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159

고양군수공(高陽郡守公) 이몽서(李夢犀)

고양군수공(高陽郡守公) 이몽서(李夢犀) 1508(중종3)~1569(선조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희서(希瑞). 판서공 인신(仁臣)의 넷째 아들이다. 1537(중종32)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1540(중종35)년 황산도찰방을 지내다 1545(인종즉위)년 돈령부직장을 거쳐 1546(명종즉위)년 내자시주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547(명종2)년 장흥고주부 창령현감을 거쳐 1553(명종8)년 사헌부감찰에 재임되었다. 1554(명종9)년 성주목판관을 지내고 안동부판관 사온서주부를 거쳐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이르렀고, 1560(명종15)년 고양군수(高陽郡守)에 올랐다. 고양군은 서울이 가까워 권세있고 존귀한 사람과 임금의 친척과 외척이 많이 살고 있어 오래 견디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공평으로 다스려 ..

사옹원정공(司饔院正公) 이몽윤(李夢尹)

사옹원정공(司饔院正公) 이몽윤(李夢尹) 생몰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응신(應莘). 찬성공 예신(禮臣)의 아들이다. 1528(중종23)년 식년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에 이르고 외직 평안도사 양근군수를 지내고 평산부사 장단부사를 거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춘추관편수관 지제교를 거쳐 사옹원정(司饔院正) 등을 역임하고 관직을 마감하였다. 명종조에 영상/윤원형을 멀리 하였기에 관직은 주로 외직 생활을 하였다.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근면하고 공명정대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조정에서는 권세를 탐하여 영상 윤원형에게 아첨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는 천성이 맑고 곧아서 권세있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으며 자신의 순탄한 벼슬살이 보다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다. 자료제공: 이범..

표덕공(表德公) 이구(李球)

표덕공(表德公) 이구(李球) 1488(성종19)~1550(명종5).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창서(昌瑞). 호는 표덕(表德). 양평공 철견(鐵堅)의 손자이다. 1510(중종5)년 33세에 무과시에 급제하고 훈령원봉사로 등관하여 오위부장을 거쳐 세자익위우익찬(世子翊衛右翊贊)에 이르렀다. 이어 병마만호(兵馬萬戶)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1534(중종29)년 호군을 지내고 1536(중종31)년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에 올랐다. 당시 영상/윤원형이 방자하게 권리를 남용하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충신과 백성들이 몸 둘 곳을 잃었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세촌공(細村公) 이문좌(李文佐)

세촌공(細村公) 이문좌(李文佐) 1461(세조7)~1491(성종2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현도(顯道). 호는 세촌(細村). 전서공 원선(元善)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늠름하고 덕행이 남달랐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1483(성종14)년 춘당식년시문과갑과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에 기용되어 홍문관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을 지내다 1484(성종15)년 이조정랑을 지내고 승문원교검을 거쳐 춘추관기주관겸편수관(春秋館記注官兼編修官)을 지냈다. 사헌부감찰로 물망에 올랐으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올 때 부사가 비리를 범하여 논박하여 바로 잡은 것이 화근이 되어 1488(성종19)년 권력자들의 간교에 빠진 의정에서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 곳은 토질이 기름지지 못하고 여러 해 ..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인신(李仁臣)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인신(李仁臣) 1457(세조3)~1518(중종13). 조선 중기 문신 판관공 성무(成茂)의 장남이며 명장 몽린(夢麟)의 아버지이다. 1484(성종15)년 등준시문과에 급제하고 1489(성종20)년 승문원정자에 발탁되어 1492(성종23)년 여러 요직을 거쳐 장악원주부에 이르렀다. 1504(연산군10)년 갑자사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오르고 1506(중종1)년 병인사화에 형조좌랑에 전임되었다. 1508(중종3)년 예조참의에 특승되었고 1510(중종5)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1512(중종7)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이르다 관직을 사임하고 파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18(중종13)년 향년62세로 별세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자료제공: 이범우 ..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숭수(李崇壽)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숭수(李崇壽) 1425(세종7)~1489(성종20). 조선 전기 문무신 초명은 옥견(玉堅). 자는 미수(眉叟). 참판공 연손(延孫)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빈부봉사 사헌부감찰를 지냈다. 죽산현감.양천현령을 거쳐 돈령부첨정을 지내다가 1470(성종1)년 예빈시판관을 지내면서 무과시급제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 절충장군에 올랐다. 이모부인 세조께서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처가의 본관을 양주조씨에서 한양조씨로 바꿔서 사용한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사양하였다. 1453(단종1)년 계유사화, 1456(세조2)년 병자사화에 걸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단종 복위운동을 한 신하들을 살해하고 절의파(節義派)를 참형할 때..

평안도관찰사공(平安道觀察使公) 이윤인(李尹仁)

평안도관찰사공(平安道觀察使公) 이윤인(李尹仁) 1415(태종15)~1471(성종2).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임지(任之). 낙안공 계번(繼蕃)의 아들이다. 1447(세종29)년 식년시문과정과에 급제하고 춘추관봉례로 등관하여 1454(단종2)년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성균관직강 사헌부장령 사복시소윤(司僕寺小尹)을 지냈다. 1455(세조1)년 원종공신2등에 녹훈되었고 1461(세조6)년 수장령 지병조사를 거쳐 1467(세조13)년 한성우윤 의주목사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468(예종1)년 전라감사 평양부윤을 거쳐 1470(성종1)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지내다 임지에서 타계했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

문안공(文安公) 이문형(李文炯)

문안공(文安公) 이문형(李文炯) ?~1467(세조13). 조선 전기 문신 시(諡)는 문안(文安). 청호공 희(暿)의 아들이다. 1447(세종29)년 식년시문과정과에 급제하고 1452(문종2)년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단종1)년 계유사화 때 공으로 원종공신2등에 녹훈되었으며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461(세조7)년 승지로 발탁되어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왕명을 받들어 손자주해를 교정하였다. 사헌부집의를 지내고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내면서 역대병요를 교정하였다. 이어 좌부승지를 거쳐 1463(세조9)년 형.이조참판을 지내고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5(세조11)년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올랐다. 1466(세조1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가 되어 표류민(漂流民)들을 ..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 생몰미상. 조선 전기 문신 월성군공 지수(之秀)의 증손 판서 만실(蔓實)의 아들이다. 1410(태종10)년 문과에 급제하고 호군이 되어 태종께서 광탄에 행차할 때 수행하였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1412(태종12)년 박저생과 그의 계모 곽씨가 가산으로 쟁송되었던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지의주사로 좌천되었다. 1425(세종7)년 양주부사를 거쳐 1427(세종9)년 공조.형조참의를 지내다가 1429(세종11)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1430(세종12)년 명나라에 가는 사신에게 감찰을 파견하여 소지하고 있는 금물을 수검해야 한다는 소를 올리고, 또한 공신의 천첩(賤妾) 소생을 충의위(忠義衛)에 소속시키는 것을 반대하..

중서사인공(中書舍人公) 이조(李蓨)

중서사인공(中書舍人公) 이조(李蓨) 1325(충숙왕12)~?. 고려말 문신 송암공 세기(世基)의 계자(季子)이다. 1345(충목왕즉위)년에 성균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하성기거랑(門下省起居郞)에 등관하였다. 고려말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참정하였으나 국정이 쇠퇴하여 민심이 소란해지자 1392(조선태조) 임신년 음7월 16일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이방원파가 득세하니, 고려 조정을 지켜오던 관인들은 충신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부조현(不朝峴)에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 순절 항절 정절 등 절사 제현의 일인으로서 지조를 지켜 항거하였다. 1393(조선태조1)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조선조에 불복하므로 다시 평안도 곽산으로 이배하였다 그를 따라 모여든 많은 문하들과 여생을 보냈다. 그 후 곽산에서 전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