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담헌공(澹軒公) 이하곤(李夏坤)

담헌공(澹軒公) 이하곤(李夏坤) 1677(숙종 3)~1724(영조 1).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자는 재대(載大), 호는 담헌(澹軒) 또는 계림(鷄林). 좌의정 경억(慶億)의 손자이고 대제학 인엽(寅燁)의 아들이다. 1708년(숙종 34) 진사에 급제하고 고향인 진천에 내랴가서 학문과 서화(書畵)에 힘썼으며 장서(藏書)가 1만권을 헤아렸다.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살피고 불교에도 관심을 갖고 사찰을 탐방하였다. 교유(交遊)하였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당대의 저명한 시인 이병연(李炳淵)·서예와 문장으로 유명한 윤순(尹淳)·화단의 거장이었던 정선(鄭敾)과 역시 화단의 일인자였던 윤두서(尹斗緖) 등이 꼽힌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문집 가운데 윤두서의 과 ≪공재화첩≫에 대한 여러 논..

금산공(琴山公) 이하영(李夏榮)

금산공(琴山公) 이하영(李夏榮) 1858(철종 9)~1919. 조선 말기의 활동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琴山). 1886년(고종 23) 외아문주사·사헌부감찰·전환국위원을 거쳐 9월 박정양(朴定陽)공사를 따라 겸임주차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고 다시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으로 미국에 주재하였다. 1889년 귀국할 때는 우리 나라 철도 건설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정부로부터 철도의 모형을 얻어오기도 하였다. 이어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웅천과 흥덕의 현감·외아문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회계원장이 되고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주재 중에 일본정부로부터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이 뒤에 중추원부의장·귀족원경·중추원의장 등을 역임하고 1899년 의정부찬정·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 겸 의정..

백사공(白沙公) 이항복(李恒福)

백사공(白沙公)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이항복(李恒福. 명종 11년(서기 1556년)~광해 10년(서기 1618년)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백사(白沙)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공의 아버지 몽량(夢亮)은 3조판서를 지냈고 당대의 명경(名卿)으로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악동(惡童)으로 골목대장이었으나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학문에 열중하더니 뒤에 학궁(學宮)에 들어가 더욱 정진하여 이름을 떨치니 당시의 재상 권철(權轍)이 듣고 만나보고서 손녀사위를 삼았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이 때에 만나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선조 13년(서기 1580년) 문과에 급..

북악공(北嶽公) 이해룡(李海龍)

북악공(北嶽公) 이해룡(李海龍) 1600~ 조선 중기의 서예가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 벼슬은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에 이르렀다. 선조 때의 사자관(寫字官)으로 한석봉(韓石峯) 못지 않게 뛰어난 필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588년(선조 21)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통신사의 사자관으로 일본에 가서 많은 글씨를 남기고 왔다. 지금 남아있는 금석문으로는 사현(沙峴)에 있는 가 전한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해룡(李海龍) 생몰년 미상 조선전기 금석문으로 사현의 양호묘비를 쓴 서예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 벼슬은 역관·사자관(寫字官)을 거쳐 내섬시주부(..

한성부판윤공(漢城府判尹公) 이현직(李顯稷)

한성부판윤공(漢城府判尹公) 이현직(李顯稷) 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형(伯衡). 총관(摠管) 격(格)의 아들이며 경상좌수사 학영(鶴榮)의 아버지이다. 1846년(헌종 12) 경상좌도수군절도사․전라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54년(철종 5) 삼도수군통제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65년(고종 2) 총융사에 올랐고, 이듬해 어영대장·공조판서를 겸하면서 경복궁의 중건을 감독하였다. 병인양요 뒤에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변방의 방비를 사찰하도록 하였는데, 그결과 통제사들의 죄가 드러나자 모두 치죄하고 공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1869년 호포전(戶布錢)의 작성에 향리들의 부정이 있어 일어난 고성(固城) 민란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한..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아호는 본명에서 취음(取音)하여 이호우(爾豪愚)라 하였다. 청도 출신이고 시조시인 영도(永道)의 오빠이다. 향리의 의명학당(義明學堂)을 거쳐 밀양보통하교․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으로 중퇴하고 낙향하였다. 1929년 일본 동경예술대학에 유학했으나 신경쇠약증세의 재발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광복후 ≪대구일보≫의 경영과 편집에 참여하면서 1952년 ≪대구일보≫의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지냈고 1956년 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일하면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문학활동으로는, 19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40년 ≪문장≫ 6·7호 합병호에 이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추천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포세공(逋世公) 이홍업(李弘業)

포세공(逋世公) 이홍업(李弘業)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립(時立), 호는 포세(逋世).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병조좌랑·고창현감 등을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미움을 받아 함경도 경성도호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적장 가또(加藤淸正)가 왜군을 이끌고 회령에 침입했을 때 회령부사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비롯하여 수10인을 포박하여 왜적에게 투항했을 때 그도 함께 붙들려갔는데, 적장이 강화문서를 작성하여 왕자와 대신에게 강제로 서명하라 하고 그 문서를 그에게 주면서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에게 전하라 하므로 의주 행재소에 이르렀으나, “적장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짓이므로 사형에 처하여야..

우당공(友堂公) 이회영(李會榮)

우당공(友堂公) 이회영(李會榮) 1867(고종 4)~1932.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년~1932)은 서울 출신으로 호는 우당(友堂), 좌찬성 유승(裕承)과 정경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 7남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안창호(安昌浩) 등과 비밀결사 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의 분야를 담당하고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협의한 다음 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숙장(塾長)으로 선임하여 교육을 시행토록 하였으나 1907년에 이상설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되었으므로 여준(呂準)을 파견하여 교무행정을 ..

설정공(雪汀公) 이흘(李忔)

설정공(雪汀公) 이흘(李忔) 1568(선조 1)~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오계(梧溪).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로 왕비를 해주로 호송하였다. 1595년(선조 28) 승문원정자·박사 등을 거쳐 전적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문학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었다. 이해에 왜적이 재침하자 중국어에 능통한 관계로 명장(明將) 진우층(陳愚衷)과 함께 울산에서 왜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뒤에 전라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황해도도사를 거쳐 배천군수가 되었는데, 봄에 관곡(官穀)..

양희공(襄僖公) 이흥적(李興啇)

양희공(襄僖公) 이흥적(李興啇) ?~1465(세조 11).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연(子衍). 음직(蔭職)으로 나가서 여러 관직을 겨쳐 판선공감사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당시에 의금부진무로 있을 때 수양대군의 지시로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김종서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공으로 정란공신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사에 올랐다. 1454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희(襄僖)이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흥상(李興商) 미상~1465년(세조 11) 조선전기 의금부진무, 첨지중추원사,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연(子衍). 음직으로 행수(行首)에 보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