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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지 권7] 현행(見行) -이홍준(李弘準)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8. 12:48

영가지 권7

7) 현행(見行)


현행(見行)1)

이홍준(李弘準)
자는 군식(君式)인데 용재(慵齋) 종준(宗準)의 아우이다. 내성현 호평리에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에 사화3)가 일어나 그로 인해 화가 중형(仲兄)에까지 미쳤다. 이로부터 세로(世路)에 뜻이 없었다. 감사(監司)가 재행(才行)으로 천거했으나, 질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시폐(時弊)에 따라 편의봉사(便宜封事)를 올리어, 자기가 사는 고을에 부과된 곡물 바치는 고통을 덜어주도록 하였다. 가훈(家訓)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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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홍치(弘治) 무오년에 사화: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사대사화(四大士禍) 중 첫번째로 일어났던 사화이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발단되었기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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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리(權明利)
부성(府城) 동문 밖 용흥리(龍興里)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기우(器宇)가 있어 놀이를 할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나이 열 여덟에 일본 오랑캐들이 영해(寧海) 축산포(丑山浦)로부터 몰래 군사를 펴서 서울로 쳐 올라갔으니, 충청(忠淸) 이동(以東)은 적군의 세력이 가득차 있었다. 공이 산골짝으로 피난해 들어갔는데,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물어 보니, 곧 재상(宰相)집 처녀였다. 바로 그녀를 데리고 아무 탈없이 적을 피하여 갔다. 뒤에 그 부모의 집을 찾아서 데려다 주었다. 그러자 부모가 자기의 딸이 몸을 더럽혔을 것이라 생각하고, 도로 데려가라고 하려 했다. 공이 태양을 가리키며, 맹서코 그런 일이 없음을 말하고 고사(固辭)하며 받지 않았다. 그 절조가 이와 같았다.

김용석(金用石)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광존(光存)의 후예이며,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수(洙)의 아들이다. 성품이 청간(淸簡)하고 수정(守正)하여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여 복종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교유하였다. 냉화(冷話) 2)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응정(姜應貞)의 자(字)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중화재(中和齎)이다. 효행으로써 칭송을 받았으며, 함께 태학에 노닐면서 주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따라 향약(鄕約)을 만들기도 했고 월삭(月朔)에는 소학(小學)을 강론(講論)하기도 했다. 그 때 뽑힌 사람들은 모두 한 때의 명사(名士)들로서, 김용석(金用石) 자는 연숙(鍊叔), 신종호(申從濩) 자는 차소(次韶) 등은 그 중에서도 뛰어난 자들이었다.”

이홍준(李弘準)
자는 군식(君式)인데 용재(慵齋) 종준(宗準)의 아우이다. 내성현 호평리에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에 사화3)가 일어나 그로 인해 화가 중형(仲兄)에까지 미쳤다. 이로부터 세로(世路)에 뜻이 없었다. 감사(監司)가 재행(才行)으로 천거했으나, 질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시폐(時弊)에 따라 편의봉사(便宜封事)를 올리어, 자기가 사는 고을에 부과된 곡물 바치는 고통을 덜어주도록 하였다. 가훈(家訓)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쳤다.

김수일(金守一)
극일(克一)의 아우이다. 자는 경순(景純)으로 퇴도의 문인이다. 가정 을묘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품이 굳세고 명랑했으며 성실하고 너그러워 두루 신임을 받았다. 자기의 행실에도 법도가 있어, 향리 사람들이 경복(敬服)하였다. 유일로써 천거되어 자여도(自如島) 찰방이 되었다. 일직현 구미촌(龜尾村)에 살았는데 호를 구봉(龜峯)이라고 했다. 아들 용(涌)도 청현(淸顯)이였다.

김언기(金彦璣)
자는 중온(仲昷)인데 진사(進士) 주(籌)의 아들이다. 구담(九潭)으로부터 가야촌(佳野村)으로 이주해 살았다. 융경(隆慶) 정묘년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품이 관대하고 신중하였으며 확실하였다. 명랑하고 근면하였으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자기 자신을 밖으로 나타내기를 일삼지 않아, 향사 사람들이 공경하고 복종했다. 따로 서사(書舍)를 얽어 후진을 교육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원근(遠近)으로부터 배우러 와서 성취(成就)한 자들이 많았다. 또한 구백담(具栢潭)ㆍ김지산(金芝山)ㆍ권송암(權松巖)5) 등과 함께 동지계(同志契)를 만들어 늙도록 바꾸지 않았다. 호는 유일재(惟一齋)이다.

권대기(權大器)
자는 경수(景受)이니, 지평(持平) 징(徵)의 증손자이다. 이계(伊溪)에서 살았다. 퇴도의 문인으로 가정 임자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간결ㆍ질박하고 맑았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되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경학(經學)에 능해서 후생들을 훈도(訓導)하였는데, 반드시 올바른 방법으로 했다. 호는 인재(忍齋)이다.

안경로(安景老)
자는 성백(成伯)이니 풍산현 서쪽 여자지동(女子池洞)에 살았다. 신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품이 순실(純實)하고 근신(謹愼)하였으며, 일을 처리하고 남을 접대함에 꾸밈이 없었다. 고을 이웃들이 추앙하고 복종했다.

권동보(權東輔)
충정공(忠定公) 벌(橃)의 아들로 자는 진경(震卿)이다.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음사로 벼슬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친족들과 화목하고 종손을 공경하였으며, 은혜를 베풀어 남을 구제하였다. 청암(靑嵒)에 살았다.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늙었다.

김명일(金明一)
자는 언순(彦純)인데 수일(守一)의 아우이다. 퇴도의 문인으로 가정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몸가짐에 법도가 있었고, 침중과묵(沈重寡默)하여 사림사이에서 중망을 받았다. 호는 운암(雲巖)이다.

손흥례(孫興禮)
자는 군립(君立)으로 부의 북쪽 감마촌(甘麻村)에 살았다. 융경 정묘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체모(體貌)가 크고 기량(器量)이 있었으며, 총민하였다. 책론(策論)을 잘 지어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이정백(李庭栢)
자는 여직(汝直)이요,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의 후예이다. 부의 북쪽 주촌(周村)에 살았다. 무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엄숙하고 굳셌으며, 매우 곧았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이 되었다.

김대현(金大賢)
참판(參判) 양진(楊震)의 증손자이다. 자는 희지(希之)이고 호는 유연당(悠然堂)이다. 풍산현 북쪽 오미동(五美洞)에 살았다. 만력 임오년 사마시에 합격해서 천사(薦仕)로 벼슬이 산음현감(山陰縣監)에 이르렀다. 정사에 치적이 있었고 청백리에 뽑히었다. 말수가 적었고 행실을 삼가하였으며, 밖으로 꾸미는 일이 없었다.

김치중(金致中)
고려(高麗)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의 후예이다. 춘천(春川) 신구정(申九鼎)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부의 서쪽 회곡리(檜谷里)에 우거하였다. 임진왜란에 처자를 데리고 아버지를 따라 의성(義城)으로 피난 갔다. 산골짝에 들어가 의병들을 모으고 격문(檄文)을 돌리며, 유적(遊賊)들을 사살(射殺)하였다.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일찍이 약속해서 여러번 가로되, “빠져 나가라, 여의치 않아 핍박을 받게 된다면 석굴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과연 적병이 갑자기 밀어 닥치자, 치중이 버티어 서서 적을 꾸짖고 스스로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신씨도 그를 따라서 함께 죽었다. 종들도 주인의 아이를 업고 또한 떨어졌는데, 마침 치중 부부의 시체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업었던 아이는 다쳐서 죽지 않았다. 한 집안이 의열(義烈)과 충성을 온전히 갖추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와 표창이 내려졌다. 판결사(判決事) 정공(鄭公) 사신(士信)이 그 비명(碑銘)을 썼다.

하 련(河 漣)
단계(丹溪)의 후예로 자는 응기(應期)이다. 부의 서쪽 소야촌(所夜村)에 살았다. 성품이 순수하고 신중했으며 질박하고 말수가 적었다. 학문에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권송암(權松巖)이 매양 탄복하였다.

김인상(金麟祥)ㆍ윤흠신(尹欽信)ㆍ윤흠도(尹欽道)
모두 사인(士人)으로 린상은 풍산현 상리(上里)에 살았고, 흠신과 흠도는 부의 서쪽 회곡촌(檜谷村)에 살았다. 임진왜란에 스스로 의병장(義兵將)인 정자(正字) 류종개(柳宗介)의 막하에 들어갔다. 소천전(小川箭) 피현(皮峴)에서 적을 만났으나 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오히려 소리쳐 저항하며 적을 꾸짖다가 죽었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 7. 영가지 권7 > 7) 현행(見行)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B006&sMok_Nmbr=123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6&sMok_Nmbr=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