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이칭(李偁)

사록공(司錄公) 이칭(李偁)  補助功臣 門下侍中舊譜에 官은 司錄이니 補助功臣은 似 贈職 ○按載寧李氏譜에 李禹偁은 左司諫인 周復之子也라 門下侍中으로 封載寧君하고 爲始祖云하니 公의 兄弟이다. *1987년 경주이씨 대종보[보조공신(補助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구보(舊譜)에 벼슬은 사록(司錄)이니 보조공신(補助功臣)은 증직(贈職)인 것 같다. ○재령이씨(載寧李氏) 족보(族譜)를 보면 이우칭(李禹偁)은 좌사간(左司諫) 주복(周復)의 아들이라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재령군(載寧君)을 봉(封)하여 시조가 되었다. 곧 칭(稱)의 형제(兄弟)이다.]

좌사간공(左司諫公) 이주복(李周復)

좌사간공(左司諫公) 이주복(李周復) 左司諫○高麗穆宗朝에 改左右補闕하야 爲左右司諫하니 秩은 六品이다. ○麗史에 李周佐는 慶州人이니 穆宗朝에 登第하야 官이 刑部尙書라 하니 以是公之兄弟行而譜牒無傳하다. *1987년 경주이씨 대종보 [좌사간(左司諫, 정6품). ○고려(高麗) 목종(穆宗)이 좌우보궐(左右補闕)을 좌우사간(左右司諫)으로 고치니 벼슬의 차례는 6품(六品)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이주좌(李周佐)는 경주인(慶州人)이라 목종조(穆宗朝)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형부상서(刑部尙書)이니 공(公)의 형제(兄弟)인듯하나 족보(族譜)에 전함이 없다.]

정조시랑공(正朝侍郞公) 이승훈(李承訓)

정조시랑공(正朝侍郞公) 이승훈(李承訓) 正朝侍郞○高麗官制에 內史侍郞, 門下侍郞, 平章事, 中書侍郞인데 選秩은 六品이 卿職이고 七品은 曰正朝이다. *1987년 경주이씨 대종보 [정조시랑(正朝侍郞, 7품). ○고려관제(高麗官制)에 내사시랑(內史侍郞), 문하시랑(門下侍郞), 중서시랑(中書侍郞)이 있는데 벼슬차례에 6품(六品)은 경직(卿職)이고 7품(七品)은 정조(正朝)이다.]

호부낭중공(戶部郞中公) 이금서(李金書)

호부낭중공(戶部郞中公) 이금서(李金書) 中原太守 戶部郞中으로 始仕高麗하다. 配 慶州金氏 敬順王 溥의 三女라. 敬順王이 納土入朝하니 高麗太祖 - 妻以長女樂浪公主하고 比神鸞하야 賜號其宮하다. ○麗初에 李開 - 亦以慶州之李로 爲陜川戶長하야 仍貫 江陽은 陜川屬縣也라. *1987년 경주이씨 대종보 [벼슬이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이니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했다. 배(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니 경순왕(敬順王) '김부(金溥)'의 3女요. 고려태조(高麗太祖)의 외손(外孫)이다. 호(號)는 신란궁 부인(神鸞宮夫人), 경순왕(敬順王)이 땅을 바치고 입조(入朝)하니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로써 아내를 삼게하고 신란(神鸞)에 비하여 그 궁(宮)을 이름했다. ○고려초(高麗初)에 '이개..

병부령공(兵部令公) 이금현(李金現)

병부령공(兵部令公) 이금현(李金現) 兵部令○新羅 法興王이 置兵部令하고 大阿餐角干이 爲之得兼宰相하다. 羅麗習俗에 父子襲名하니 如權幸子仁幸과 襲直子直達是也라 公之父子가 以金字名이 恐是此例인저 *1987년 경주이씨 대종보 [병부령(兵部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이 병부령(兵部令)을 두어 대아찬(大阿餐), 각간(角干)의 벼슬로 재상(宰相)을 겸직(兼職)토록 하였다. 아들이 금서(金書)인데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풍속(風俗)에 부자(父子)의 이름자를 같이 하였으니 권행(權幸)의 아들이 인행(仁幸)이요, 공직(共直)의 아들을 직달(直達)이라고 함과 같다. 公의 父子가 금(金)자로 이름을 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준례(準例)라 할 것이다.]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蘇判○新羅官制에 蘇判은 惟眞骨受之하고 唐의 令狐澄新羅記에는 新羅貴族을 謂之骨이라 하다. 始祖以下는 失系하고 李牧隱이 撰益齋墓誌할새 只載蘇判以下하다. *1987년 경주이씨 대종보 [소판(蘇判). ○신라관제(新羅官制)에 소판(蘇判)은 오직 진골(眞骨)만이 갖고 당(唐)의 영호징 신라기(令狐澄新羅記)에는 신라귀족(新羅貴族)을 이르되 골(骨)이라 하였다. 시조이하(始祖以下)는 계보(系譜)를 잃어버렸으므로 이목은(李牧隱) 익재 묘지(益齋墓誌)에 글을 지을 때 다만 소판공(蘇判公) 이하(以下)만 실었다.]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 이거명(李居明)은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중시조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문(墓地文)에 ..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삼국시대 신라 초기 사로6촌의 하나인 알천양산촌의 족장.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로서 초기 사로육촌(斯盧六村) 중의 하나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었다. 하늘에서 강림하여 표암봉(瓢嵓峯)에 내려왔다고 한다. 사로국에는 6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급량부(及梁部)·사량부(沙梁部)·점량부(漸梁部)·본피부(本彼部)·한기부(漢岐部)·습비부(習比部)이다. 이 중 알천양산촌에 해당하는 것은 급량부로 신라의 국가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부락이다. 급량부의 성(姓)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한데 박씨(朴氏) 또는 김씨로 비정하고 있다. 6부(部)에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裴)·설(薛)이라는 성의 비정은 중국식 성을 후세에 붙인 것으로, 알평이 경주이씨의 시조라는 것은 ..

경주이씨 주요 인물

경주이씨 주요 인물 이(ㄱ) 이(ㄴ~ㅂ) 이(ㅅ) 이갑성(李甲成) 1889~1981.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호는 연당(硏堂).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제2대 민의원에 당선.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 33인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개립(李介立) 1544(중종 39)~1625(인조 2).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의 의병장. 자는 대중(大中 혹은 大仲), 호는 성오당(省吾堂)·역봉(櫟峰). 대호군(大護軍) 이욱(李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이선동(李善童)이다..

독립운동가 연당공(硏堂公) 이갑성(李甲成)

독립운동가 연당공(硏堂公) 이갑성(李甲成) 1889~1981 독립운동가.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 호는 연당(硏堂).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연소자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 서명, 학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고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獄苦)를 치렀다. 1931년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1940년 귀국하여 흥업구락부시건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의 회장이 되었고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했다. 뒤에 33인유족회장 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5년에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