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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지 권8] 총묘(塚墓) -배상지(裵尙志), 이승직(李繩直), 이시민(李時敏), 이종준(李宗準), 이홍준(李弘準), 이덕장(李德璋)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8. 20:07

영가지 권8


1) 총묘(塚墓)

판사복정(判司僕正) 증참판(贈參判) 배상지(裵尙志)의 묘
부의 북쪽 가수천(嘉水川) 북산(北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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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裵尙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대사헌(大司憲) 이승직부인(李繩直夫人) 배씨(裵氏)의 묘
부의 북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갈음(碣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배씨의 고(考)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사복사사(司僕寺事)로 추증된 상지(尙志)이다. 비(妣)는 영가군(永嘉郡) 정부인(貞夫人) 권씨이다. 이승직(李繩直)의 자는 승평(繩平)이다. 월성세가(月城世家)로 고(考)는 중현대부(中顯大夫) 흥위위(興威尉) 대호군(大護軍)인 만실(蔓實)이고, 비(妣)는 철성군부인(鐵城郡夫人) 이씨(李氏)이다. 이군(李君)은 선덕(宣德) 무오년에 태어나 홍치(弘治) 경술년16) 11월 초 닷세 날 죽었다. 나이 쉰 셋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죽어 양주(陽州) 동쪽 촌지동(村池洞)에 장사지냈다. 먼저 감정(監正) 이량(李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불민(不敏) 물민(勿敏) 미민(靡敏)은 아들이고, 딸은 상장(上將) 김암(金巖)에게 시집보냈다. 뒤에 배씨(裵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민(時敏)이다. 아! 이군의 전 후실(前後室) 자손들이 훌륭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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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홍치(弘治) 경술년: 1490년

생원(生員) 이시민(李時敏)의 묘
부의 서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아들이다.

교리(校理) 이종준(李宗準)의 묘
부의 서쪽 금지(金池)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진사(進士) 이홍준(李弘準)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스스로 갈명을 지어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함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라, 죽음을 꺼려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함 또한 미혹됨이 심하다. 저 장자(莊子)가 형해를 잊는다는 것과 왕양손(王楊孫)이 벌거벗은 몸으로 장사를 지낸다는 말과 같은 것은 지금 세상엔 다시 없구나. 그는 생사(生死)를 잘 알면서도 이를 마음 속에 두지 않는 자라 하겠다.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일찍이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생(生)이 없으면 곧 사(死)도 없고
생이 있으면 곧 사가 있게 되나니
생과 사는 모두 덧없는 것이요
조물(造物)도 끝과 시작이 없는 것을

비록 달관(達觀)에 이르지 못한 무리라 하더라도, 본 바가 이와 같을 뿐이다. 대개 사람이 관화(觀化)한 뒤에 자손된 자가 남에게 갈사(碣辭)를 청하여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붓을 제멋대로 놀리어 그 실상을 없게 만드니 더욱 가소롭구나, 이 늙은이는 평생토록 게으르고 졸렬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항상 농사에 힘쓰므로써 처자식을 먹여 살렸고 일곱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했지만 계산(溪山)에서 우유(優游)37)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에 명(銘)하여 말하노라,
‘이미 재주도 없고 또 덕도 없으니 사람일 뿐이요, 살아서 작록도 없고 죽어서 명성도 없으니 혼일 뿐이며, 근심과 즐거움이 없어지고 헐뜯음과 칭찬이 사라졌으니 흙일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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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우유(優游): 1.유유자적하다 2.우물쭈물하다 3.망설이다

찰방(察訪) 이덕장(李德璋)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퇴도선생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덕장(德璋)인데 경주(慶州) 사람이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증조 모(某)는 대사헌이었고, 조(祖)모는 생원이었으며, 고(考)모는 진사(進士)였다. 공은 성화 임인년에 태어났다. 젊어서 과거업(科擧業)을 익혀, 일찍이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예위시(禮圍試)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음사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에 임명되었다. 가정 계미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나서, 집이 가난하고, 부친이 노쇠하였기 때문에 두번이나 벼슬을 얻을 생각으로 힘써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듬해 4월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향년(享年)이 마흔 둘이었다. 계미년에 개단현(皆丹縣) 운봉산,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공은 젊어서 뜻이 높고 기백을 숭상하여 악착같고 어리석은 무리 속에 끼이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일찍이 소(疏)를 초(草)하여 시사(時事)를 진언하고자 하였는데 얼마뒤에 나의 분수에 넘는 일이라 경계하고 그만두었다. 자제를 가르침에 매우 엄격하였고 향리의 후생들에게도 배우기를 권면하였다. 산업에 힘쓰지 않아 일찍이 칭대(稱貸)하여 자급(自給)하였다. 공의 처는 풍산 류씨인데, 진사 자온(子溫)의 딸로 공조전서(工曹典書) 종혜(從惠)의 후예이다. 성화 계묘년38)에 태어났으니, 품성(稟性)이 조용하여 평상시에도 성내는 말이나 성급한 기색이 없었다. 공이 죽을 때 집안이 더욱 가난해졌는데도 오히려 집안 사람들이 가난을 탄식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가로대, ‘나의 분수가 여기에서 그치는데 무엇을 한탄하리오’하고 했다. 그 아들에게 훈계하기를, ‘차라리 얼어 굶어 죽을지언정, 의가 아닌 물건은 취하지 말라!’고 했다. 친척이나 이웃들과 화목하고 친했으며, 마음을 다해 혐섭함을 두지 않았다. 어떤 때는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급한 사람을 도왔으며, 또 일찍이 남이 주는 선물을 속없이 받지 않았다. 족인(族人) 중에서 제사를 핑계대면서 지내지 않은 이가 있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제사를 대신 지내 주었다. 삼가 가로대 ‘저 사람의 마음 씀이 이와 같거늘 아무리 억지로 행하게 만든다 해도, 조고(祖考)께서 그것을 흠향할 마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몇 년 뒤에 그 사람은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댁(宅)의 마음이 곱고 선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내(내). 둘째는 여(여). 셋째는 진(진)이었는데 공이 죽고 나서 10여년동안 잇달아 죽었다. 그 막내인 포(苞)는 기유년에 생원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딸은 생원 이훈(李薰)에게 시집갔다. 가정 병진년에 류씨가 죽었는데 공의 묘에 부장(袝葬)하였다. 명(銘)하여 말하노라. ‘월성 이씨는 그 유서(遺緖)가 멀고도 먼데, 공께서 이를 이었으니 그 모습이 단정도 하구나, 능히 나랏 일을 살필 수 있었거늘, 어찌하여 벼슬이 그리도 막혔던가. 우관(郵官)에 임명된 것이 그만이었으니 천리마 같은 인재가 이에 숨어 버렸도다. 중년에 다시 벼슬을 구하려 하였으니 이는 부친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이라. 뜻을 품고 영원히 돌아갔으니 나그네로 죽은 것이 비상(悲傷)하기만 하다. 현부(賢婦)가 있었으니 풍산의 훌륭한 씨족이라. 그 몸을 맑고 신중히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네. 또한 자손도 잘 길러 빛나는 난옥(蘭玉)과 같았다네. 상화(喪禍)가 거듭되었지만 능히 집안을 지탱시켰도다. 막내 아들은 성품으로 정성껏 효도하였으니,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었다. 하늘이 보답해 상을 내리심은 이에 조금도 틀림이 없기 때문이라. 그 언덕에 우뚝한 무덤, 백양목이 바람에 울부짖는다. 그 가려짐을 같이하면서 이 무덤을 영원히 보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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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 모(某):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
*조(祖)모: 생원(生員) 금호(琴湖) 이시민(李時敏)
*고(考)모: 진사(進士)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38) 성화 계묘년: 1483년 성종 14년
*4남 1녀: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에는 맏이 잉(芿), 둘째 여(茹), 셋째 률(葎), 막내 포(苞), 사위 이훈(李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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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태사(高慮太師) 권행(權幸)의 묘
부의 서쪽에 있다. 본디 파곡리(波谷里)였는데 태사를 장사지내고 난 뒤에 그 동의 이름을 능동(陵洞)이라고 불렀다. 가정 정사년에 부사(府使) 권소(權紹)가 능 아래에 살고 있던 후손 권심행(權審行) 몽두(夢斗)와 외손인 류공계(柳公季)로 하여금 흙을 바꾸어 사성(莎城)을 고치도록 하였다. 매양 한식(寒食)이 되면, 무덤에 올라가서 제사를 행하였다. 축문(祝文)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등산(天燈山) 남쪽 기슭에 봉분이 솟았으니, 공덕이 높고 흡족하도다. 후예들은 많고 종가는 융성하여 매년 한식이 오면, 정결한 제사를 공손히 받드니, 생전과 같이 강림하시어 그 훌륭한 모습 보이오소서.”

만력(萬曆)1) 무자년에 감사(監司) 권극지(權克智)가 비석을 고쳐 세웠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묘표(墓表)를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동부의 서쪽 십리 떨어진 곳에 멀리 산이 있으니 ‘천등(天燈)’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있는 감좌(坎坐)2) 리향(离向)3)의 언덕이 고려의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인 권공이 묻히신 곳이다. 공은 휘(諱)가 행(幸)으로 본래는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다. 신라 말기에 고창군수(古昌郡守)로 나갔다가 그 지역을 가지고 고려 태조를 맞이하였다. 공이 있었기에 권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김(金)씨가 권(權)씨로 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후에 자손들이 더욱 커지고 번성해저 고려에서 우리 왕조에 걸쳐서 벼슬이 끊이지 않아, 세상에 여러 명종거별(明宗巨閥) 중에서 권씨를 으뜸으로 여기니, 그 또한 훌륭하다 할 것이다. 처음 공을 장사지내고 나서는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었다. 세대가 더욱 멀어지자, 무덤의 경계가 없어져 그 있던 곳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성화(成化)4) 년간에 공의 18대손인 평창군수(平倉郡守) 옹이 이에 뜻을 다해 묘터를 찾다가 묘 옆에서 지석(誌石)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봉분을 세웠다. 죽음에 다달아 유명(遺命)하기를, ‘그 언덕에 나를 부장(祔葬)하여 수호(守護)하도록 하라.’고 했으니 곧 묘의 남쪽 두번째 무덤이 바로 이것이다. 옹의 아들 유작(裕綽)등이 공의 뜻에 따라 비석을 세워 표(標)하였다. 이공(李公) 종준(宗準)이 돌의 뒷면에 기록했다. 만력 무자년에5) 공의 먼 자손인 오늘날의 관찰사인 극지가 정절(旌節)6)을 가지고서 남쪽 지대를 순찰하다가 여기에 이르렀다. 무덤을 둘러보고 종인(宗人)으로 한 고을에 사는 사람들을 모아 제사를 올렸다. 마치고 나서 역예(役隸)가 잘못하여 비석을 건드려 땅에 엎어져 깨지고 말았다. 관찰사가 바로 종인들과 의논하여 돌을 사서 새기고 다듬어 장차 길일(吉日)을 골라 고쳐 세우려고 하였다. 성룡도 공의 외파(外派)에 관계되어 그 사적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 받았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공의 훈업(勳業)은 역사에 실려 있고 자손들은 족보에 자세하며, 혜택은 한 나라에 남아 있으니 다시 군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삼가 비석을 세우게 된 전말(顚末)을 대략 서술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참고가 되게 한다. 족보를 살펴보니, 공을 태사라고 칭했으나 옛 비석에는 실려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감히 덧붙이지 못할 것 같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의 묘
부의 서쪽 옛 태장리(胎藏里)에 있다.
지금 그 곳에 단(壇)이 설치되어 있다.

태사(太師) 장길(張吉)의 묘
부의 서쪽 성곡리(城谷里)에 있다. 언전(諺傳)에는7) 성곡촌(城谷村) 백성들이 이 묘를 수개(修改)하면 반드시 많은 폐를 끼칠 것이라 걱정하여 그 석물(石物)을 깨뜨려 자취를 없애 버렸다 한다. 그러나 장명등(長明燈)과 대석(臺石)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리켜 말하기를, “장태사묘”라고 했다. 자손 중에 어떤 사람이 가정 계해년간에 지석(誌石)을 찾고자 그 있을 만한 자리를 파니 광혈(壙穴)과 기지(基地)8)가 오히려 남아 있었다. 다만 은 수저 한 개를 얻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증험할 만한 것이 없었다.

황장군(黃將軍)의 묘
임하현 서쪽 고리곡(古里谷)에 있다. 장군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상호군(上護軍) 이린(李疄)의 묘
길안현(吉安縣) 거무역촌(居無歝村) 계명산(鷄鳴山)에 있다. 웅무(雄武)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판서(判書) 이백승(李伯升)의 손자이다.

장하(張夏)의 묘
임하현 북쪽 대현(大峴)에 있다.

사용(司勇) 오계동(吳季童)의 묘
임하현 동쪽 임당촌(林塘村)에 있다.

부장(副將) 오선민(吳善敏)의 묘
임하현 동쪽 사의촌(思義村)의 뒷편에 있다.

재신(宰臣) 김득우(金得雨)의 묘
풍산현 북쪽 소이촌(召伊村)에 있다. 부인(夫人) 권씨(柳氏)의 묘는 부의 서쪽 수동촌(水東村) 중동(中洞) 북산(北山)에 있다.

판서(判書) 이웅(李雄)의 묘
풍산현 북쪽 조파산(助坡山)에 있다. 부인 권씨(權氏)의 묘는 풍산현 서쪽 사지북동(笥池北洞)에 있다. 현성군(玄城君) 용(鏞)의 딸이다.

효자(孝子) 임즐(林騭)의 묘
감천현(甘泉縣) 서쪽 덕율촌(德栗村) 남향(南向)에 있다.

중추(中樞) 권백종(權伯宗)의 묘
부의 동쪽 돗질(都타質) 오향(午向)에 있다. 부인 권씨의 묘는 부의 서북쪽 안기역(安奇驛) 임피사동(林皮寺洞) 곤향(坤向)9)에 있다.

판서(判書) 남휘주(南輝珠)의 묘
부의 동쪽 남흥사(南興寺) 앞 음곡동(陰谷洞) 입구에 있다.

참판(參判) 남민생(南敏生)의 묘
판서 휘주의 묘 아래에 있다.

판윤(判尹)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묘
부의 북쪽 오이산(烏耳山) 연원(燕院) 북서쪽 염사동(廉寺洞)에 있다. 부인의 묘는 권백종의 부인묘 밑에 있다.

소부감(小府監) 김무(金務)의 묘
부의 남쪽 장인사동(長仁寺洞) 오향(午向)에 있다.

판서(判書) 권인(權靷)의 묘
부의 서쪽 소야촌(所夜村) 향교동(鄕校洞) 손향(巽向)에 있다. 부인 권성(權城) 황씨(黃氏)는 함께 뭍혀 있다.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의 묘
부의 서쪽 두솔원(兜率院) 북 사리곡(沙理谷) 리향(离向)에 있다. 퇴도선생의 5대조이다. 갈음(碣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공의 휘(諱)는 자수(子脩)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다. 고(考)는 석(碩)인데 현리(縣吏)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증밀직사(贈密直使)에 추증되었으니, 곧 이씨의 시조(始祖)이다. 공은 급제하여 고려 말기에 홍건적(紅巾賊)10)을 치는데 공이 있어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다. 벼슬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안동에 왔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운구(云具)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둘째는 운후(云侯)로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지냈으며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되었다. 참의(參議)는 세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양공(養恭), 둘째는 양검(養儉)으로 군수(郡守)를 지냈고, 셋째는 양호(養浩)이다. 양공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사담(思聃)과 희담(希聃)이다. 양검은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기담(基聃), 둘째는 여담(如聃), 셋째는 종담(從聃)이다. 여담이 세 아들을 낳았으니 윤원(允元) 윤형(允亨) 윤정(允貞)이다. 종담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윤지(允智) 둘째가 윤강(允綱)이다. 부정(副正)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정(楨)으로 중직대부(中直大夫) 선산부사(先山府使)를 지냈고 가선(嘉善)으로 추증되었다. 세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가 우양(遇陽)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仁同縣監)을 지냈다. 둘째는 흥양(興陽)으로 훈련참군(訓鍊參軍)을 지냈다. 셋째는 계양(繼陽)으로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자헌(資憲)에 추증되었다. 현감(縣監)은 아들 하나를 낳았다. 철손(哲孫)으로 승의부위(承義副尉)를 지냈는데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훈(壎)으로 돈용교위(敦勇校尉)를 지냈고, 둘째는 감(堪)으로 분순부위(奮順副尉)를 지냈다. 참군(參軍)은 세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은(銀), 둘째는 호(壕), 셋째는 해(垓)이다. 은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희동(希侗)이다. 호는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희청(希淸)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고, 둘째는 희명(希明)으로 충순위를 지냈다. 진사(進士)는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식(埴)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숭정(崇政)에 추증되었다. 둘째는 우(堣)로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고, 진사(進士)는 여섯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잠(潛)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고, 둘째는 하(河)로 훈도(訓導)를 지냈다. 섯째는 의(의)이고, 넷째는 해(瀣)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다섯째는 징(澄)으로 찰방(察訪)을 지냈고, 여섯째는 황(滉)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니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참판(參判)은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수령(壽苓)으로 찰방(察訪)을 지냈다. 이 이후로는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서 자손들은 더욱 번창하여 무려 백여 명이나 되어 이루 다 실을 수가 없다. 공의 묘는 부의 서쪽 두솔원(兜率院) 후동(後洞)에 있다. 예전엔 묘갈(墓碣)이 없어 위 아래로 고비(考妣)를 분변하지 못했었다. 7대손 정랑(正郞) 영도(詠道)와 8대손 현감(縣監) 정회(庭檜)가 여려 족인(族人)들과 의논하여 대략 세계(世系)를 기록하여 두 묘 사이에 비석을 세웠다.”

중랑장(中郞將) 권후(權厚)의 묘
부의 서쪽 마감산(麻甘山) 석교(石橋) 북쪽 대동(大洞) 손향(巽向)11)에 있다. 처 김씨(金氏)의 묘는 부의 남쪽 내림촌(內林村) 동쪽 낙타사(駱駝寺) 남쪽 태향(兌向)12)에 있다. 방(坊)의 이름은 소지곡(召只谷)이다.

참의(參議) 이운구(李云具)의 묘
부의 북쪽 주촌(周村) 망지산(望芝山) 남쪽 기슭에 있다.

판사(判事) 이운후(李云侯)의 처 권씨(權氏)의 묘
도답촌(刀畓村) 중간 언덕에 있다.

절도사(節度使) 반서(潘湑)의 묘
풍산현 북쪽 조파산(助坡山) 곤향(坤向)에 있다.

사정(司正) 정의룡(鄭義龍)의 묘
풍산현 북쪽 조파산(助坡山) 오향(午向)으로 반서(潘湑)의 묘 오른편에 있다. 처는 거제(巨濟) 반씨(潘氏)로 묘가 부의 북쪽 조해동(照海洞) 곤향(坤向)에 있다. 절도사 서(湑)의 딸이다.

도관좌랑(都官佐郞) 정약(鄭若)의 묘
부의 북쪽 저수봉(猪首峯) 묘향(卯向)에 있다. 부인 김씨의 묘 오른편에 있다. 부인 김씨의 묘는 부의 북쪽 서돈촌(西頓村) 오향(午向)13)에 있다. 딸 정씨와 사위 권곤(權琨)도 모두 같은 기슭에 부장(祔葬)되어 있다.

감찰(監察)로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된 권희정(權希正)의 묘
부의 남산(南山) 고지동(高志洞)에 있다. 을향(乙向)14)이다.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의 묘
풍산현 북쪽 조파산(助坡山)에 있다.
을향(乙向)이다. 양양군부인(襄陽郡夫人) 임씨(林氏)의 묘는 부의 서쪽 마감산(麻甘山) 석교(石橋)안에 있다. 곤향(坤向)이다.

집의(執義) 권임(權任)의 묘
풍산현 북쪽 조현(助峴) 서쪽 기슭에 있다. 천사(薦仕)로 울진현령(蔚珍縣令)이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두루 역임하였다. 일찍 관직을 그만두고 부의 서쪽 단지촌(丹地村)에 퇴로(退老)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손홍량(孫洪亮)의 묘

사간(司諫) 권정(權定)의 묘
임하현 북쪽 기사리(棄仕里) 산에 있다.

군수(郡守) 권시좌(權時佐)의 묘
임하현 북쪽 수달산(水達山) 상록(上麓)에 있다.

현감(縣監) 박구(朴球)의 묘
임하현 북쪽 정정촌(鼎井村)에 있다.

판중추(判中樞) 이화(李樺)의 묘
풍산현 서쪽 사지북동(笥池北洞)에 있다.

봉례(奉禮) 김혁(金革)의 묘
풍산현 상리(上里) 시묘동(侍墓洞)에 있다.

군수(郡守) 권항(權恒)의 묘
풍산현 서쪽 지곡촌(枝谷村) 내백호(內白虎)에 있다. 남향(南向)이다. 승문교검(承文校檢) 류양춘(柳陽春)이 갈명(碣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성은 권이요, 휘는 항이며 자는 변지(變之)이다. 안동사람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세보(世譜)와 실록(實錄)은 왼쪽 비(碑)에 자세하다. 공은 오조(五祖)인 서(湑)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다. 맏아들 이(邇)는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감찰(監察) 송원창(宋元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주(柱)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이고, 둘째는 건(建)으로 진사(進士)이다. 맏딸은 현감 김수(金洙)에게 시집가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첫째 아들은 여석(礪石)으로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이고, 둘째는 이석(以石)으로 진사이다. 셋째는 용석(用石)으로 진사이다. 맏딸은 유맹익(兪孟翼)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사직(司直) 김식(金軾)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다. 막내 딸은 사직(司直) 김약평(金若枰)에게 시집가서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류보(柳譜)는 나의 선인(先人)의 묘갈(墓碣)에 자세히 실려 있다. 류씨(柳氏)는 공의 묘 북쪽 일보(一步)쯤에 묻혀 있다. 조카로서 삼가 대략 이와 같이 시말(始末)을 서술한다.” 이어서 명(銘)을 지어 가로되, “하늘이 후세에 복을 내려 옛 성현 같은 정직한 분 내리시니, 자태가 엄숙하고 인품이 위대하였네, 문형(文衡)의 자리에서 우리 선왕(先王)을 도우셨고, 재상의 공업(功業)으로 명망이 온 나라에 두터웠네. 내외분이 잘 조화되어 그 덕이 향기로웠네. 자제들도 준수하여 옥수(玉髓)처럼 번창(藩暢)하였네, 아! 이미 세상을 버렸으니 누가 다시 그 수레를 붙잡겠나? 봉황이 일어나 저 높은 언덕으로 날아갔도다.”

사정(司正) 류홍(柳洪)의 묘
풍산현 서쪽 막동(幕洞)에 있다. 남향(南向)이다. 부인의 묘는 풍산현 북쪽 조파산(助坡山)에 있다. 옛날엔 갈(碣)이 없었다. 6대손인 성룡(成龍)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을 때 비로소 비석을 세웠다. 공의 휘(諱)는 홍(洪)이고 성은 류씨이다. 본관은 풍산이다.
고(考)의 휘(諱)는 종혜(從惠)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조(組)의 휘는 보(葆)로 예빈경(禮賓卿)을 지냈으며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추봉(追封)이 되었다. 증조(曾祖)의 휘는 난옥(蘭玉)으로 도염서령(都染署令)을 지냈다. 비(妣)는 예천(醴泉) 임씨(林氏)로 급제한 원길(元吉)의 딸이다. 공은 먼저 일선(一善) 김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이 일찍 죽었고, 딸은 김삼우(金三友)에게 장가갔다. 뒤에 창령(昌寧) 조씨(曺氏)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와 아들 여섯을 낳았다. 맏아들 소(沼)는 호군(護軍)으로 사복지정(司僕寺正)으로 추증되었고, 나머지 아들은 위(渭) 연(淵) 전(湔) 장(漳)이다. 딸은 정인로(鄭仁老)에게 시집갔다. 호군(護軍)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자형(子泂)이고 둘째는 자온(子溫)으로 낳았다. 자형(子泂)은 공인(公仁) 공의(公義) 공지(公知)를 낳았다. 참의(參議)는 네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공작(公綽)으로 첨정(僉正)을 지냈는데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둘째는 공권(公權)으로 정랑(正郞)을 지냈는데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추증되었고, 셋째는 공석(公奭), 넷째는 공계(公季)이다. 자순(子洵)은 인손(麟孫)을 낳았다.

호군(護軍) 류보(柳沼)의 묘
부의 서쪽, 능동(陵洞) 권태사묘(權太師墓) 서록(西麓)에 있다.

전서(典書) 배상공(裵尙恭)의 묘
풍산현 아래 절곡촌(鐵谷村) 뒷산에 있다. 갈명(碣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배씨는 흥해군(興海郡) 사람이다. 문보(門譜)가 매우 창대(昌大)하여 세상에서 우족(右族)이 되었다. 전(詮)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사(密直司使) 평양윤(平壤尹)을 지냈다. 영지(榮至)의 아들이다. 전조(前朝)에 벼슬하여 큰 공을 세웠으므로 선수선력익대좌명공신행중서성리문소상부관(宣授征東行中書省理問所相副官) 성근선력익대좌명공신삼중대광(誠勤宣力翊戴佐命功臣三重大匡)을 제수 받았고, 흥해군(興海郡)에 봉해졌다. 비(妣)는 타양군부인(沱陽郡夫人) 손씨(孫氏)로 복원부원군(福原府院君), 시호는 정평공(靖平公)인 홍량(興亮)의 딸이다. 영윤(令胤)은 상공(尙恭)으로 부정(副正) 김성옥(金成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또한 영가세족(永嘉世族)이었다. 공은 가문의 전통을 잘 이어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는데 세상사람들에게 추중(推重) 되었다. 중년에 집에서 죽었다. 풍산 철곡동(鐵谷洞) 언덕 간혈(艮穴)에 예장(禮葬)하였다. 부인 김씨는 그 배필로 잘 어울려 이에 해로하기를 기약했다. 마침내 공의 무덤위에 배장(配葬)하였다. 주사(胄嗣) 소(素)는 뛰어나서 일찍 학문을 이루었는데, 풍도(風度)가 호탈(浩脫)하고 문행(文行)이 있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번 좋은 벼슬을 지냈으니 세상에서 매가 조정에 들어서 있는 것 같다고 칭송했다. 통선랑(通善郞)이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불행히 일찍 죽었다. 황고(皇考)의 묘 옆에 장사지내어 유당(幽堂)을 가까이서 모시도록 했다. 그의 처는 영가의인(永嘉宜人) 권씨인데, 우의정을 지냈고 시호가 문경공(文景公)인 진(軫)의 딸이다. 문경공은 후세에 큰 명성을 남겼다. 권씨는 타고난 자질이 인서(仁恕)했고, 능히 가정(家政)을 잘 지키어 후예들을 가르쳐 인도함에 모두 의칙(儀則)이 있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도 제사를 받드는데 어김이 없었다. 나이 팔십이 넘어 질병으로 생을 마쳤다. 또한 곤향(坤向)을 써서 낭군(郎君) 무덤 오른 편에 장사지냈다. 네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맏딸은 절충(折衝) 중추원경력(中樞院經歷) 권옹(權雍)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행수(行首) 홍익부(洪益敷)에게 시집갔으면 셋째는 삼군진무(三軍鎭撫) 남육(南陸)에게, 넷째는 사헌감찰(司憲監察) 안종생(安從生)에게 시집갔으니 모두가 세가(世家)이다. 아들은 계종으로 현감 홍군(洪君) 사제(思悌)의 딸, 감찰대부(監察大夫) 유도(由道)의 후손에게 장가갔다. 계종은 음사로 사헌감찰(監察)을 지냈다. 꺼리낌없이 곧은 말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여러 번 지방관을 지냈는데, 매우 염근(廉謹)15) 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경력(經歷)은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맏아들은 유(裕)로 봉직랑(奉直郞)을 지냈고, 둘째는 작(綽)인데 진사이다. 생원 신숙문(申肅文)에게 첫째 딸은 시집갔고, 둘째 딸은 호군(護軍) 류소(柳沼)에게 시집갔다. 진무(鎭撫)는 네 딸은 낳았다. 맏딸은 우의정(右議政)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에게 시집갔다. 인산군은 문장에 밝고 무(武)에도 재략(才略)이 있어 나라에 주석(柱石)이 되어 당대의 이름난 공신들로 그 보다 뛰어난 이가 없었다. 둘째는 대호군(大護軍) 김기(金耆)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중찬위(忠贊尉) 정세규(鄭世規)에게, 넷째는 유학(幼學)을 홍유치(洪幼治)에게 시집갔다. 감찰(監察)은 세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팽구(彭耉)로 종사랑(從士郞)이고, 둘째는 팽조(彭祖), 셋째는 팽명(彭命)인데 모두 어리다. 봉직(奉直)은 서령(暑令) 박간(朴簡)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아들과 두딸을 낳았다. 맏아들은 이(邇)요, 둘째는 달(達)이다. 딸들은 모두 어리다. 진사(進士)는 현감 오전(吳詮)의 딸에게 장가가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어리다. 생원(生員)은 딸 하나를 낳아 서령(暑令) 이원인(李元仁)에게 시집보냈다. 호군(護軍)은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형(炯)과 환(煥), 그리고 딸까지 모두 어리다. 인산군(仁山君)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봉사(奉事) 심담(深淡)에게 시집보냈다. 대호군(大護軍)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충찬위(忠贊尉)는 아들 하나를 낳았었는데 어리다. 종사(從士)는 사직(司直) 권개(權玠)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서령(暑令)은 두 아들을 낳았으나 어리다. 배씨(裵氏)의 후예들은 매우 두드러지게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었다. 그 명(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부조(父祖)의 전래(傳來)하는 세업(世業)은 옛 역사에 전해지니 덕을 쌓아 훌륭히 되었네. 저 언덕에 묘소가 있으니 4대를 차례로 모셔놓았네. 모두 의로운 명성을 지녔으니, 만세토록 그 명성 남아야 마땅하리. 비석에 글을 새겼으니 영원히 보존될지어다.’

판사복정(判司僕正) 증참판(贈參判) 배상지(裵尙志)의 묘
부의 북쪽 가수천(嘉水川) 북산(北山)에 있다.

대사헌(大司憲) 이승직부인(李繩直夫人) 배씨(裵氏)의 묘
부의 북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갈음(碣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배씨의 고(考)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사복사사(司僕寺事)로 추증된 상지(尙志)이다. 비(妣)는 영가군(永嘉郡) 정부인(貞夫人) 권씨이다. 이승직(李繩直)의 자는 승평(繩平)이다. 월성세가(月城世家)로 고(考)는 중현대부(中顯大夫) 흥위위(興威尉) 대호군(大護軍)인 만실(蔓實)이고, 비(妣)는 철성군부인(鐵城郡夫人) 이씨(李氏)이다. 이군(李君)은 선덕(宣德) 무오년에 태어나 홍치(弘治) 경술년16) 11월 초 닷세 날 죽었다. 나이 쉰 셋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죽어 양주(陽州) 동쪽 촌지동(村池洞)에 장사지냈다. 먼저 감정(監正) 이량(李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불민(不敏) 물민(勿敏) 미민(靡敏)은 아들이고, 딸은 상장(上將) 김암(金巖)에게 시집보냈다. 뒤에 배씨(裵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민(時敏)이다. 아! 이군의 전 후실(前後室) 자손들이 훌륭하구나.”

효자(孝子) 현감(縣監) 권질(權晊)의 묘
부의 동쪽 성야동(城也洞)에 있다. 남향(南向)이다. 부인의 묘는 그 아래에 있다.

현감(縣監) 김삼근(金三近)의 묘
풍산현 직곡(稷谷)에 있다.

현감(縣監) 김영명(金永命)의 묘
안기역(安奇驛) 서쪽 임피사(林皮寺) 간산(艮山)에 있다. 판윤(判尹) 권전(權專)의 사위로 판윤공 부인 묘 아래에 이어서 장사지냈다.

참판(參判) 권주(權柱)의 묘
풍산현 서쪽 선원산(仙園山)에 있다. 부인은 고성(固城) 이씨로 정숙공(貞肅公) 칙지(則之)의 딸이다. 같은 언덕에 묘가 있다. 퇴도선생이 공의 묘소를 배알하시고. 인하여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어두운 시대에 화난을 입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 아니더냐
울창한 송백(松柏) 우거진 골에 푸른 안개 차 있도다.
절개있는 행실은 장래에 응당 역사에 기록될 것이나
천고토록 문장이 전하지 않음이 한스럽기만 하도다.

집의(執義) 권시(權偲)의 묘
부의 동쪽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현감 질(晊)의 묘 뒷편 세 번째 무덤이 이것이다. 부인의 묘는 그 중간에 있다.

봉사(奉事) 권자검(權自儉)의 묘
풍산현 북쪽 현공산(懸空山)에 있다. 남향(南向)이다. 부인의 묘도 같은 언덕에 있다.

현감(縣監) 증참판(證參判) 권계행(權啓經)의 묘
부의 서쪽 소야촌(所夜村)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묘향(卯向)이다. 조고(祖考) 판서(判書) 묘 아래에 있다. 정부인(貞夫人) 인천군(仁川郡) 이씨의 묘는 구린장동(九隣獐洞)에 있는데 병향이다.

진사(進士) 권게(權揭)의 묘
부의 서쪽 봉정사(鳳停寺) 서쪽에 있는데, 남향(南向)이다.

지평(持平) 배권(裵權)의 묘
부의 서쪽 금지(金池) 동쪽 무지산(無地山)에 있다. 처인 공인(恭人) 권씨의 묘가 붙어있다. 갈음(碣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공의 휘는 권(權)이다. 배씨는 본래 흥해(興海) 사람으로 증조 영지(榮至)가 고려에 전라판서(典理判書)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조(祖)는 전(詮)은 삼중대광(三重大匡) 흥해군(興海君) 이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적성군(直城君)의 손자 홍량(洪亮)의 딸에게 장가갔다. 그로 인하여 안동에서 살게 되어, 자손들이 마침내 안동 사람이 되었다. 고(考)는 상지(尙志)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사복시사(判事僕寺事)를 지냈다. 판사공(判事公)이 고려 말엽에 벼슬할 때, 중서랑(中書郞) 낭관이 고사에 따라 공을 꿇어 앉히게 하자, 공은 모자를 벗어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오매, 친구들이 붙잡아 저지시켜도 좇지 아니했다. 부의 치서(治西) 금계촌(金溪村)에 집을 짓고 잣나무, 대나무를 심어 늘 집에서 우유(優遊)하며 생애를 마치도록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백중당집(柏竹堂集)을 남겼으나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되자 본조(本朝)에 들어가서 가선(嘉善)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 되었다. 비(妣)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인 권씨인데 또한 안동사람으로 고려시대에 보승랑장(保勝郞將) 감찰(監察) 희정(希正)의 딸이다. 공은 산원(散員)으로부터 사헌감찰(司憲監察) 현감(縣監) 사헌지평(司憲持平)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공의 형제는 네 명인데, 공은 둘째이다. 맏형은 환(桓)으로 가선(嘉善) 판진주사(判晋州事)를 지냈고, 그 다음은 남(楠)으로 사헌감찰(司憲監察), 그 다음은 강(杠)으로 이조정랑(吏曹正郞)이니 모두 문학(文學)으로 당시에 이름이 있었다. 당시에 영양(英陽)의 남씨(南氏) 형제 몇 사람도 무(武)로써 고을에 이름이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들을 지목해서 ‘배문남무(裵文南武)’라 했다. 아들 효장(孝長)은 녹사(錄事)를 지냈고, 딸은 부사정(副司正) 권개(權价)에게 시집갔다. 녹사(錄事)는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다. 숙형(叔衡) 숙균(叔均)이 아들이고, 사위는 사인(士人) 하원(河源) 김양몽(金養蒙) 이경손(李景孫) 안팽구(安彭耉)이다. 만력 정미년(丁未年)17)에 7대손인 충청도사(忠淸道事) 용길(龍吉)이 짓다.

관찰사(觀察使) 배환(裵桓)의 묘
풍산현 북쪽 본직산(本稷山)에 있다.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

감찰(監察) 배남(裵楠)의 묘
부의 북쪽, 고(考) 상지(尙志)의 묘 동쪽 기슭에 있다.

정랑(正郞) 배강(裵杠)의 묘
하금지(下金地) 작장동(勺將洞)에 있는데 북향(北向)이다.

목사(牧使) 권집경(權執經)의 묘
풍산현 서쪽 구담리(九潭里) 동쪽 월암산(月巖山)에 있다.

생원(生員) 이시민(李時敏)의 묘
부의 서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아들이다.

사직(司直) 권개(權玠)의 묘
부의 서쪽 청석동(靑石洞)에 있는데, 진향(震向)이다. 부인 배씨의 묘는 신분동(新墳洞)에 있다.

관찰사(觀察使) 이희(李暿)의 묘
부의 남쪽 내림촌(內林村)에 있는데 태향(兌向)이다.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 권곤(權琨)의 묘
부의 북쪽 서돈촌(西頓村)에 있으니 남향(南向)이다. 부인 정씨(鄭氏)도 같은 언덕에 묻혀있다.

증승지(贈承旨) 박숙(朴䃞)의 묘
부의 북쪽 조해동(照海洞)에 있으니 간향(艮向)이다. 대사간 승임(承任)의 조(祖)이다.

장사랑(將仕郞) 정보문(鄭普文)의 묘
부의 북쪽 서현(西峴)에 있으니 모향(卯向)이다. 좌의정(左議政) 탁(琢)의 고조(高祖)이다.

부사(府使) 증참판(證參判) 이정(李禎)의 묘
부의 북쪽 가창리(可倉里) 건지산(蹇芝山)에 있다. 묘지(墓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의 휘는 정(楨)으로 진보(眞寶)사람이다. 증조는 석(碩)인데 현리(縣吏)로 생원시에 합격했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조(祖)는 자수(子修)인데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의(判典儀)에 이르렀다. 홍건적(紅巾賊)을 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처음으로 안동에 왔다. 고(考)는 운후(云侯)인데 군기부정(軍器副正)으로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되었다. 공은 큰 뜻을 품었는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다. 세종조(世宗朝)에 북적(北狄)이 여러 번 변경을 노략질하자, 조정에서 명하여 영변진(寧邊鎭)에 약산성(藥山城)을 쌓아 형세를 진정 시켰다. 공이 판관(判官)이 되어 잘 감독하고 다스리어 공을 세웠고, 최윤덕(崔潤德)18) 을 따라 북정(北征)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작위를 하사 받았다. 한산(韓山) 선산(善山)에 수령을 역임하여 모두 송덕비가 세워졌다. 중간에 손자 우(堣) 때문에 통정(通政)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오늘에 와서는 증손자인 황(滉) 때문에 가선(嘉善)으로 더해져 추증되었다. 안동 김씨 지보주(知甫州) 정(挺)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다 아들 우양(遇陽)은 흥양(繼陽)은 훈련참군(訓練參軍)을 지냈으며 계양(繼養)은 진사였다. 사위가 여섯인데, 남백경(南伯庚) 류봉수(柳鳳壽) 정보문(鄭普文) 이주(李疇) 박근손(朴謹孫) 권종(權悰) 등이다. 내외(內外)로 남녀가 삼십여명이요, 증손 남녀는 번성해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증손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황(滉)이 짓다.”

승지(承旨) 권자홍(權自弘)의 묘
부의 서쪽 흑동(黑洞) 산에 있다.

판서(判書) 임계중(林繼仲)의 묘
감천현(甘泉縣) 서쪽 덕율촌(德栗村)에 있다. 남향(南向)이다.

장령(掌令) 강종덕(姜宗德)의 묘
감천현 서쪽 아리(阿里) 삼동(三洞)에 있다. 부인의 묘는 감천현 서쪽 지상(池上)에 있으니 동향(東向)이다.

판부사(判府事) 남우량(南佑良)의 부의 북쪽 오이산(烏耳山) 골짝에 있다.

군수(郡守) 남의원(南義元)의 묘
부의 북쪽, 연비원(燕飛院) 동쪽 골에 있으니 유향(酉向)이다. 이홍준(李弘準)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의원(義元)이요, 자는 가의(可宜)이다. 영양세가(英陽世家)로 남군보(南君甫)의 10대손이다. 군보가 공약(公若)을 낳았고 공약이 비(備)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星老)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 비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을 낳았고, 유손은 전서(典書) 휘주(輝珠)를 낳았다. 희주는 참판(參判) 민생(敏生)을 낳았고 민생은 장원(莊元) 우량(佑良)을 낳았다. 벼슬이 가정(嘉靖)년간에 회령부사(會寧府事)에 이르렀다. 우량이 치공(致恭)을 낳았는데, 치공은 사온직장(司瑥直長)인 김곤(金坤)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젊어서부터 씩씩한 뜻이 많아 말을 달리며 검술을 익혀 활을 쏘아 버들 잎을 뚫기도 하였다. 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금위(內禁衛)19)에서 일하다가 병오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군수(郡守) 임찬(任纘)의 밑에 있었다. 창주첨사(昌洲僉使)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삼수군(三水郡)으로 옮겼다가 뒤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내승(內乘)20)을 겸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 이산(理山) 군수가 되어 나갔가다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장흥고령(長興庫令)으로서 선공첨정(繕工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인년 가을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공을 세워 원종일등(原從一等)21)으로 공신록에 올라 통정(通政)을 제수 받았다. 조정에 규례대로 환수(還收)할 것을 여쭈고 외직으로 나아가 여산(礪山) 고을을 다스렸다. 얼마되지 않아서 섬나라 오랑케들이 변(變)을 일으키자 낙안(樂安)으로 전근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른 뒤부터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할 뿐, 집안일은 잊어 버렸다. 서북(西北)으로 다니면서 공적을 세워 그 명성이 중외(中外)에 까지 났었다. 마침내 국가 일을 쉬지않고 열심히 하다가 병을 얻어 사직(辭職)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약을 다려서 먹어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아아! 원통하구나. 공은 참판(參判) 이공(李拱)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한(漢) 회(淮) 위(渭) 명(溟) 변(卞)이고 딸은 배륜(裵綸) 권기(權奇)에게 시집 보냈으며 하나는 아직 혼인하지 못했다. 명(銘)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낙안공(樂安公)의 의연한 충정, 참다운 영웅이로세. 자신의 행동 곧게 하였고 일에 처해서는 진실로 했도다. 몸에는 실책이 없었고 벼슬엔 마음을 다했다네, 맡은 일 그만두지 않았으니 모두가 공경하였네, 하늘은 왜 이리도 바삐 앗아 가는지, 길지 않은 생애를 누렸구나. 그 때에 슬퍼했던 곳, 바로 연원(燕院) 동편이라네, 놀라 솟구친 봉우리 울창도 하구나. 땅은 어질지 못해, 이런 착한 사람을 묻어버리다니. 짧은 묘길만이 새롭기만 하도다.”

진사(進士) 증영의정(贈領議政) 권사빈(權士彬)의 묘
내성현(柰城縣) 북쪽, 유곡산(酉谷山)에 있다.

교리(校理) 이종준(李宗準)의 묘
부의 서쪽 금지(金池)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증참판(證參判) 이증(李增)의 묘
임하현 북쪽, 수다산(水多山)에 있다. 관찰사 강혼(姜渾)이 찬술한 갈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년 봄, 경상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공(李公)이 편지를 혼(渾)에게 보내와 가로되, ‘우리 공은 명가(名家)에서 생장했으니, 젊어서 학문을 좋아해서 게을리함이 없었다. 계유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일찍이 진해(鎭海) 영산(靈山) 두 현의 원님을 지냈는데,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자혜로와 백성들이 그가 떠난 뒤에도 그를 생각했다. 그러나 본디 벼슬에 뜻이 적었으므로 영산현감으로 있을 때 임기가 다 되지 않았는데도 그만두고 안동 촌야(村野)로 돌아갔다. 집안이 자주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으나 기쁜 모습으로 마치 스스로 무슨 즐거운 경치가 있는 듯했다. 고을의 부로(父老)로서 나이 많고 덕있는 이 열두명과 함께 우향계(友鄕契)를 맺어 지팡이와 짚신으로 산수 사이에 노닐며 노경(老境)을 즐겼다. 사가(四佳) 서상국(徐相國)22)이 장가(長歌)를 지어 그 사실을 읊었다. 공은 영락(永樂) 기해년23)에 태어나 성화(成化) 경자년24)에 죽었다. 묘는 안동 임하현 수다산 기슭에 있다. 지금 이미 갈(碣)은 갖추었으니. 원컨데 자네가 불후(不朽)하게 하는 방도를 마련해 주기를 부탁하네. 자네는 사양하지 마시게, 하고 했다. 혼이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증(增)이요 자는 잠겸(子謙)이니 철성(鐵城)사함이다. 6세(六世)인 진(瑨)은 급제하여 덕을 숨긴채 벼슬하지 않았는데, 증손인 암(岩)은 열 일곱에 급제하여 마침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벼슬이 이르렀고 철성부군수(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호는 행촌(杏村)으로 서법(書法)에 있어 원나라 조자앙(趙子昻)과 명성을 같이 했다. 사자(嗣子) 강(岡)은 열 다섯에 급제하여 벼슬이 집현관(集賢館)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호는 평재(平齋)이다. 사자(嗣子) 원(原)은 열 여덟에 급제하여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호는 용헌(容軒)이니 이가 곧 공의 고(考)이다. 여러 세대가 모두 명신(名臣)을 지냈으니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으로 한 세상으로 으뜸이었다. 공의 비(妣)는 최씨(崔氏)인데 군부총랑(軍簿摠郞) 정지(丁知)의 딸이다. 공은 고려의 익재(益齋) 이문충공(李文忠公)25) 4세손인 관찰사 이희(李禧)의 딸에게 장가가서 5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평(枰)인데 사온서령(司瑥署令)을 지냈고, 둘째는 굉(浤)인데 절도사를 지냈다. 경자년 신종호(申從濩)의 방(榜)에 급제하여, 여러 번 자리를 옮기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되었다. 오늘날 본직(本職)을 가지고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셋째는 명(洺), 넷째는 청(淸), 다섯째는 행(洐)인데 생원이었다. 딸로 첫째는 현령(縣令) 조동호(趙銅虎)에게 시집갔고 둘째 어모장군(禦侮將軍) 황전(黃전)에게 시집갔다. 서령(署令)은 아들은 낳았는데, 윤(胤)은 병오년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주(胄)는 무신년에 급제하여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연산조(燕山朝)에 직간(直諫)을 하다가 죽었다. 그 사실이 국사(國史)에 남아 있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자 주(胄)를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하고 또 서령(署令)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추증하였다. 그리고 그의 곧음을 표창하였다. 전(䐌)은 사용(司勇)을 지냈고, 육(育)과 려는 다 진사였다. 맏딸은 판관(判官) 황진(黃璡)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류형창(柳亨昌)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인의(引儀) 허복형(許復亨)에게, 넷째는 남식(南栻)에게, 다섯째는 한근(韓謹)에게 시집갔다. 절도사(節度使)는 딸을 낳았는데 현감 안서(安㥠)에게 시집갔다. 명(洺)은 아들을 낳았으니, 구(臞)는 진사였고, 차남은 승(勝) 반(胖) 굉(肱) 고(股)이다. 현령(縣令)은 아들을 낳았으니, 순(舜)은 사헌집의(司憲執義)였고 창(昌)은 보공장군(保功將軍)이었으며, 삼(參)은 전적(典籍), 적(績)은 진사, 발(發)은 건겸사복(騫兼司僕)이었다. 연(淵)은 어리지만 재화(才華)가 있었다. 황전(黃전)은 딸을 낳았으니, 맏딸은 신공권(辛公權)에게 둘째는 강사옹(康士雍)에게 시집갔다. 아아! 벼슬이 잇달아 빛나는 집안의 주손으로, 살아서는 그 뛰어난 명성을 잃지 않았고 죽어서는 어진 자손들이 그 덕을 이었구나. 이에 다음과 같은 명(洺)함이 마땅하겠다. ‘영가의 동쪽엔 임하가 넘실넘실 흐르네. 우뚝한 언덕이 있으니 이 바로 이공의 무덤이로다. 다듬어 명(洺)하노니 그 글이 그 향기가 함께 영원할지어다.’

현감(縣監) 권거약(權居約)의 묘
부의 서쪽 불당산(佛堂山)에 있다. 부인은 춘천(春川) 박씨(朴氏)로 묘가 닷자동(닷子銅)에 있으니 곤향(坤向)이다.

정랑(正郞) 배소(裵素)의 묘
풍산현 아래 철곡촌(鐵谷村) 뒷산, 고(考)인 전서(典書)의 묘 옆에 있다.

사축(司畜) 홍이(洪頤)의 묘
부의 서쪽 증금동막동(曾金東幕洞)에 있다. 권판서(權判書) 예(輗)의 부인 홍씨(洪氏)의 고(考)이다.

현감(縣監) 이우양(李遇陽)의 묘
부의 동쪽, 가야촌(佳野村) 동구 우역산(于易山)에 있다. 오향(午向)이다.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김한계(金漢啓)의 묘
부의 북쪽, 무은산(茂隱山) 남쪽에 있다. 스물 다섯에 급제하여 오랫 동안 집현전(集賢殿)에 있었다. 청요(淸要)의 관직에서 두루 이름을 날렸으며, 벼슬이 승문부지사(承文副知事)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하자 영원히 전리(田里)로 돌아왔다. 집에서 죽었다.

정랑(正郞) 김한철(金漢哲)의 묘
부의 북쪽 오이산(烏耳山) 겸사동(兼寺洞), 경혜공(景惠公)의 묘 뒤에 있다. (대사헌 이우(李隅)가 갈문을 지었다.)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의 묘
풍산현 북쪽, 직곡산(稷谷山)에 있다.

진사(進士) 남치정(南致晶)의 묘
부의 남쪽, 남맥(南陌)에 있으니, 동향이다.

만호(萬戶) 남치영(南致英)의 묘
부의 남쪽 유재산(遺才山)에 있다.

진사(進士) 남팔준(南八俊)의 묘
일직현 구미촌(龜尾村) 북쪽에 있으니 간향(艮向)이다. 갈명(碣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의 휘는 팔준(八俊)이니 자는 사걸(士傑)이요, 영해부(寧海府) 영양현(英陽縣) 사람이다, 조(祖)는 참판(參判) 민생(敏生)이요, 고(考)는 만호(萬戶) 치영(致英)이며, 모(母)는 전주(全州) 이씨인데 부사(府使) 지명(知命)의 딸이다. 향년(享年)은 일흔 일곱이었다. 광주(光州) 김씨에게 장가들어, 3남 5녀를 낳았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스물 다섯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국학(國學)에 유학하였는데, 제배(儕輩)26)들이 다투어 추천하였다. 재주가 있었으나 운명이 좋지 않아 대전산(大田山) 아래에다 터를 잡고 살았다. 때에 맞추어 혼가(婚嫁)하였고 산수로써 자오(自娛)하였다. 맏딸은 교리(校理) 이복로(李福老)에게 시집갔고, 둘째 별좌(別座) 강희언(康希彦)에게 시집갔다. 맏아들 생원인 훈(薰)으로 평사(評事) 김극해(金克諧)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셋째 딸은 충의위(忠義衛) 이순(李珣)에게, 넷째는 이호(李壕)에게, 다섯째로 성균학유(成均學諭)인 류공권(柳公權)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은 희(熹)인데, 생원 노탁(盧濯)의 딸에게 장가갔고, 막내는 홍(鴻)이니 안윤종(安閏宗)의 딸에게 장가갔다. 가정 기축년27)에 가정 기축년에 대전산(大田山)에 장사지냈는데 그것은 유교(儒敎)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수(郡守) 권옹(權雍)의 묘
부의 서쪽 본디 파곡리(波谷里)인 태사묘 아래에 있다. 부인의 묘도 같은 언덕에 있다.

군수(郡守) 김정(金貞)의 묘
부의 남쪽 장인사(長仁寺)골 소부감(小府監) 김무(金務)의 묘 아래에 있다.

유수(留守) 이굉(李浤)이 묘
부의 남쪽, 순천사(順天寺) 골에 있다. 참판 황효헌이 갈문을 지었다.

군수(郡守) 이반(李胖)의 묘
부의 남쪽, 이희(李暿)의 묘 북쪽에 있으니 태향(兌向)이다.

군수(郡守) 이고(李股)의 묘
일직현 평팔촌(平八村) 동쪽 직동산(直洞山)에 있다.

지평(持平) 권징(權徵)의 묘
부의 서쪽 청석동(靑石洞)에 있는데 묘향(卯向)이다. 갈음(碣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은 화산(花山) 사람이다. 선덕(宣德) 병오년28)에 태어나서 영정(永貞)년간에 호장(戶長) 권이중(權以中)의 딸에게 장가갔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갑성(甲成)이요, 둘째는 을성(乙成)이다. 모두가 어리다. 정통(正統) 정묘년2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태(景泰) 경오년3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정자(承文正字)를 제수 받았다. 저작랑(著作郞), 통례문봉례감찰(通禮門奉禮監察) 도관좌랑(都官佐郞), 성균주부(成均主簿), 공조좌랑(工曺左郞) 겸(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성화(成化) 정해년에 함길도(咸吉道)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李施愛)31)의 난에 운명하였다. 초혼(招魂)하여 부인 권씨와 합장하였다.”

호군(護軍) 류창수(柳昌壽)의 묘
풍산현 서쪽, 지곡촌(枝谷村) 백호(白虎) 밖 정산(井山)에 있으니 남향(南向)이다. 수찬(修撰) 채수(蔡壽)가 갈문을 지었다.

봉사(奉事) 권질(權礩)의 묘
풍산현 선원산(仙原山), 고(考) 참판 주(住)의 묘 동편에 있다. 퇴도 선생이 묘를 배알하고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당시에 사람들 이 분의 청진(淸眞)함을 알지 못했고
지하에 계시니 이 분을 흥기시킬 수도 없구나.
황량산 산에서 제사를 피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매화가 드물게 핀 곳에서 그 정신을 생각해 보네.

부사(府使) 류양춘(柳陽春)의 묘
풍산현 서쪽, 선원산(仙原山)에 있으니 남향(南向)이다.

부사(府使) 배효숭(裵孝崇)의 묘
부의서쪽, 하가곡(下嘉谷) 장가동(長嘉洞)에 있다.

증좌통례(贈左通禮) 김자순(金子純)의 묘
풍산현 북쪽, 포건산(浦件山)에 있으니 남향(南向)이다.

증참의(贈參義) 김종석(金從石)의 부인인 춘천박씨(春川朴氏)의 묘
풍산현 북쪽, 예천군(醴泉郡) 경계인 광석산(廣石山)에 있으니 남향이다.

증참판(贈參判) 김휘손(金徽孫)의 묘
풍산현 북쪽 광석산(廣石山), 비(妣)는 박씨(朴氏)의 묘 앞에 있다.

현감 김회(金淮)의 묘
부의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으니 남향이다.

진사(進士) 증좌승지(贈左承旨) 배헌(裵巘)의 묘
내성현(柰城縣) 서남쪽 호애산(虎崖山) 바깥 기슭에 있다. 증손인 충청도사(忠淸都事) 용길(龍吉)이 갈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헌(巘)이요, 자는 헌지(巘之)이다. 경상도 홍해군 사람이다. 공의 나이 열 다섯에 통례공(通禮公)이 죽었다. 공이 외직에 제수되자 가업을 능히 이을 수가 없다고 두렵게 여겨 보따리를 싸 질머지고 스승을 찾아 나섰다. 매서운 의지력으로 독실히 실천하여 정덕(正德) 병오년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벼슬에 나아가려는 생각을 끊고 오직 자제들을 훈도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봄이 오면 반드시 새벽에 나아가 대문밖에 앉아서 남쪽 이랑으로 농사하려 가는 사람들을 살펴서 빠진 사람이 반드시 벌을 주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농사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바로 옛날에 동지(冬至)로부터 45일이 지나면 비로서 나아가 농삿일을 배운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문학을 넓혀야 한다고 권유하면, 웃으며 가로되, “문학을 넓히는 것 또한 벼슬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였다. 공은 천성이 강개(慷慨)하고 강직(剛直)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으나, 횡역(橫逆)33)이 닥치면 또한 그들과 겨루려고 하지도 않았다. 공은 성화(成化) 임인년34)에 태어나 가정 갑신년35)에 죽었다. 뒤에 손자가 관찰로서 귀해지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금성박씨(錦城朴氏)인데, 충의위(忠義衛) 자(磁)의 딸로 좌의정 금천부원군(金川府院君)인 평도공(平度公) 언(언)의 증손이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태어나 가정 무신년에 죽었다. 3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천석(天錫)은 증병조참판(贈兵曺參判)이었고, 둘째 천우(天佑)는 학생(學生)이었으며, 셋째 천주(天柱)는 정로위(定虜衛)이었다. 딸은 사인(士人) 금응균(琴應均), 권적(權적), 부장(部將) 금우인(琴友仁)에게 시집갔다. 참판(參判)은 2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선부군(先府君) 삼익(三益)이니 곧 관찰사(觀察使)였고, 둘째는 삼근(三近)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응조(李應祚)에게 시집갔다. 학생(學生)은 1남 6녀를 낳았다. 아들은 삼성(三省)이고, 딸은 사인인 송척(宋惕) 주경(朱敬) 손여각(孫汝覺), 그리고 통정(通政) 이령(李笭), 사인 김린상(金麟祥), 통정 권득경(權得經)등에게 시집갔다. 정로(正虜)는 2녀를 낳아 충의위(忠義衛) 이백춘(李百春)과 사인 황열(黃悅)에게 시집보냈다. 첩으로부터 아들 하나를 얻었으니 삼로(三老)이다. 금사인(琴士人)은 1남을 낳으니 앙성(仰聖)이고, 권사인(權士人)은 3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신언(愼言) 근행(勤行) 근신(謹身)이고 딸은 사인 남응려(南應呂) 조헌(曺憲) 정류렴(鄭維廉)에게 시집보냈다. 부장(部長)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봉선(奉先)이다. 증조는 녹사(錄事) 효량(孝良)이고, 조(祖)는 소위장군(昭威將軍) 임(秹)이며 고(考)는 증좌통례(贈左通禮) 이순(以純)이다. 고려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6대손이다.”

사맹(司孟) 권숙형(權叔衡)의 묘
부의 서쪽 대표산(代표山) 남쪽 기슭에 있다. 오향(午向)이다. 숙인(叔人) 조씨(趙氏)의 묘는 뒤에 붙어있다. 숙인 조씨의 묘는 뒤에 붙어있다.

참판(參判) 김양진(金楊震)의 묘
풍산현 북쪽. 광석산(廣石山)에 있다. 사향(巳向)이다. 대제학(大提學) 정사룡(鄭士龍)이 신도비(神道碑)36)를 지었다.

첨정(僉正) 김의정(金義貞)의 묘
풍산현 북쪽, 광석산, 진산군수(珍山君守) 묘 앞에 있다.

진사(進士) 김만근(金萬謹)의 묘
임하현 동림사(東林寺) 뒤에 있다.

진사(進士) 이홍준(李弘準)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스스로 갈명을 지어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함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라, 죽음을 꺼려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함 또한 미혹됨이 심하다. 저 장자(莊子)가 형해를 잊는다는 것과 왕양손(王楊孫)이 벌거벗은 몸으로 장사를 지낸다는 말과 같은 것은 지금 세상엔 다시 없구나. 그는 생사(生死)를 잘 알면서도 이를 마음 속에 두지 않는 자라 하겠다.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일찍이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생(生)이 없으면 곧 사(死)도 없고
생이 있으면 곧 사가 있게 되나니
생과 사는 모두 덧없는 것이요
조물(造物)도 끝과 시작이 없는 것을

비록 달관(達觀)에 이르지 못한 무리라 하더라도, 본 바가 이와 같을 뿐이다. 대개 사람이 관화(觀化)한 뒤에 자손된 자가 남에게 갈사(碣辭)를 청하여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붓을 제멋대로 놀리어 그 실상을 없게 만드니 더욱 가소롭구나, 이 늙은이는 평생토록 게으르고 졸렬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항상 농사에 힘쓰므로써 처자식을 먹여 살렸고 일곱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했지만 계산(溪山)에서 우유(優游)37)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에 명(銘)하여 말하노라,
‘이미 재주도 없고 또 덕도 없으니 사람일 뿐이요, 살아서 작록도 없고 죽어서 명성도 없으니 혼일 뿐이며, 근심과 즐거움이 없어지고 헐뜯음과 칭찬이 사라졌으니 흙일 뿐이로다.”

진사(進士) 권숙균(權叔均)의 묘
부의 서쪽, 마감산(麻甘山) 큰 골에 있으니 병향(丙向)이다. 부인 김씨의 묘는 그 앞에 있다.

진사(進士) 증판서(贈判書) 권철경(權哲經)의 묘
부의 서쪽 불당산(佛堂山)에 있다. 판서 예(禮)의 고(考)이다.

찰방(察訪) 이덕장(李德璋)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퇴도선생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덕장(德璋)인데 경주(慶州) 사람이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증조 모(某)는 대사헌이었고, 조(祖)모는 생원이었으며, 고(考)모는 진사(進士)였다. 공은 성화 임인년에 태어났다. 젊어서 과거업(科擧業)을 익혀, 일찍이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예위시(禮圍試)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음사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에 임명되었다. 가정 계미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나서, 집이 가난하고, 부친이 노쇠하였기 때문에 두번이나 벼슬을 얻을 생각으로 힘써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듬해 4월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향년(享年)이 마흔 둘이었다. 계미년에 개단현(皆丹縣) 운봉산,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공은 젊어서 뜻이 높고 기백을 숭상하여 악착같고 어리석은 무리 속에 끼이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일찍이 소(疏)를 초(草)하여 시사(時事)를 진언하고자 하였는데 얼마뒤에 나의 분수에 넘는 일이라 경계하고 그만두었다. 자제를 가르침에 매우 엄격하였고 향리의 후생들에게도 배우기를 권면하였다. 산업에 힘쓰지 않아 일찍이 칭대(稱貸)하여 자급(自給)하였다. 공의 처는 풍산 류씨인데, 진사 자온(子溫)의 딸로 공조전서(工曹典書) 종혜(從惠)의 후예이다. 성화 계묘년38)에 태어났으니, 품성(稟性)이 조용하여 평상시에도 성내는 말이나 성급한 기색이 없었다. 공이 죽을 때 집안이 더욱 가난해졌는데도 오히려 집안 사람들이 가난을 탄식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가로대, ‘나의 분수가 여기에서 그치는데 무엇을 한탄하리오’하고 했다. 그 아들에게 훈계하기를, ‘차라리 얼어 굶어 죽을지언정, 의가 아닌 물건은 취하지 말라!’고 했다. 친척이나 이웃들과 화목하고 친했으며, 마음을 다해 혐섭함을 두지 않았다. 어떤 때는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급한 사람을 도왔으며, 또 일찍이 남이 주는 선물을 속없이 받지 않았다. 족인(族人) 중에서 제사를 핑계대면서 지내지 않은 이가 있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제사를 대신 지내 주었다. 삼가 가로대 ‘저 사람의 마음 씀이 이와 같거늘 아무리 억지로 행하게 만든다 해도, 조고(祖考)께서 그것을 흠향할 마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몇 년 뒤에 그 사람은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댁(宅)의 마음이 곱고 선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내(내). 둘째는 여(여). 셋째는 진(진)이었는데 공이 죽고 나서 10여년동안 잇달아 죽었다. 그 막내인 포(苞)는 기유년에 생원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딸은 생원 이훈(李薰)에게 시집갔다. 가정 병진년에 류씨가 죽었는데 공의 묘에 부장(袝葬)하였다. 명(銘)하여 말하노라. ‘월성 이씨는 그 유서(遺緖)가 멀고도 먼데, 공께서 이를 이었으니 그 모습이 단정도 하구나, 능히 나랏 일을 살필 수 있었거늘, 어찌하여 벼슬이 그리도 막혔던가. 우관(郵官)에 임명된 것이 그만이었으니 천리마 같은 인재가 이에 숨어 버렸도다. 중년에 다시 벼슬을 구하려 하였으니 이는 부친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이라. 뜻을 품고 영원히 돌아갔으니 나그네로 죽은 것이 비상(悲傷)하기만 하다. 현부(賢婦)가 있었으니 풍산의 훌륭한 씨족이라. 그 몸을 맑고 신중히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네. 또한 자손도 잘 길러 빛나는 난옥(蘭玉)과 같았다네. 상화(喪禍)가 거듭되었지만 능히 집안을 지탱시켰도다. 막내 아들은 성품으로 정성껏 효도하였으니,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었다. 하늘이 보답해 상을 내리심은 이에 조금도 틀림이 없기 때문이라. 그 언덕에 우뚝한 무덤, 백양목이 바람에 울부짖는다. 그 가려짐을 같이하면서 이 무덤을 영원히 보전하리라?”

증승지(贈承旨) 김예범(金禮範)의 묘
임하현 북쪽, 비리곡(飛鯉谷)에 있다. 손자 홍문관수찬(弘文舘修撰) 성일(誠一)이 갈문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왕부군(王府君)의 휘는 예범이요. 자는 국헌(國憲)이다. 그 선조는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다. 9대조는 용비(龍庇)인데 고려조에 벼슬하여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고 처음으로 문소(聞韶)39)에 적(籍)이 올랐다. 백성들에게 공덕(公德)이 있었으니 고을 백성들이 지금도 제사를 올린다. 8대조는 의(宜)인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7대조는 서지(瑞之)로 조현대부(朝顯大夫) 내영소윤(內盈少尹)을 지냈고, 6대조는 태권(台權)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 문예부좌사원(文睿府左司射)을 지냈다. 5대조는 거두(居斗)인데 봉일대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고조는 존진(존進)인데 예도도만호(禮島都萬戶)를 지냈다. 증조는 영명(永命)으로 신령현감(新寧縣監)을 지냈고, 조(祖)는 한계(漢啓)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냈는데 노산조(魯山朝)에 벼슬하여 경연(經筵)에서 논사(論思)하고 미원(薇垣)40)에서 곧음을 잃지 않아 그 빛나는 문망(聞望)이 조정에서 매우 자자하였다. 시사(時事)가 한번 변함에 미쳐서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병이 들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 때 아우 한철(漢哲)과 자서(姉壻) 정륜(鄭綸)이 잇달아 급제하여 계림삼지(桂林三枝)와 같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기었다. 고(考)는 만근(萬謹)인데 정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해주(海州) 오씨(吳氏)에게 장가갔다. 성화 기해년 2월에 부군(府君)을 복주(福州) 임하현(臨河縣)의 천전리(川前里) 사저에서 낳았다. 부군 타고난 자질이 염개(廉介)41)하여 취여(取與)에도 반드시 살폈다. 향리에 있을 때는 삼가 어버이를 효로써 섬겼으니, 향당(鄕黨)에서 추장하여 ‘선인(善人)’이라고 했다. 집안 일을 매우 잘 처리하였다. 조비(祖妣)는 단양신씨(丹陽申氏)인데 또한 부덕(婦德)이 있어 잘 조화가 되어 내외(內外)가 근검 절약하였으니 가도(家道)가 이에 이루어졌다. 처음에 하상(河上)에다 집을 일으킬 때 반드시 그 제청(祭廳)을 크게 짓고 뜰도 넓히려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우(堂宇)에 넘치게 되었다. 매양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양이면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각각 일정한 위치가 있었다. 사람들이 비로소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복하게 되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문호(門戶)의 흥체(興替)42)는 자손의 현부(賢否)에 달려있고, 자손의 현부는 부형(父兄)에게 달려있다. 오문(吾門)은 선조의 적경(績慶)을 이어서 대대로 관면(冠冕)의 자손이 되었으나 오늘날 가문의 명성이 진작되지 못하고 갑자기 이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책임은 돌이켜 보건대 나에게 있음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였다. 마침 영가(永嘉) 권공(權公) 간래(幹來)가 나의 백고모(伯姑母)에게 장가왔는데, 학행(學行)이 본디부터 이름나 있었다. 마침내 우리 대인(大人)에게 명하여 가서 사사(師事)하도록 하였다. 대인이 능히 그 학문을 전수받을 수 있었으니 우리 형제들이 정훈(庭訓)을 받들어 조금이라도 이룸이 있었던 것은 이연(貽燕)의 나머지가 아님이 없다. 성품이 본디 천석(泉石)을 사랑하여 만년엔 임수(臨水)에다 정자를 지었다. 가신영절(佳辰令節)엔 반드시 벗들로 하여금 상영(觴詠)하도록 했고, 어떤 때는 훌쩍 홀로 가서 즐기며 돌아옴을 잊었다. 나이 일흔 들어 병으로 사저에서 죽었다. 실로 가정 경신년 7월이었다. 이 해에 현의 서쪽, 비리곡(飛鯉谷) 태좌(台座)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부군보다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에 이르러 합장하였다. 공은 3남 2녀를 낳았다. 맏이는 나의 대인 진(璡)이니 을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셨고, 둘째는 정(珽)이니 참봉(參奉)에 특배(特配) 되었는데 효성을 표창받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수(璲)이다.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이극필(李克弼)에게, 차녀는 진성 이희안(李希顔)에게 시집갔다. 대인은 좌정승(左政丞) 민제(閔霽)의 4대손인 세경(世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극일(克一)데 가정 병오년43)에 급제하여 전성주목사(前星州牧師)를 지냈고, 둘째 수일(守一)은 을묘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셋째 명일(明一)은 갑자년44) 생원시에 합격하였지만 일찍 죽었다. 넷째 성일(誠一)은 전홍문관수찬(前弘文舘修撰)을 지냈고, 다섯째 복일(復一)은 성균관에 보직되었다. 장녀는 문화(文化) 류성(柳城)에게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되었다가 잇달아 죽었다. 둘째는 진성 이봉춘(李逢春)에게, 셋째는 문화 류란(柳瀾)에게 시집갔다. 참봉(參奉)은 영가권씨에게 장가들었고 수(璲)는 감천 문씨(甘泉 文氏)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협일(協一), 차남은 지일(至一), 3남은 어리다. 장녀는 우천수(禹天壽)에게, 차녀는 황식(黃式)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충의(忠義)는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수(遂)이고 희안(希顔)은 2남 5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정회(庭檜), 차남은 정백(庭栢)이다. 장녀는 권뢰(權牢)에게, 차녀는 류심(柳潯)에게, 3녀는 권의중(權義中)에게, 4녀는 박원준(朴元俊)에게 시집갔는데 나머지는 어리다. 명(銘)하여 말하노라, ‘역(易)에서는 여경(餘慶)을 찬양하였고, 서(書)에서는 유곤(裕昆)을 찬미하였네. 덕을 후세에 전하였으니 지엽이 무성한 것은 그 뿌리에서 말미암는 것이라. 아아! 우리 할아버지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으니 첨사(詹事)께서 근원을 깊이하자 복야(僕射)께서 이어서 터를 닦았네. 감문(監門) 내윤(內尹) 좌사(左司) 수부(水部) 등 6대가 고려의 조정에서 광영을 이어 잇달아 섰다네. 씩씩한 장군(將軍)께서 본조(本朝)에 간성(干城)이셨고, 훌륭하신 현재(縣宰)께서는 7조소(七條疏)에 정적(政績)이 드러나셨네. 지원(知院)은 절개를 떨쳤고 옥당(玉堂)에서 마음대로 날개를 펴다가 때 마침 사건이 많아 고향으로 돌아오셨다네. 진사(進士)에 내려오면, 이분이 바로 왕고(王考)를 낳으셨으나, 2세(二世)가 덕을 숨기셨다네. 그 복덕이 장차 크게 되어 어질게 되고 광영이 되었다네. 탐욕하지 않음이 보배이요, 벼슬을 구하지 않았으니 강령(康寧)하게 되었고, 작록도 없었지만 존귀해졌도다. 오직 어버이에게 효성스러웠기에 능히 자손에게 복을 끼칠 수 있었네. 청백(淸白)을 가문에 남기고 시서(詩書)를 문호에 전했다네. 떨쳐 일어난 자손들이 거의 집안을 세울 수 있었으니 청련(淸莲)45)이 밑바탕을 아울렀도다. 단계(丹桂)가 세번씩이나 향기를 내었으니 그대의 어짐이 아니요 오직 조상의 덕분이라. 문호의 경사가 지금부터 더욱 번창하리라. 울창한 저 서산(西山), 리연(鯉燕) 물가, 모수(某水) 모구(某丘)가 모두 그 앞에 있네. 예전에 노닐고 쉬던 곳에 지금 오르내린다. 천추만세토록 영원히 봉역(封域)에서 평안하시라.”

직장(直長) 정윤소(鄭允韶)의 묘
부의 동쪽, 검상동(儉尙洞)에 있으니, 손향(巽向)46)이다.

관찰사(觀察使) 김연(金緣)의 묘
부의 북쪽, 거인산(居仁山)에 있다.

판서(判書) 권예(權輗)의 묘
부의 서쪽, 불당산(佛堂山)에 있다. 부인 홍씨(洪氏) 한씨(漢氏)의 묘는 양방(兩傍)에 있다.

목사(牧使) 진담(秦澹)의 묘
부이 서쪽, 불당산에 있다. 첩인 열녀(烈女) 이돈전(李敦田)의 묘는 그 곁에 있다.

정랑(正郞) 증참판(贈參判) 류공권(柳公權)의 묘
부의 서쪽, 천등산(天燈山)에 있다. 오향(午向)이다. 부인 열부(烈婦) 남씨(南氏)와 합장하였다.

군수(郡守) 이복로(李福老)의 묘
일직현 향교봉(鄕校峯)에 있었니 손향이다. 대사간 어득강(魚得江)이 묘갈(墓碣)을 지었다.

현감(縣監) 정원로(鄭元老)의 묘
부의 동쪽, 대야동(大也洞) 뒷산에 있다. 곧 정승(政丞) 탁(琢)의 증조이다.

사직(司直) 정인로(鄭仁老)의 묘
부의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류전서(柳典書) 부인 임씨(林氏)의 묘 왼편에 있다. 병향(丙向)이다. 전서(典書)의 손서(孫壻)였기 때문에 부인 류씨(柳氏)와 여기에 합장한 것이다.

생원(生員) 증좌찬성(贈左贊成) 정교(鄭僑)의 묘
부의 동쪽, 지내동(池內洞) 북산(北山)에 있으니 리향(离向)이다. 부인 김씨의 묘는 뒤에 있다. 좌의정(左議政) 탁(琢)의 조(祖)이다.

군수(郡守) 안수(安琇)의 묘
부의 동쪽, 음곡산(陰谷山)에 있으니 부인 금씨(琴氏)와 언덕을 같이하고 있다.

생원(生員) 변광(邊廣)의 묘
부의 서쪽, 닷자동(닷子洞)에 있다. 간좌(艮坐)이다.

진사(進士) 정언보(鄭彦輔)의 묘
부의 북쪽, 문곡(文谷)에 있으니 오향(午向)이다. 부인 이씨와 합장했다. 손자 홍문수찬(弘文修撰) 사신(士信)의 묘지(墓誌)를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언보(彦輔)요 다가 충경(忠卿)이고 청주인(淸州人)이다. 고려사 충의(忠義)에 사절한 정의대부(正議大夫) 상장군(上將軍) 정개(鄭개)의 후예이다. 상장(上狀)의 손자 개는 충렬왕조(忠烈王朝)47)에 뛰어나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연영전대사학(延英殿大司學)이 되었다. 시호는 장경공(章敬公)이다. 이 분이 청하군(淸河君) 적(적)을 낳았다. 산업을 일삼지 않고, 항상 사방으로 노닐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청하(淸河)는 시중(侍中)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문영공(文英公) 순(恂)의 딸에게 장가갔다. 안동 사람이다. 충렬(忠烈)은 항상 공을 사랑하여 자주 칭찬하며 가로되, “적(적)은 기남자(奇男子)이다.” 라고 했다. 청하(淸河)는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아들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대광주국(重大匡柱國) 서원백(西原伯) 문극공(文克公) 오(오)니, 호는 설헌선생(雪軒先生)이다. 둘째는 대사간 포(誧)로 호가 설곡선생(雪軒先生)인 두 분이 모두 문집을 남겨 세상에 전한다. 설헌(雪軒)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소부정윤(少府正尹) 침(침)을 낳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설헌(雪軒) 시대부터 외가(外家) 별업(別業)을 받아서 마침내 안동 동면(東面)의 가구촌(佳邱村)으로 집을 옮겼다고 한다. 정윤(正尹)의 손자는 도관좌랑(都官佐郞) 약(若)이니 이분이 바로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보문(普文)을 낳았는데, 덕을 숨기었다가 처음 전조(前朝)에 벼슬하여 진전직(眞殿直)이 되었다가 아조(我朝)가 개국하자 벼슬하지 않았다. 사직(司直) 인로(仁老)를 낳았다. 인망이 한 고을에 드높았다.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윤소(允韶)를 낳았다. 직장(直長)은 예천사직 권량(權良)의 딸에게 장가갔다. 성화(成化) 정유년48)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청명순후(淸明純厚) 하였다. 스무살도 채않되어서 이미 노성(老成)하였고 기도(器度)가 향방(鄕邦)에서 추중(推重)을 받았다. 성장하자 힘써 배우고 덕에 나아갔다. 풍의(風儀)가 크고 빼어났으며, 수염이 그림과 같았다. 평생토록 성난 말이나 성급한 기색이 없었으며, 일찍이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다.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여 규각(圭角)49)을 드러내지 않아 그 당시 사람들이 ‘안자(顔子)’라고 칭하였다. 젊어서부터 서, 필, 화(書筆畵)를 좋아하여 묘한 경지에 도달 하였다. 일찍이 조용한 방에서 책을 보며 글자 쓰기를 조금도 그만두지 않았다. 과거업(科擧業)과 벼슬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버이가 집에 계셨기 때문에 정덕(正德) 무인년에 진사시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했다. 겨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해 상중(喪中)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을 상하게 하여 경신년 6월 병으로 죽었다. 향년 마흔 넷이었다. 해조(該曺)에서 예대로 계(啓)를 올려 증진사패(贈進士牌)가 내려졌다. 그의 덕과 풍(風)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모두가 통석(痛惜)하게 생각했다. 공은 진성(眞城) 이철손(李哲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 분이 퇴계 이선생의 재종매(再從妹)이다. 집안을 엄격히 다스려 법도가 있었으니 비복(婢僕)들이 반드시 이른 새벽에 빗질하고 세수하여 뜨락에서 인사하도록 했으며 제사를 신중히 하였는데,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괄(栝)은 후손이 없고 차남 삼(槮), 삼남 우(우)는 모두 오래 살지 못하여 이씨보다 먼저 죽었다. 사남은 두(枓)이니 이 분이 사신(士信)의 선고부군(先考府君)이다. 조고(祖考) 진사공(進士公)이 죽고 난 뒤에 조비(祖妣) 이씨가 과부로서 우환(憂患)이 있어 가업(家業)이 영락해졌다. 선고(先考)가 장성한 뒤로 스스로 힘써 집안 다스릴 줄 알았다. 좌우에서 어머니를 받들어 모셔 성효(誠孝)를 능히 다였다. 조비(祖妣)가 비로서 가난함을 잊게 되었고 구업(舊業)이 다시 진흥되었다. 가정 기유년50)에 조비 이씨가 병으로 죽었다. 선고(先考)가 괄(栝)의 계후자(繼後子) 희원(希元)과 함께 상례를 집행하고 묘지를 지키기를 3년동안 하였다. 융경(隆慶) 임신년51)에 묘갈을 세웠다.”

참봉(參奉) 권서(權黍)의 묘
부의 서쪽, 마감(麻甘) 동쪽에 있으니 신향(申向)이다. 부인 김씨와 합장한 뒤로 쌍분동(雙墳洞)이라 불렀다.

현감(縣監) 신용보(申用甫)의 묘
풍산현 북쪽 직곡산(稷谷山)에 있다.

감사(監司) 증풍산부원군(贈豊山府院君) 류중영(柳仲郢)의 묘
부의 서쪽, 능동(陵洞), 권옹(權雍)의 묘 남쪽에 있다.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와 합장하였다. 아들 영의정(領議政) 성룡(成龍)이 갈음(碣陰)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선고(先考)가 처음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을 때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다. 갑신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ㆍ이조판서(吏曹判書) ㆍ겸지경연춘추관성균진사(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ㆍ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더해졌고, 경인년에는 또 지금의 작위에 추증되었다. 그뒤 12년이 지난 신축년에 선비(先妣)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돌아가셨다. 이 해에 선고(先考)의 묘에 합장하였다. 그 이듬해 겨울 묘석(墓石)을 바꾸어 개각(改刻)하였다. 추증된 질ㆍ관ㆍ봉(秩官封)을 새기게 되자. 이에 선비(先妣)의 세계(世系)와 제손(諸孫)들 중 비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아울러 뒷면에 새겼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비(先妣) 김씨는 그 선대가 안동인으로 계통은 신라국성(新羅國姓)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상락군(上洛君) 방경(方慶)은 훈업(勳業)으로 더욱 저명했었다. 고조(高祖)는 감목관(監牧官) 자섬(子贍)인데 안동으로부터 의성(義城)으로 이거(移居) 하였다. 증조는 사직(司直) 효온(孝溫)이요, 조(祖)는 현감(縣監) 극해(克諧)이다. 고(考)는 휘가 광수(光수)인데 시에 능하여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고요함을 좋아하여 벼슬하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늙었다. 순천장씨(順天張氏)에게 장가갔다. 밀직부사(密直副使) 홍(弘)이 그 선조(先祖)이고 첨정(僉正) 일신(日新)이 그 고(考)이다. 정덕(正德) 임신년52)에 태어났다. 선비(先妣)는 스무살에 우리 선고에게 시집왔다. 선고가 통정(通政)이 되고 관찰사가 되었기 때문에 숙부인(淑夫人)에서 정부인(貞夫人)으로 사호(賜號)가 승격되었다. 선고가 일품(一品)으로 추증되자 정경(貞敬) 두자 호가 더해졌다. 향년은 90이다. 선비는 천성이 겸손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시종여일하게 지녔다. 평생동안 복리(福履)를 누린 것이 훌륭했던 것을, 사람들은 ‘선보(善報)’라고 여겼다고 한다. 아들 운룡(雲龍)은 원주목사(原州牧使)가 되었고, 성룡(成龍)은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策錄) 되었으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사위는 이윤슈(李潤壽)인데 벼슬이 없고, 김종무(金宗武)는 찰방(察訪)이 되었다. 정호인(鄭好仁)은 군수였다. 손자 주(주)는 찰방(察訪)이고, 기(裿)는 현감, 심(襑)ㆍ여(여)ㆍ단(褍)ㆍ진(袗)은 업유(業儒)이다. 서손(庶孫)으로 집(鏶)ㆍ표(杓)ㆍ첨(襜)이 있다. 손녀 사위는 대사간 김홍미(金弘微)ㆍ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노경임(盧景任)ㆍ별좌(別座) 이문영(李文英)ㆍ주부(主簿) 조직(趙稷)이다. 외손(外孫)은 이돈(李焞)ㆍ찬(燦)ㆍ형(형)ㆍ환(煥)과 金공(김공)이다. 외손서(外孫壻)로 정윤목(鄭允穆)ㆍ김광실(金光實)ㆍ김철(金澈)ㆍ전뢰(全磊)ㆍ남원립(南元立)ㆍ윤상민(尹商敏)등은 모두 사인(士人)이다. 주(株)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원직(元直)이다. 기(裿)는 4남 2녀를 두었고, 심(襑)은 1남 3녀를 두었으며 여(여)는 아들 하나 단(褍) 딸 하나, 진(袗)을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사직(司直) 권구서(權九叙)의 묘
부의 북쪽, 서돈촌(西頓村), 진봉산(振鳳山)에 있는데 병향(丙向)이다. 처의 의인(宜人) 권씨와 합장되어 있다. 처인 의인 권씨와 합장되어 있다. 단갈(短碣)이다.

통정(通政) 권윤변(權胤卞)의 묘
부의 북쪽 서돈촌(西頓村), 봉서암(鳳棲庵) 뒤에 있다. 병향(丙向)53)이다. 처 이씨ㆍ여씨(余氏)와 합장되어 있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8. 영가지 권8 > 1) 총묘(塚墓)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B006&sMok_Nmbr=127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6&sMok_Nmbr=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