 일소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어서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안동부사와 1798년(정조 22)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으며 1800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01년(순조 1) 한성부판윤·공조판서·예조판서가 되었고 1810년 ..

양평공(襄平公) 이철견(李鐵堅)

양평공(襄平公) 이철견(李鐵堅) 1435(세종 7)~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무신 자는 연부(鍊夫). 처음에 능직(陵直)으로 시작하여 사헌부감찰·충청도사·한성부판관에 이르러 다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통정대부·훈련도정를 거쳐 가선대부․자헌대부가 가자(加資)되었고 평안도 서도(西道) 절도사에 이르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성종 때에 좌리공신에 책봉되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오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공은 3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양조(兩曹)의 판서와 금려(禁旅. 궁중의 용호영(龍虎營)의 기사(騎士))의 도총관을 맡았으며 사헌부와 사간원의 수장이었고 한선부의 판윤을 다시 맡고 의정부의 이상(貳相)에 오랐으니 모든 직위를 고루 겪었다고 할 것이다. 1492년(성종 23)에 졸하니 향..

장례원판결사공(掌隷院判決事公) 이충급(李忠伋)

장례원판결사공(掌隷院判決事公) 이충급(李忠伋) ?~1627(인조 5).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중사(仲思), 용천(龍川) 출신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공로가 많았으므로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고 주부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쌓을 때 공을 세워 청수만호(靑水萬戶)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의주에 들어가 동문을 지키는 장수가 되어 부윤 이완항(李完巷)이 전사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1647년(인조 25)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리고 장례원판결사를 추서하였다. 의주 구암사(龜巖祠)에 배향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

명재공(命齋公) 이탁(李鐸)

명재공(命齋公) 이탁(李鐸) 1898~1967. 독립지사이며 국어학자 아명은 씨종(氏鍾), 호는 명재(命齋) 또는 월양(月洋).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한글학자 갑(鉀)의 형이다. 8세 때에 아버지에게 한학을 익히고 1916년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하여 장지영(張志暎)에게 조선문법을 배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집안현(輯安縣)으로 건너가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에 들어가서 독립군의 자질을 닦고 그 해 10월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1923년 8월 화전현(樺甸縣) 화림학교(樺林學校)에 부임하여 교편을 잡았다. 이듬해 ≪신단민사(神檀民史)≫의 보급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검거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3년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26년 12월 가출옥되어 양평으..

의정공(毅靖公) 이탁남(李擢男)

의정공(毅靖公) 이탁남(李擢男) 1572(선조 5)~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근숙(根叔), 좌참찬 몬량(夢亮)의 손자이다. 1600년(선조 33) 문음(門蔭)으로 등용되어 청단도찰방(靑丹道察訪)을 거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사복시주부를 역임하고 충청도 덕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1627년(인조 3) 강원도 횡성현감으로 있을 때,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이 나라를 그르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켜 관부(官府)에 침입하여 군기(軍器)를 약탈하고 죄수를 풀어주는 등 난동을 피우므로 그는 횡성을 빠져나와 원주로 가서 목사(牧使) 홍보(洪寶)와 함께 이인거를 쳐서 그의 아들 성지(姓支) 일당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 공으로 소..

아곡공(鵝谷公) 이태좌(李台佐)

아곡공(鵝谷公) 이태좌(李台佐) 1660(현종 1)~1739(영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 영의정 항복(恒福)의 현손이며 참판 세필(世弼)의 아들이고 영의정 광좌(光佐)의 재종형이며 영의정 종성(宗城)의 아버지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다음 검열·사서·지평을 거쳤고 희빈장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파직된 최석정(崔錫鼎)·이명세(李明世)를 구하려다가 도리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선산에 유배되었다. 1705년에 풀려나 정언이 되고 사서·부수찬을 거쳐 1706년 2월 경상우도의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고 이어서 부교리·이조정랑·부수찬·집의·응교를 거쳐 1708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에 영서(嶺西) 3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