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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지 군7] 인물(人物) -이종준(李宗準), 금의(琴椅), 정유일(鄭惟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7. 22:48

영가지 권7


2) 인물(人物)

이종준(李宗準)
자(字)는 중균(仲均)이요, 호는 용재(慵齋)이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손자이다. 점필재(佔畢齋)41)의 문인으로 문장에 능했으며 서화(書畵)도 잘 했다. 척당(倜儻)42)하여 큰 절조가 있었다. 성종(成宗)43) 을사(乙巳)년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44)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역(驛)의 관사(館舍)에 그림 병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고, 붓으로 거의 다 보이지 않도록 뭉게 버렸다. 역의 관리가 통사(通使)를 불러 괴이(怪異)하다고 여겨 따져 물었다. 통사가 가로되, “서장관은 서화에 능하니 반드시 그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함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오.”하니, 역의 관리가 이를 깨닫고 수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이르렀는데, 새롭게 단장한 흰 병풍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공이 하나에는 글씨를 쓰고, 다른 하나에는 그림을 그렸다. 모두가 그 공묘(工妙)함을 이루었으니, 보는 사람들이 탄상(嘆賞)하였다. 무오(戊午)년에 북계(北界)로 귀양을 갔다. 도중에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갔는데, “이사중(李師中)은 외로운 충성으로 자허(自許)했건만, 무리들은 이를 허여(許與)하지 않았다네.”라는 율시 한 수(首)를 벽 위에 썼다. 감사(監司)가 이 사실을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이 자기를 원망하는 뜻이 있다 하고 국문(鞠問)하다가 그를 죽였다. 홍귀달(洪貴達)45)이 그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무오당적전(戊午黨籍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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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점필재(佔畢齋) : ‘김종직’의 호. 조선 세조 때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계온, 효관, 호는 점필재이며 세종 28년 과거에 응시, <백룡부>를 지어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하였지만 단종 1년 태학에 들어가 <주역>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해 동료들의 경복을 받고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상관에 임명됐으며 이후 두루 벼슬길에 올랐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과 함께 사림파를 형성해 훈구파와 대립했다. 연산군 4년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의 내용이 문제가 돼 부관참시 당했다. 이 사건이 무오사화로 이어져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42) 척당(倜儻) : 재능이 있고 훌륭한 것.
43) 성종(成宗) : 조선 제 9대 왕. 제위: 1469년∼1494년
44) 서장관(書狀官) : 조선시대 부경사행(赴京使行) 3사신(三使臣) 가운데 한 사행직.
45) 홍귀달(洪貴達) : 1438(세종 20)∼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사재감정 홍순(洪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득우(洪得禹)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 홍효손(洪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금 의(琴 椅)
내성현(柰城縣) 호평리(虎坪里)에 살았다. 자(字)는 중재(仲材)이다. 계유(癸酉)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기묘(己卯)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퇴도선생(退陶先生)이 지은 갈명(碣銘)에 가로되,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고, 정치를 함에 그 요령을 터득하여 간요(簡要)함에 힘썼다.”고 했다.
*진사(進士)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사위[壻]

정유일(鄭惟一)
자는 자중(子中)이요, 호는 문봉(文峯)이다. 내성현 탑평리(塔坪里)에 살았으며 퇴도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가정 임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오년에 급제하여 대각(臺閣)57)을 두루 거쳤다. 이량(李樑)의 아들 정빈(庭薲)이 급제하였는데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온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인사함이 남보다 늦을까 걱정하여 분주하였는데, 공(公)은 정언(正言)으로서 탑전(榻前)에 홀로 앉아 의연(毅然)하게 동요하지 않았으니 이를 보고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진사(進士)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외손(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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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대각(臺閣) : [역사]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통틀어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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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행(權 幸)
본성은 김(金)씨로 신라의 대성(大姓) 이었다. 신라 말기에 고창군수(古昌郡守)로 있었다. 그 때에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하여 신라왕을 시해(弑害)하였는데, 행(幸)이 대중들과 도모하여 말하기를, “견훤은 의리(義理)로 보아 불공대천(不共戴天)1)의 원수이다. 어찌 왕공(王公)에게 귀부(歸附)하여 우리의 수치를 씻지 아니 하겠는가?”하고 마침내 투항하였다. 고려 태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행(幸)은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2) 통달하였다”하고 권(權)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안동군(安東郡)을 승격하여 부(府)로 삼았고 공(公)을 태사삼중대광아부공신 (太師三重大匡 亞父功臣)으로 임명하였다. 승람(勝覽).

김선평(金宣平)
신라 말기에 고창성주(古昌城主)로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격파하였다.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아부공신(三韓璧上三重大匡太師亞父功臣)으로 공신록에 올랐다. 그의 사적이 퇴계선생이 찬한 기문(記文)에 실려있다.

장 길(張 吉)
신라 경순왕(敬順王) 4년, 김선평ㆍ권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쳐서 크게 이겼다. 태조가 대상관삼중대광아부공신(大相官三重大匡亞父功臣)을 삼았다.

김부민(金富民)
인종조(仁宗朝)에 합문지후(閤門祗侯)3)로부터 나와서 경원군지사(慶源郡 知事)가 되었다. 정사(政事)를 함에 청렴하고 근면함을 숭상하였다. 여러번 벼슬이 옮겨져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딸을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인아(姻婭)4)사이라고 해서 이자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척준경(拓俊京)과 더불어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해 일을 도모했다. 거사가 성공하자 끝까지 자기의 공을 말하지 아니했다. 나중에 검교사도지문하성사(檢校司徒知門下省事)5)가 되었다.

김 창(金 敞)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희종조(熙宗朝)에6) 급제하여 벼슬이 태사문하시랑 판리 부사(太師門下侍郞判吏部事)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문간(門簡)이다.

김시언(金時彦)
일직현(一直縣) 사람이다.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뽑혀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렀다. 나이 일흔이 되자 국자제주(國子祭酒)로7) 벼슬을 그만 두었다.

권수평(權守平)
외모가 풍미(豊美)하고 성품이 순후ㆍ질박ㆍ정직하여 옛사람의 풍모가 있었다. 고종조에 벼슬이 추밀부사(樞密副使)8)에 이르렀다.

권수홍(權守洪)
수평(守平)의 아우로 벼슬이 추밀사(樞密使)9)에 이르렀다.

권자여(權子與)
수홍(守洪)의 아들로 벼슬이 대장군(大將軍)10)에 이르렀다.

김효인(金孝印)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문장사업(文章事業)으로 한 시대에 뛰어났다.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여 벼슬은 병부상서ㆍ한림학사지제고(兵部尙書翰林學士知製誥)에 이르렀다.

김방경(金方慶)
효인(孝印)의 아들이다. 처음에 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구름과 노을을 먹는 꿈을 꾸었다.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구름의 기운이 항시 내 입과 코에 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 세계에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아이가 태어남에 조금이라도 성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네거리에서 들어누워 울어대었다. 그런데도 소나 말이 그를 위해서 피해가자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고종조에 비로소 벼슬하였는데, 진도(珍島)ㆍ 탐라(耽羅)ㆍ일본(日本) 등지를 정벌하여 모두 공을 세웠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11)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충직(忠直)하고 신후(信厚)하였으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말수가 적었다. 도량이 넓고 커서 자잘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사건을 훌륭히 판결하였다. 자신의 몸을 빈틈없이 돌보고 생활을 근검(勤儉)하게 하였다. 늙었어도 머리카락이 희어지지 않았고 기골(氣骨)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치사(致仕) 후에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집안 걱정하듯 나라를 걱정하였다. 나라에서 크게 의론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나이 여든 아홉에 유연히 세상을 떠나갔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 흔(金 忻)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음보(蔭補)12)로 책정도감판관(冊定都監判官)에 임명되었다가 세 번 영전하여 장군(將軍)13)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서 탐라(耽羅)를 쳐서 승리를 거두자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또 일본(日本) 정벌에 종군하여 공이 있게 되자 곧 이어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에 까지 으르렀으며, 그 위에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더해졌고, 상락공(上洛公)으로 아버지를 계승하여 봉해 졌다.

김 순(金 恂)
방경의 아들이다. 충렬조(忠烈朝)14)에 장원급제했다. 방경이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에 순(恂)이 몰래 배를 타고 쫓았다. 돌아와 전중(殿中)에 임명되었고, 벼슬이 삼중대광상락군(三重大匡上洛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김영돈(金永旽)
순(恂)의 아들이다. 충렬조에 급제하였다. 조적(曹적)의 난(亂)에 왕을 시종(侍從)하여 공로가 있어 일등(一等) 공신으로 기록되었고 추성병의익찬공신 (推誠秉義翊贊功臣)의 이름이 내려졌으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충목왕(忠穆王)15) 때에 와서 좌정승(左政丞)에 임명 되었다.

김영후(金永煦)
순(恂)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숙하고 굳세었으며 침착하고 신중하였다. 친구들 중에서 궁핍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으면 돌봐주지 않음이 없었다. 충혜왕(忠惠王)이16) 원(元)나라에 잡혀갈 때, 모든 관리들이 전부 달아나 숨었으나, 영후만이 홀로 왕을 호위(護衛)해 가다가 창에 찔렸다. 그의 손자 사형(士衡)ㆍ사안(士安)의 나이가 모두 스무살을 넘자 어떤 사람이 영후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들에게 벼슬을 구해주지 않는가?”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자제(子弟)들이 정말 어질다면, 국가가 스스로 등용할 것이요, 그들이 어질지 못하다면 비록 벼슬을 얻는다 해도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김 이(金 怡)
춘양현(春陽縣) 사람이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하늘이 찬란하게 붉어지며 둥근 태양이 붉은 햇무리를 띠고서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나서 임신하였다. 이(怡)가 태어남에 얼굴이 크고 의젖하였다. 일찍이 큰 뜻을 품었더니, 여러 벼슬을 거쳐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이 때에 오잠(吳潛)ㆍ류청신(柳淸臣) 등이 우리 나라에 중국의 행성(行省)을 세우고 국호(國號)를 없앨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이(怡)는 최성지(崔誠之)ㆍ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원의 도당(都堂)17)에 글을 올려 행성을 세우는 것의 이해(利害)관계를 진술하였다. 그러자 도당에서 이들의 의견을 따랐다. 성품이 활달(豁達)하여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었다. 오래도록 충선왕(忠宣王)18)을 시종하여 호위의 공로가 있었으며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절개를 한결같이 했다.

권 보(權 溥)
너아 열 여덟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성품이 충효(忠孝)롭고 독서를 좋아했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도록 건의하였으니,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보(溥)로부터 창도되었다. 보와 아들ㆍ사위 여덟 사람이 모두 군(君)에 봉해졌으니, 세상에서 일가구봉군(一家九封君)이라고 불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왕 후(王 煦)
보(溥)의 아들이다. 처음의 성명은 권재(權載)였다. 충선왕이 원(元)에 있을 때 그를 불러 한번 보고 나서 아들로 삼고, 성명(姓名)을 내려주었다. 왕이 고려에 돌아와서 출입(出入)에 항시 함께 수레를 탔다. 충숙조(忠肅朝)19)에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으로 봉해졌다. 이 때 왕제(王弟)로 일컬어졌고, 원(元)나라에서도 계림군공(鷄林君公)을 제수하였다. 충선왕이 토번(土蕃)20) 땅으로 유배를 당하였는데, 그가 직접 임조(臨조)에 가서 왕을 뵙고 시종하였다가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충선왕이 죽자 최마복(최麻服)을21) 입고 영구(靈柩)를 모시어 고려로 돌아왔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도 매양 삭망(朔望)이 되면, 혼자 능(陵) 아래에서 올리기를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충목왕(忠穆王)22)이 죽자 정동성사(征東省事)를 섭정(攝政) 하였고 충정왕(忠定王)23) 때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길에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영구(靈柩)가 돌아오자 아전들이 영구를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부모와 같은 예로 제사를 지내주었다.

권 준(權 準)
보(溥)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대언(代言)에 뽑히었다. 벼슬이 밀직부사 (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시호는 창화(昌和)이다.

왕중귀(王重貴)
후(煦)의 아들로 벼슬이 좌대언(左代言)에 이르렀다.

권 렴(權 廉)
준(準)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삼사부사(三司副使)로 임명되었다. 벼슬이 첨의찬성(僉議贊成)에 이르렀다.

권 적(權 適)
충혜왕(忠惠王) 때에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원정(原靖)이다.

김구용(金九容)
방경(方慶)의 증손자로 상락군(上洛君) 앙(昻)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에 이르렀다. 후학(後學)들을 진학(進學) 하도록 면려(勉勵) 하였고 그들을 훈도(訓導)하고 깨우쳐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록 휴가를 얻어 집에 있을 때라도 제생(諸生)으로 질문하러 오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우왕(禑王)24) 때에 이인임(李仁任)25)이 북원(北元)의 사신(使臣)을 맞고자 하니 구용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물리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도당에서 이들의 뜻을 쫓지 아니하였다. 곧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되어서 여흥(驪興)으로 배소(配所)가 옮겨졌다.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즐기며 붙잡혀서 경사(京師)로 돌아 왔으나 대리위(大理衛)로 유배되어 게양현(揭陽縣)에서 병으로 죽었다.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김제안(金齊顔)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공민조(恭愍朝)26)에 급제하였다. 군부좌랑 (軍簿佐郞)으로서 전록생(田祿生)27)을 따라 하남왕(河南王)인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에게 사신으로 가다가 연경(燕京)에 이르자 황태자(皇太子)가 그와 통신(通信)하는 것을 미워하여 길을 막았다. 녹생(祿生)은 바로 고려로 돌아갔으나, 제안(齊顔)은 홀로 연경에 남아 있다가 끝내 국서(國書)를 하남왕에게 전달하였다. 뒤에 신돈(辛旽)28)을 주살(誅殺)하려고 도모했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했다.

김구덕(金九德)
제안(齊顔)의 아우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이 숭정판돈령부사(崇政判敦寧 府事)에 올랐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여러번 이름난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떠난 뒤에는 고을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손홍량(孫洪亮)
일직현(一直縣) 사람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친히 그의 초상을 그려 하사하였다. 지금까지도 부(府)의 임하사(臨河寺)에 남아 있다. 아들 득수(得壽)는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홍지경(洪之慶)
풍산현(豊山縣) 신성포(申城浦)에 살았다. 향공(鄕貢)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국학직학(國學直學)에 이르렀다.

권 화(權 和)
우왕 때에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홍 간(洪 侃)
지경(之慶)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에 이르렀다. 뒤에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관사(官舍)에서 죽었다. 시(詩)로써 세상에 유명하다.

김사형(金士衡)
영후(永煦)의 손자이다. 우왕 때에 조준(趙浚)29) 등과 함께 대간(臺諫)으로 있었다. 그 때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일컬어졌다. 벼슬이 삼사사(三司事)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조(太祖朝)에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권 근(權 近)
보(溥)의 증손자이다.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더니 공민조(恭愍朝)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두루 지내고 나서 밀직(密直)이 되었다. 일찍이 사건에 관계되어 충주(忠州) 양촌(陽村)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태조가 계룡산(鷄龍山)에 행차하였다가 행재소(行在所)30)로 오도록 불러서 정릉비문(定陵碑文)31)을 짓도록 명하고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에 임명하였다. 좌명공신(左命功臣)32)의 반열에 올랐으며,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양촌집(陽村集)ㆍ입학도설(入學圖說)ㆍ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 있는데 예경(禮經)을 고정(考定)한 것은 그 중에서도 더욱 공로가 있다. 자호(自號)하여 양촌(陽村)이라 했다.

권 우(權 遇)
근(近)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제학(藝文提學)에 이르렀다. 자호(自號)는 매헌(梅軒)으로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심구령(沈龜齡)
우리 태조조에 무예(武藝)로써 뛰어나 좌명공신(左命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벼슬은 동지흥의삼군부사(同知興義三軍府使)에 이르렀고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권 담(權 湛)
보(溥)의 증손자로 급제하여 벼슬이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이르렀다. 괴정집(傀亭集)이 있다.

권 제(權 踶)
근(近)의 아들이다. 태종조(太宗朝)33)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문병(文炳)을 맡았었다. 시호는 문경 (文景)으로 지재집(止齋集)이 있다.

권 채(權 採)
우(遇)의 아들로 급제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다. 벼슬은 승정원좌승지 (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다.

심 보(沈 寶)
구령(龜齡)의 아들로 벼슬이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에 이르렀다.

심 치(沈 寘)
보(寶)의 아우로 벼슬이 가선(嘉善)으로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뒤에 정헌(正憲)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추증되었고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다.

권 람(權 擥)
제(踶)의 아들이다. 어려서 큰 뜻이 있었고 독서를 좋아하였다. 문종조(文宗朝)에 삼장(三場)의 과거시험에 연이어 급제하였다. 세조(世祖)가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에 비밀히 큰 계책으로 도왔고 두번이나 공신이 되었다.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세조묘정(世祖廟廷)에 배향되었다.

권 반(權 攀)
람(覽)의 아우로 을묘(乙卯)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 졌다.

김익정(金益精)
태종조(太宗朝)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 돈(金 墩)
방경(方慶)의 후예로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세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에, 그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돈이 사양하였다. 급제하여 합격증서를 받게 되었을 때 세종이 불러 보고 위로하며 타일러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만나 보고자 했으나, 그대가 문득 나를 피했지만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도다.”하고 그를 뽑아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게 하여 항상 경연(經筵)34)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돈의 어머니가 강진(康津)에 있었기에 여러번 외직(外職)에 나가기를 요구하였다. 왕이 특별히 역마(驛馬)를 하사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와서 효도하며 봉양(奉養)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사림(士林)에서 이를 영광으로 여기었다. 돈은 의상(儀象)35)에 정통하여 임금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에 김조(金銚)36)와 함께 그 일에 참여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은지 7년이 되자 병이 들었다. 벼슬이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올랐으나, 얼마 안되어 죽었다.

권극화(權克和)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김수령(金壽寧)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18세에 계유년(癸酉年)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좌리공신(佐理功臣)의 반열에 올랐고 벼슬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으며,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을 올렸다.

김 작(金 碏)
방경(方慶)의 후예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序)에 이르렀다.

권 감(權 감)
극화(克和)의 아들이다.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의 반열에 올랐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김 유(金 紐)
갑신(甲申)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중시(重試)와 등준(登俊) 두 과거에 뽑히었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었다. 시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율(音律)에도 밝았다.

권 정(權 侹)
급제하여 벼슬이 영안도(永安道)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권 전(權 專)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으며, 현덕왕후(顯德王后)37)를 낳았다.

권 건(權 健)
람(擥)의 아들이다. 젊어서 급제하였다. 단정하고 신중하며 풍치가 있고 아담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다.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민(忠民)이다.

심 응(沈 膺)
치(寘)의 아들이다. 적개공신(敵愾功臣)38)의 반열에 올랐고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다.

권 주(權 柱)
자(字)는 지경(支卿)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곧고 절조가 있었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공묘(工妙)하였다. 일찍이 사신으로 대마도(對馬島)에 갔다. 연산조(燕山朝)에 죄없이 사사(賜死)되었다. 뒤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추증되었다.

권경우(權景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김수동(金壽童)
사형(士衡)의 후예이다. 단정하고 신중하였으며 온화하고 아담하였다. 일찍이 급제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39)의 반열에 올랐고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권민수(權敏手)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권달수(權達手)
민수(敏手)의 아우이다.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에 사화(史禍)에 빠져 살해되었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권 홍(權 弘)
거듭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권 균(權 鈞)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김희수(金希壽)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자리를 두루 거쳤다. 해서(楷書)를 잘 썼고 벼슬은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권사복(權思復)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사(吏曹判事)에 이르렀으며, 복성군(福城君)에 봉해졌다. 부성(府城) 동문(東門)안에 거주하다가 만년에는 부성 남쪽 개곡촌(皆谷村)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고을의 이름을 계곡(溪谷)으로 고쳤다. 방안시(放ㆍ詩)가 있으니 청구풍아(靑丘風雅)40)에 실려 있다.

하늘을 오히려 제멋대로 날 수 있건만,
벼논을 어찌하여 위태롭게 밟고 있느냐
이제부터 아득히 먼 곳으로 향하여 떠나가서
몸을 온전히 할 뿐 살찌기를 구하지 말라.

당시에 이 시를 가지고서 봉록(俸祿)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자호(自號)는 신촌(愼村)이요, 시집(詩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김영유(金永濡)
상촌(桑村) 자수(自粹)의 손자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지사(知事)에 이르렀다.

권 인(權 靷)
행(幸)의 15대손이다. 객시사(客侍事)를 맡았다가 벼슬을 그만 두었다. 세진(世珍)의 아들로 청백리(淸白吏)에 뽑히었다. 벼슬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부(府)의 서쪽 소야촌(所夜村)에서 살았다.

류종혜(柳從惠)
처음엔 풍산현(豊山縣) 안에 살다가 뒤에 화산(花山) 하회촌(下回村)에 터를 잡아 집을 지어 그 곳에서 늙었다. 벼슬은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권 진(權 軫)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부내(府內)에 살다가 만년에 풍산현(豊山縣) 상리(上里)에 터를 잡고 살았다.

권집경(權執經)
급제하여 벼슬이 가선(嘉善)으로서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풍산현 구담촌(九潭村)에 살았다.

배 소(裴 素)
전서(典書) 상공(尙恭)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전서묘비(典書墓碑)에 공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우뚝하게 일찍이 학문을 이루어 풍도(風度)가 호탈(皓脫)하였다.”고 했다. 계속해서 하회촌(下回村)에 살았다.

권 숙(權 肅)
왕후(王煦)의 손자이다. 비로서 권씨의 성을 회복하여 벼슬이 부윤(府尹)에 이르렀다.

홍 연(洪 演)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寶文閣)에 이르렀다. 풍산현 신성포(申城浦)에 살았다.

정 침(鄭 賝)
설헌(雪軒) 오(䫨)의 아들이다. 벼슬은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소부정윤 (少府正尹)에 이르렀다. 송경(松京)으로부터 와서 부(府)의 동편 지내동(池內洞)에 살았다.

배 권(裴 權)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상지(尙志)의 아들이다. 음사(蔭仕)로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부(府)의 서편 금계촌(金溪村)에 살았다.

배 환(裴 桓)
권(權)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배 강(裴 杠)
환(桓)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배효숭(裴孝崇)
환(桓)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여흥부사(餘興府使)에 이르렀다.

남우량(南佑良)
전리판서(典理判書) 휘주(輝珠)의 손자이다. 일찍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가선(嘉善) 판도호회령부사(判都護會寧府事)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서간촌(西澗村)에 살았다.

이종준(李宗準)
자(字)는 중균(仲均)이요, 호는 용재(慵齋)이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손자이다. 점필재(佔畢齋)41)의 문인으로 문장에 능했으며 서화(書畵)도 잘 했다. 척당(倜儻)42)하여 큰 절조가 있었다. 성종(成宗)43) 을사(乙巳)년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44)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역(驛)의 관사(館舍)에 그림 병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고, 붓으로 거의 다 보이지 않도록 뭉게 버렸다. 역의 관리가 통사(通使)를 불러 괴이(怪異)하다고 여겨 따져 물었다. 통사가 가로되, “서장관은 서화에 능하니 반드시 그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함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오.”하니, 역의 관리가 이를 깨닫고 수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이르렀는데, 새롭게 단장한 흰 병풍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공이 하나에는 글씨를 쓰고, 다른 하나에는 그림을 그렸다. 모두가 그 공묘(工妙)함을 이루었으니, 보는 사람들이 탄상(嘆賞)하였다. 무오(戊午)년에 북계(北界)로 귀양을 갔다. 도중에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갔는데, “이사중(李師中)은 외로운 충성으로 자허(自許)했건만, 무리들은 이를 허여(許與)하지 않았다네.”라는 율시 한 수(首)를 벽 위에 썼다. 감사(監司)가 이 사실을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이 자기를 원망하는 뜻이 있다 하고 국문(鞠問)하다가 그를 죽였다. 홍귀달(洪貴達)45)이 그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무오당적전(戊午黨籍傳)에 나온다.

권 징(權 徵)
부내(府內)에 살았다.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북평사(北評事)로써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전사(戰死)하였다. 죽음에 미쳐서 적삼을 끊어 혈지(血指)로 집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남아(男兒)의 일과 장부(丈夫)의 명(命)은 예부터 이와 같다.”고 하였다. 집의(執義)로 추증 되었다.

권 시(權 偲)
부내(府內)에 살았다. 급제하여 벼슬이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이 굉(李 汯)
현감(縣監) 증(增)의 아들이다. 개성유수(開城留守)로써 퇴로(退老)하여 귀래정(歸來亭)을 지었다. 아들 효칙(孝則)이 시로써 세상에 유명하다.

이 주(李 胄)
증(增)의 손자이다. 자(字)는 주지(胄之)로 문장에 능했고 기절(氣節)이 있었다. 성종(成宗) 무진(戊辰)년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의 벼슬을 받았다. 연산군(燕山君) 무오(戊午)년에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으로서 진도(珍島)로 귀양갔다가 나중에 죽임을 당했다. 망헌집(忘軒集)이 세상에 전한다.

이 려(李 膂)
주(胄)의 아우이다.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부내(府內)에서 살았으나 일찍 죽었다.

이 정(李 楨)
군기부정(軍器副正) 운후(云候)의 아들이다. 여러 대에 걸쳐 부(府)의 북쪽인 주촌(周村)에 살았다. 최윤덕(崔潤德)46)을 따라 북정(北征)에 참가한 공로가 있어 원종공신(原從功臣)47)을 하사 받았다. 벼슬이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이르렀고, 뒤에 증손인 판중추(判中樞) 황(滉)이 귀(貴)하게 되었기 때문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 고(李 股)
증(增)의 손자이다. 청풍군수(淸風郡守)로서 고향에 돌아와 본부(本府) 유향소(留鄕所) 좌수(座首)가 되었다. 품관(品官)과 좌목(座目)48)을 바로잡고, 향리삼단안(鄕吏三壇案)을 고정(考定)하였다. 지금도 이를 어기지 아니한다. 아들이 없었다. 지금 판서(判書) 서성(徐渻)은 바로 그의 외손자이다.

류양춘(柳陽春)
풍산현 서쪽 지곡촌(枝谷村)에 살았다. 급제하여 벼슬이 청송부사 (靑松府使)에 이르렀고 시로써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권 벽(權 擘)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의(梨棗參議)에 이르렀고, 시로써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권 예(權 輗)
자(字)가 경신(景信)으로 진사(進士) 철경(哲經)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였고 재주가 많았다. 반듯한 얼굴에 수염이 아름다웠다. 정덕(正德) 병자(丙子)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니 그 때의 나이가 스물 두 살이었다.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고, 금계촌(金溪村)에서 노후를 보냈다.

김계행(金係行)
풍산에 살았다.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였고 점필재와 벗으로 사귀었다.

김영수(金永銖)
한성판관(漢城判官) 계권(契券)의 아들이요, 제평공(齊平公) 권맹손(權孟孫)의 외손이다. 형제가 셋이 있었으니, 영전(永銓)은 현감(縣監), 영추(永錘)는 부사(府使)를 지냈고 공(公)은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위해 삼구정(三龜亭)을 동오(東吳)에 지어서 좋은 날에 놀이하는 장소로 삼았다. 사람됨이 괴위(魁偉)49)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성품이 정민(精敏)하여 관리(官吏)의 사무(事務)에도 달통(達通)하였다.

권 진(權 진)
주(柱)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기묘사화(己卯士禍)50)를 당해 사사(賜死)되었다.

김 영(金 瑛)
영수(永銖)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여주(驪州) 청심루(淸心樓)에 시가 남아 있다.

한번 안개와 노을 장벽사(莊璧寺)에서 걷히자
반 공중엔 푸르른 항룡산(抗龍山)이 나타나네.

그 당시에 이 싯구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51) 되었다.

권 벌(權 橃)
자(字)는 중허(仲虛)요, 호는 충재(冲齋)이다. 정덕(正德) 정묘(丁卯)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덕행(德行)이 순수하였고 학문은 위기(爲己)에 힘썼다. 본디 근사록(近思錄)을 좋아하여 품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일찍이 어원(御苑)에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임금이 가로되, “이것은 반드시 권벌이 떨어뜨렸을 것이다.”하고 명하여 돌려주도록 하였다. 무진(戊辰)년에 점필재를 신원(伸寃)52)하는 논계(論啓)를 올렸다. 기묘(己卯)년에 사화(士禍) 의 기미가 보이자 중간에서 조정하여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화를 피하였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술(戊戌)년에 종계(宗系)53)를 고치는 임무를 맡은 주청사(奏請使)로 북경(北京)에 가서 무고함을 변명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54)에, 힘써 선한 선비들을 구원하여 사직(社稷)을 붙들려고 하다가 삭주(朔州)로 귀양가 죽었다. 선조(宣祖)가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해 주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퇴계가 행장(行狀)을 지었고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금 의(琴 椅)
내성현(柰城縣) 호평리(虎坪里)에 살았다. 자(字)는 중재(仲材)이다. 계유(癸酉)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기묘(己卯)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퇴도선생(退陶先生)이 지은 갈명(碣銘)에 가로되,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고, 정치를 함에 그 요령을 터득하여 간요(簡要)함에 힘썼다.”고 했다.

김양진(金楊震)
풍산현 오미동(五美洞)에 살았다. 기유(己酉)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정사(丁巳)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호(號)는 허백당(虛白堂)이다.

류공권(柳公權)
일직현 구미촌(龜尾村)에 살았다. 가정(嘉靖)55) 기묘(己卯)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자(戊子)년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갔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뒤에 아들 경심(景深)이 귀하게 되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부인 남씨(南氏)는 열부(烈婦)에 이르렀다. 저서(著書)가 남아 있다.

이복로(李福老)
일직현 구미촌(龜尾村)에 살았다. 자(字)는 백순(百順)이요, 호는 쌍봉(雙峯)이다. 청렴ㆍ 검소한 것으로써 자신의 몸을 닦고, 학문에 힘써 지식을 넓혔다. 홍치(弘治) 을묘(乙卯)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계유(癸酉)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저서(著書)가 남아 있다.

권 찬(權 纘)
민수(敏手)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 되었다.

권 철(權 轍)
제(踶)의 5대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4조(四朝)를 두루 섬겼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장문보(張文輔)
자는 백훈(伯勳)이요, 일직현 구미촌에 살았다. 가정(嘉靖) 병오(丙午)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진주목사(晋州牧使)에 이르렀다.

류경심(柳景深)
공권(公權)의 아들이다. 계속해서 구미촌에 살았다. 자는 태호(太浩)이다. 가정(嘉靖) 정유(丁酉)년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였고, 갑진(甲辰)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오(丙午)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벼슬은 대사헌ㆍ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문무(文武)에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윤원형(尹元衡)을 미워하여 회령(會寧)ㆍ 종성(鍾城)의 부사(府使)와 남북(南北)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나중에 평안도(平安道) 관찰사로 마쳤다.

류중영(柳仲郢)
은사(恩賜)로 급제한 백(柏)의 후예이다. 풍산현 하회촌(下回村)에 살았다. 자는 언우(彦遇)이다. 뜻을 닦아 독서하여 급제하였다. 벼슬은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들 성룡(成龍)이 귀하게 되자 영의정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변영청(邊永淸)
안열(安烈)의 후예이다. 자는 개백(開伯)이다. 가정(嘉靖) 병오(丙午)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기유(己酉)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다. 주군(州郡)의 수령을 많이 역임하였는데, 있었던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부(府)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에 살았다.

구봉령(具鳳齡)
능성(綾城) 사람이다. 부의 동쪽 지내동(池內洞)에 살았다. 삼한삼중대광검교대장군(三韓三重大匡檢校大將軍) 존유(存裕)의 후예이다. 자는 경서(景瑞)이다. 퇴도(退陶)의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다. 가정(嘉靖) 병오(丙午)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신(庚申)년 별시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공은 아름다운 재주가 걸출하였고, 기상이 웅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요순시대 인물이요 한송시대 문장이라”고 말하였다. 교촌(蓼村) 여울위 백연(栢淵)옆에 정사를 짓고 그에 따라 백담을 호로 삼았다. 문집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정 탁(鄭 琢)
자(字)는 자정(子精)이요, 호는 약포(藥圃)이다. 청주의 이름난 성씨인 의(의)의 후예이다. 부의 동쪽 지내동에 살았다. 젊어서 고아가 되었으나 뜻을 돈독히 가졌다. 퇴도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가정 임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을 두루 거치고 나서 좌의정(左議政) 서원군(西原君)으로써 벼슬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극일(金克一)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의 후예이다. 판서(判書)로 추증된 진(璡)의 맏아들로 임하현(臨河縣) 천전리(川前里)에 살았다. 자는 백순(伯純)이다. 가정 병오(丙午)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이르렀다. 치적이 다섯 고을에 나타났다. 기국(器局)56)이 높고 컸으며, 기위척당(奇偉倜儻)하였다. 시로써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호는 약봉(藥峯)으로 퇴도(退陶)의 문인이다.

김팔원(金八元)
임영(臨瀛) 사람이다. 자는 순거(舜擧)인데, 최초의 자는 수경(秀卿)이었다. 부의 북쪽 주촌(周村)에 살았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도리를 지켰고 학문에 힘써 경서(經書)에 밝았으며,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일찍 퇴도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가정 을묘년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용궁현감(龍宮縣監)에 이르렀다. 일찍 죽었으니 호는 지산(芝山)이다.

김 집(金 緝)
효자(孝子)인 시좌(時佐)의 아들로 자는 경인(景引)이다. 무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양산군수(梁山郡守)에 이르렀다. 만년에 부의 서쪽 수동촌(水東村)으로 이사해 살았다. 사람됨이 관후(寬厚)하여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권호문(權好文)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으로 부의 서쪽 송파촌(松坡村)에 살았으며 퇴도의 문인이다. 신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시묘살이를 3년 했는데,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다. 거상잡의(居喪雜儀)를 한결같이 선생에게 물어서 행하였다. 이로부터 과거를 그만두고 한가로이 지내면서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집의 남쪽에 산이 있었는데, “송암(松巖)”이라고 했다. 그 바위 밑을 뚫어 몇 칸의 집을 얽고서 “한서(寒栖)”라 했다. 만년에 청성산(靑城山) 아래 낙수(洛水) 위에 집을 짓고, 헌(軒)을 “연어(鳶魚)”, 재(齋)를 “무민(无憫)”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종로(終老)하려는 뜻이 있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선생이 일찍이 그에게 허여(許與)하여 가로되, “소쇄(簫酒)한 산림(山林)의 기풍이 있다.”고 했다.

정유일(鄭惟一)
자는 자중(子中)이요, 호는 문봉(文峯)이다. 내성현 탑평리(塔坪里)에 살았으며 퇴도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가정 임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오년에 급제하여 대각(臺閣)57)을 두루 거쳤다. 이량(李樑)의 아들 정빈(庭薲)이 급제하였는데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온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인사함이 남보다 늦을까 걱정하여 분주하였는데, 공(公)은 정언(正言)으로서 탑전(榻前)에 홀로 앉아 의연(毅然)하게 동요하지 않았으니 이를 보고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배삼익(裵三益)
권(權)의 6대손이다. 자는 여우(汝友)로 퇴도의 문인이다. 임하현 도목촌(挑木村)에 살았다. 가정 무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갑자년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에서 두루 이름을 날렸다. 풍모와 의지가 준엄(竣嚴)하였고 벼슬은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호는 임연(臨淵)이다.

김성일(金誠一)
진(璡)의 아들이다. 자는 사순(士純)이요, 호는 학봉(鶴峯)이다. 퇴도를 스승으로 섬겨 심학(心學)의 요체를 듣고서 뜻을 굳건히 하고 고심으로 파고들어 정심(精深)한 경지를 이루었다.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사신으로 일본에 갔는데 예법(禮法)으로 행동하여, 일본 사람들이 경복(敬服)하였다. 임진란(壬辰亂)에 본도(本道)에서 초유(招諭)하라는 명령을 받고 충의(忠義)로 감동시켜 의병들이 다투어 모이게 되자 강 오른편 일대(一帶)가 그에 힘입어 입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군중(軍中)에서 죽었는데, 사민(士民)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조문(吊問)하였다.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권극례(權克禮)
참의(參議) 박(博)의 손자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권극지(權克智)
극례(克禮)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류운룡(柳雲龍)
자는 응현(應見)이고 호는 겸암(謙菴)이다. 중영(仲郢)의 아들로 제일 먼저 퇴도의 문하에 들어가 일시(一時)에 제자(諸子)들을 창도(唱導)하였다. 천사(薦仕)로 벼슬이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이르렀다. 인동(仁同)에 원님으로 있을 때, 길선생(吉先生) 58)의 묘를 보수하고 서원을 세워 제사지냈다. 또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웠다.

류성룡(柳成龍)
자가 이현(而見)으로 운룡(雲龍)의 아우이다. 태어나면서 밝고 순수하였다. 성장해서는 일찍 퇴도의 문하에 들어가 경서(經書)를 강명(講明)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여 연원(淵源)의 정맥(正脈)을 얻어 전하였다. 가정 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인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임진란에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국가의 대업(大業)을 경영함에 당시에 제일인자였다. 사림들이 숭앙하기를 마치 태산(泰山)ㆍ북두(北斗)와 같이 여겼다.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요, 호는 서애(西厓)인데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김의정(金義貞)
양진(楊震)의 아들로 자는 공직(公直)이다.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병술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수찬(弘文修撰)에 이르렀다.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일세(一世)에 존경을 받았다.

권 율(權 慄)
철(轍)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만력(萬曆)59) 계사년에 전라감사(全羅監司)로써 군사를 이끌고 임금을 호위하였다. 군사를 행주(幸州)에 주둔시켰는데, 그 때에 경성(京城)에 남아 있던 적(賊) 4만명이 뜻하지 않게 나타나 포위하였다. 공이 힘써 싸워 막아 지켜내니, 적군들이 크게 궤멸되어 엎어져 죽은 시체가 80여리에 달했다. 명(明)의 장수가 말을 달려 가서 그 전투했던 곳을 보고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판탕충신(板蕩忠臣)이요, 중흥명장(中興名將)이로다.”고 했다. 자헌(資憲)으로 승진하여 팔도도순찰사(八道都巡察使)가 되었고, 제1등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석릉부원군(石陵府院君)에 추봉(追封) 되었다.

남치리(南致利)
영의공(英毅公) 민지(敏之)의 후예로 자가 의중(義仲)이고 호는 비지(賁趾)이다. 스무살이 넘자 퇴도의 문하에 유학하여 자질을 인정받았다. 타고난 모습이 아름다웠고 행실을 깨끗하게 가졌으며, 만년에 와서 더욱 위기(爲己)하는 학문에 전심(專心)하였다. 견고한 의지로 각고의 노력을 통해 학문에 나아가는 것이 매우 예리하였다. 동류(同類)들이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일찍이 가로되, “일식(一息)이라도 오히려 남아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태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서른 여덟살에 죽었다. 송소(松巢) 권우(權宇)가 행장을 지었고, 류서애(柳西厓)가 갈명(碣銘)을 지었으며,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ㆍ난원(樂園) 김해(金垓)가 비석을 사서 묘에 세웠다.

김복일(金復一)
성일(誠一)의 아우로 자는 계순(季純)이요, 호는 남악(南岳)이다. 퇴도의 문인이다. 가정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융경(隆慶) 경오년 문관에 급제하였다. 성품과 행실이 경개(耿介)60)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였으며, 청렴하고 신중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켰다. 세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권 우(權 宇)
생원(生員) 대기(大器)의 아들로 계속해서 이계촌(伊溪村)에 살았다. 자는 정보(定甫)요, 호는 송소(松巢)이다. 자질과 성품이 경개(耿介)하였으며 지조(志操)가 깨끗하였다. 퇴도의 문하에 유학하여 학문에 힘써 경서를 강명(講明)했다. 만력(萬曆)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왕자(王子)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불행히 일찍 죽었다. 문집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 7. 영가지 권7 > 2) 인물(人物)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B006&sMok_Nmbr=118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6&sMok_Nmbr=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