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623

송재선생문집 -안동역사인물국역총서1

송재선생문집 -안동역사인물국역총서1 저자 : 이우 발행일 : 2018-08-30 사이즈 : 국배판 종류 : 국역서 페이지 : 622 2018년부터 새로이 안동시의 지원을 받아 안동의 빼어난 역사 인물들의 국역되지 않은 문집을 국역하여 새로이 발간하게 되었다. 그 첫 권은 바로 경북 안동 출신인 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의 문집이다. 이우는 바로 퇴계 이황의 숙부이다. 1498년 문과에 급제하고, 1506년 동부승지로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한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1508년 진주 목사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1515년에 안동 부사가 되었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1. 해제 2. 제1권 - 관동행록 ..

화론(畵論) 2. 조선전기의 화론

화론(畵論) -회화의 창작·감상 그리고 회화 양식의 변천 및 발달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이론. 2. 조선전기의 화론 고려시대 사대부들의 문인화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도 그들의 문집에 무수한 제화시(題畫詩)나 화찬을 남겼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이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 槿域書畫徵』에 인용되어 조선시대 회화사나 화론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정집 四佳亭集』·『필원잡기 筆苑雜記』·『동문선』, 강희맹(姜希孟)의 『진양세고 晉陽世稿』,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김일손(金馹孫)의 『탁영집 濯纓集』,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등을 들 수 있다. 초기의 사대부들이 시·서·화 삼절(三絶)을 높..

濯纓先生文集卷之三 / 記 > 臨錦堂記(임금당기)

濯纓先生文集卷之三 / 記 > 臨錦堂記 虎溪之水。出自盆山。飛鳴㶁㶁。流入北郭。經婆娑塔。縱一城通南郭。朝宗于海。其淺僅流。束蒲。而盛旱不渴。蓋有源之活水也。在城中。左右堰石。以障其溪流。空其中而上構高樓。曰燕子。然樓高而溪潺。不相稱也。又其下五十步許。構一樓。曰淸心。樓稍低而溪稍渟。水聲可及於客枕。與水頗宜。然未盡其勝。余常爲造物恨。弘治癸丑春。余奉綸音。頒諭到府。時府使丹陽禹公某。館余於新堂。堂在燕子,淸心之間。扁曰臨錦。吾友月城李侯宗準。所名而書者也。余不解所名之義。宋隆德故宮。有臨錦堂。元儒有臨錦堂前春水波之句。豈非以其波紋如錦。堂臨其上而名耶。觀其中流。架屋不樓而爽。東西有廂。溫涼異適。曲曲欄干。枚枚窓戶。玲瓏宛轉。檻下溪流。可俯而手掬。溪與堂明媚相照。又羅天鵝海鷗數雙而游其波。其鳴雝雝。聲應棟宇。驅而出之。始覺其在吾坐下。最奇事也。取琴而彈之。空聲相應。淸和疏越。大絃洞洞..

탁영선생문집 임금당기

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3권(卷之 三) 기(記) 6. 臨錦堂記(임금당 기문) 1493. 이해 륜음(綸音:조선시대에 국왕이 백성이나 백관에게 연초에 내리는 훈유의 문서)을 받들어 김해부에 도착하자 부사(府使) 우모(禹某)가 새로 지은 집에 숙소를 마련해주었는데 바로 임금당이었다. 친구 이종준(李宗準)이 지은 이름이었다. 동서로 방이 있어 한온(寒溫)을 구비하였으며 벽마다 창문이 있어 아름다웠다. 특히 난간 밑에는 시냇물이 흘러 거문고 퉁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가장 신기로웠다. 우공(禹公)과 수작(酬酌)하던 중 술이 절반 취하자 김일손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일찍이 공의 서울집에 가보니 천석(泉石)은 화려한데 집이 협소하여 가산(家産)에 소홀한 처사(處士)의 집과 같아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

울산보훈지청, 6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 ‘일가4형제 국가유공자위령비’ 선정

울산종합일보 울산보훈지청, 6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 ‘일가4형제 국가유공자위령비’ 선정 이남주 기자 / 기사승인 : 2021-06-01 08:32:32 울산보훈지청(지청장 김상출)은 생활 속의 보훈문화 확산을 꾀하고 현충시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일깨우기 위한 적극행정의 일환으로 2021년부터 매달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을 선정·홍보하기로 하였다. 2021년도 6월의 '이달의 현충시설'은 울주군 두동면 구미리 111에 위치한 ‘일가4형제 국가유공자위령비’ 이다. 울산 남구 신정동에서 태어난 4형제는 이재양, 류분기씨 부부의 자녀 6형제 중 장남 이민건(육군 하사), 차남 이태건(육군 상병), 삼남 이영건(육군 상병), 막내 이승건(해병 중사)으로 장남, 차남, 삼남은 6·25전쟁에서 막내는 월남전..

효정공(孝靖公) 이유응(李裕膺)

효정공(孝靖公) 이유응(李裕膺) 1817(순조17)~?.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창(景昌). 익재공 제현(齊賢)의 후손 계정(啓禎)의 아들이다. 1842(헌종8)년 정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1853(철종4)년 이조참의를 지내고 1862(철종13)년 이조참판을 지내다 1863(철종14)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1869(고종6)년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시(諡)는 효정(孝靖)이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장례원판결사공(掌隷院判決事公) 이형만(李衡萬)

장례원판결사공(掌隷院判決事公) 이형만(李衡萬) 1711(숙종37)~?. 조선 후기 문신 자는 평일(平一). 판서공 성룡(聖龍)의 아들이다. 1735(영조11)년 증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지내고 사간원정언을 거쳐 1742(영조18)년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이후 기장현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1746(영조22)년 세자시강원문학 사서를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내면서 숙마한필(熟馬一匹)을 하사 받았다. 1748(영조24)년 사헌부장령 필선을 지내고 1751(영조27)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어 민백창 이태 사건의 진위를 가려서 보고하였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

초천공(椒泉公) 이형좌(李衡佐)

초천공(椒泉公) 이형좌(李衡佐) 1668(현종9)~1746(영조22).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윤(景尹). 호는 초천(椒泉). 구천공 세필(世弼)의 아들이다. 1702(숙종28)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영유현령 천안군수를 지냈다. 1712(숙종38)년 인천현에 전임되어 1715(숙종41)년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임한지 1개월 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형좌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인천향교에 세워졌다. 1717(숙종43)년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어 선정을 베푼다는 암행어사 보고에 따라 포상을 받았다. 1728(영조4)년 원주목사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732(영조8)년 호조참의 수원부사를 지내다 1736(영조12)년 충청도관찰사 한성우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에 ..

승정원승지공(承政院承旨公) 이단장(李端章)

승정원승지공(承政院承旨公) 이단장(李端章) 1664(현종5)~1727(영조3).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상보(相甫). 초려공 유태(惟泰)의 손자이다. 1705(숙종31)년 증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사간에 이르렀다. 1709(숙종35)년 세자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717(숙종43)년 함평현감을 지낼 때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어사 조영복에 의해 파직되었다. 1724(경종4)년 사간원장령을 지내다 다시 파직되었다가 1725(영조1)년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사간원집의를 지냈다. 1726(영조2)년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지내다 1727(영조3)년 정미환국 때 파직되었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

가은공(加隱公) 이수종(李秀宗)

가은공(加隱公) 이수종(李秀宗) 1614(광해군5)~1666(현종7).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종(士宗). 호는 가은(加隱). 관수재공 응윤(應胤)의 아들이다. 1636(인조14)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성균진사로서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던 삼학사(三學士)(홍익한 오달제 윤집)가 심양으로 잡혀가자 백의의 몸으로 뜻을 함께하여 그들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갔다. 22년간을 청나라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가 1657(효종8)년 귀환하였다. 효종이 특별히 등용하는 벼슬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유망한 인재였으나 병자호란 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 절개를 지켰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