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유물/안동지역◇유적

[영가지 권7] 우거(寓居) -배상지(裴尙志), 이승직(李繩直)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7. 23:16

영가지 권7


4) 우거(寓居)

배상지(裴尙志)
흥해(興海) 사람이다.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아들로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에 우거(寓居)하였다. 고려 말기에 음사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중서랑(中書郞)이 되었다. 굴공(屈公)의 고사(故事)에 따라서 조정에서 모자를 벗고 옷소매를 떨쳐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숨었다. 끝내 벼슬에 나가려는 마음이 없었다. 백죽(柏竹)을 심고 그 가운데에 집을 지어서 거처했으므로 호를 백죽당(柏竹堂)이라고 했다.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늙어갔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끝내 지조를 더럽히지 않고 죽었다. 시집이 남아 있으나 천수(千首)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뒤에 아들 환(桓)이 귀하게 되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이승직(李繩直)
월성(月城) 사람이다. 부인(夫人)이 있는 곳을 따라 광주(廣州)로부터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으로 와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천사(薦仕)로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히었다. 묘(墓)가 광주에 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후(月城君後) 대사헌공파조(大司憲公派祖)

----------------------------------------

이자수(李子脩)
진보(眞寶) 사람이다. 풍산현 마라촌(碼螺村)으로 옮겨와 살았다. 려말(麗末)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다. 홍건적(紅巾賊)을 무찌른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퇴도선생의 5대조이다.

남휘주(南輝珠)
영양(英陽) 사람으로 영의공(英毅公) 민지(敏之)의 후예이다. 처음 부의 북서쪽 가현촌(可峴村)에 와서 살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민생(敏生)이 계속해서 거주하면서 무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배상지(裴尙志)
흥해(興海) 사람이다.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아들로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에 우거(寓居)하였다. 고려 말기에 음사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중서랑(中書郞)이 되었다. 굴공(屈公)의 고사(故事)에 따라서 조정에서 모자를 벗고 옷소매를 떨쳐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숨었다. 끝내 벼슬에 나가려는 마음이 없었다. 백죽(柏竹)을 심고 그 가운데에 집을 지어서 거처했으므로 호를 백죽당(柏竹堂)이라고 했다.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늙어갔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끝내 지조를 더럽히지 않고 죽었다. 시집이 남아 있으나 천수(千首)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뒤에 아들 환(桓)이 귀하게 되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배상공(裵尙恭)
상지(尙志)의 아우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전서 류종혜(柳從惠)와 일찍이 벗으로 사귀었다. 류공이 풍산현 안에서 하회(下回)로 이사하여 화산(花山) 아래에 살았는데, 전원(田園)의 절반을 나누어 배공에게 주어 함께 한 고을에서 살도록 했다. 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서로 왕래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하회의 두 전서(典書)’라고 불렀다.

안팽명(安彭命)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성종조(成宗朝)1)의 명신(名臣)인 아버지 종생(從生)이 배공(裴公) 소(素)의 사위였으므로 젊어서 외가에서 자라났다.

이 증(李 增)
고성(固城) 사람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원(原)의 아들로 경태(景泰)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사로 벼슬이 영산현감(靈山縣監)에 이르렀다. 이희(李暿)의 사위였기에 부성(府城) 남문 밖에 와서 살았다. 부(府)의 사람들 중에 늙고 덕있는 이들 12명과 더불어 우향계(友鄕契)를 만들었다.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장가(長歌)를 지어 그 사실을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동방은 인인(仁人)ㆍ군자의 나라요.
풍속으로 첫째는 안동이라 말하니,
시ㆍ서ㆍ예(詩ㆍ書ㆍ禮)가 추로(鄒魯)2)와 한결같았고
집집마다 근검하여 당풍(唐風)을 따랐다네.
화산과 호수는 천하에 기이(奇異) 하니
충만하게 모인 곳이라 영웅도 많네.
삼국통일 뒤로는 공신도 많아
지금까지 이어져 인재가 궁치 않네
어떤 이는 분수를 알고 귀거래하였고
또 어떤 이는 고상한 뜻으로 은둔해 버렸다네
우리 고향에서 생장하고 늙어 죽어가는 이는
또한 태평한 시대의 유민(遺民)이로세
이렇게 계를 맺어 영원히 우호(友好) 하자니
고을의 즐거움을 말로는 다하기 어렵도다.
봄에는 봄따라 놀고 가을엔 가을따라 놀아
아름다운 산수강산에서 놀며 즐거움을 다한다네.
잡은 고기에 맛있는 채소를 먹는 것도 또한 즐겁고
매화 구경, 국화 구경에 쉴 때가 없구나
또 어린 아이들과 여러 자제들이 있어
읍양(揖讓) 하고 진퇴(進退) 하며 줄지어 서 있네.
나는 예전에 추부자(鄒夫子)3)에게 듣기를
온 고을에 선사(善士)가 있으면 온 고을이 화목하다 했지
여러분들의 높은 뜻이 하늘에 닿아
덕성을 훈도(薰陶)4)하여 사람이 모두 어질게 되리
고을에 좋은 풍속이 있어 선비가 모두 어질구나
천하에 교화(敎化)를 누가 능히 먼저 할까
이 고을은 나에게도 고향일세
귀와 눈으로 듣고 보니 기쁘기만 하도다.
지금 성주(聖主)께서 풍요를 채집하시니
내 이를 청편(靑編)에 의탁하여 전하고저 하나
장연(長椽)같은 대필(大筆)이 없어 한스럽도다.

계축(契軸)에 기록된 인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사용(司勇) 권자겸(權自謙), 현감 배효건(裵孝騫), 헌감 이증(李增), 부사(副使) 남경신(南敬身), 사용(司勇) 노맹신(盧孟信), 통찬(通贊) 배효눌(裵孝訥), 사정(司正) 남치공(南致恭), 사용(司勇) 권곤(權琨), 진사 남치정(南致晶), 부사(副使) 남경인(南敬仁), 충찬위(忠贊衛) 배주(裵裯), 훈도(訓導) 배정(裵禎), 별시위(別侍衛) 권숙형(權叔衡).

이승직(李繩直)
월성(月城) 사람이다. 부인(夫人)이 있는 곳을 따라 광주(廣州)로부터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으로 와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천사(薦仕)로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히었다. 묘(墓)가 광주에 있다.

이 웅(李 雄)
전의(全義) 사람이다.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예로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화(樺)는 무용(武勇)이 있어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김유온(金有溫)
순천(順天) 사람이다. 좌의정(左議政)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승주(承霔)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목사(牧使) 권집경(權執經)의 사위가 되어 풍산현 서쪽 구단촌(九潭村)에 와서 살았다.

진숭조(秦崇組)
풍기(豊基)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이르렀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처음으로 부의 북서쪽 가현촌(可峴村)에 와서 살았다.

강종덕(姜宗德)
진주(晋州) 사람이다. 판한성부(判漢城府) 회백(淮伯)의 아들로 벼슬이 사헌부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감천현(甘泉縣) 서쪽 천전촌(泉田村)에 와서 살았다.

송수은(宋守殷)
연안(延安) 사람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검교(承文檢校)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풍산현 북쪽 두답촌(斗沓村)에 와서 살았다. 아들 희문(希文)에도 급제하여 승문저작(承文著作)이 되었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계속해서 여기에 거주하였다.

진 담(秦 澹)
풍기 사람이다. 참의(參議) 유경(有經)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이르렀다. 처의 고향을 따라 부의 서쪽 위인 조곡촌(糟谷村)에 와서 살았다. 열녀(烈女) 이돈전(李敦田)은 바로 그의 첩(妾)이다.

김순고(金舜皐)
순천(順天)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의(嘉義)에 이르렀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서울로부터 와서 풍산현 서쪽 구담촌(九潭村)에 거주했다. 그의 손자 옥(玉)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 곳에 거주하였다.

이중립(李中立)
경주(慶州) 사람이다. 자는 강중(强仲)이요, 자호(自號)는 구계(龜溪)이다. 가정 무오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용궁(龍宮)으로부터 와서 일직현 구미촌(龜尾村)에 살았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화목하였고 자신의 행실을 곧고 바르게 가졌다.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시묘살이 3년에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복(服)을 마치자 죽었다.

김 수(金 修)
광주(光州) 사람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이르렀다. 서울로부터 와서 풍산현 서쪽 지곡촌(枝谷村)에 살았다.

김홍미(金弘微)
상주(尙州) 사람이다. 자는 창원(昌遠)이요, 호는 성극당(省克堂)이다. 전임 대사간으로써 난리를 피하여 부성(府城) 동쪽 포항(浦項)나루 언덕에 살았다. 시주(詩酒)로 스스로 즐겼다. 벼슬은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이르렀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 7. 영가지 권7 > 4) 우거(寓居)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B006&sMok_Nmbr=120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6&sMok_Nmbr=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