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유물/안동지역◇유적

[영가지 권7] 선행(善行) -이포(李苞)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8. 00:07

영가지 권7


5) 선행(善行)

이 포(李 苞)
자는 중용(仲容) 이고 홍준(弘準) 의 손자이다. 내성현 호평리에 살았다. 가정년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곧아, 수령의 가혹한 정사에 분개하여 명종조(明宗朝)1)에 ‘박민도(剝民圖)’를 올렸다. 임금이 극도로 표창하여 집경참봉(集慶參奉)을 내려 주었다. 마침내 그의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어 어좌(御座)에 세웠다. 일찍이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다리를 베어 먹이자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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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李淑仁)
자는 극기(克己)로 풍산현 하리(下里)에 살았다. 가정 갑오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관후(寬厚)하였고, 풍채가 남을 움직일만 하였다. 몸가짐을 근엄하게 하고 남의 허물을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상중(喪中)이나 제사를 받들 때, 그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다. 형제들을 우애하였고 이웃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원망하거나 허물하는 일이 없었다. 관학제생(館學諸生)들이 서로 조정에 천거하여 집현전(集賢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데 욕심을 두지 않았다. 죽는 날에 이르러, 부인(婦人)과 시자(侍者)들을 모두 떠나가도록 하여 그들이 손가락을 끊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당시에 ‘정인(正人)’이라고 칭송했다. 아들 공(珙)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부친이 죽은 뒤에 마침내 숨어버리고 벼슬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덕(才德)을 숨기고서 끝내 늙으니, 사람들이 “선지(先志)를 잘 이었다.”고 말하였다.

이문규(李文奎)
자는 경소(景昭)이고, 호는 문곡회수(文谷晦叟)이다. 진보(眞寶) 사람이다. 내성현(柰城縣) 호평리(虎坪里)에 살았다. 태어나 열 살도 되지 않았는데, 채과(菜果)를 얻을 때면 받드시 부모에게 드렸다. 부모가 가로되, “이 아이는 진실로 하늘이 낸 효자로다.”하고 했다. 나이 스물 하나에 아버지 상(喪)을 만나 복(服)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슬퍼해 마지 않았다. 식시(食時)가 되면 궤연(几筵)에 음식 올리기를 한결같이 했다. 삼년 동안 날을 좇아 성묘(省墓)했는데 풍설(風雪)을 피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되,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드렸다. 집이 가난하여 어떤 때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팔아 음식을 구하기도 했으니,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아름다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이 쉰 두 살에 어머니가 죽었다. 시묘살이 3년에, 한번도 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상을 마치고는 아침 저녁으로 궤연(几筵)에 음식 올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퇴도선생이 가로되, “선왕(先王)의 제도는 가히 자기의 마음이 내키는 데로 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뒤로부터, 신주(神主)를 받들고 종가(宗家)로 가서 다만 삭망(朔望)에만 무덤에 제물을 차리고 그에 따라 여막에서 살았다. 국상(國喪)이나 국기(國忌)를 만나면 흰 옷을 입고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한 뒤에, 재계하고 흰밥먹기를 여러날 했다. 고을 사람들이 효행(孝行)으로써 조정에 알리어,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사양하는 뜻을 서술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다섯가지 일의 폐단을 진술하였다. 첫머리에서는 직간(直諫)을 받아들이고, 사정(邪正)을 잘 분별하며, 상벌(賞罰)을 밝게 하고 군정(軍政)을 잘 닦아 수졸(水卒)을 안정시켜야 함을 말했다. 끝에 가서는 성학(聖學)은 ‘성(誠)’을 근본으로 함을 말하였다. 임금이 그의 성간(誠懇)을 아름답게 여기었다.

이 포(李 苞)
자는 중용(仲容) 이고 홍준(弘準) 의 손자이다. 내성현 호평리에 살았다. 가정년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곧아, 수령의 가혹한 정사에 분개하여 명종조(明宗朝)1)에 ‘박민도(剝民圖)’를 올렸다. 임금이 극도로 표창하여 집경참봉(集慶參奉)을 내려 주었다. 마침내 그의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어 어좌(御座)에 세웠다. 일찍이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다리를 베어 먹이자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정 린(鄭 隣)
자는 인지(麟之) 이다. 가정 병오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풍산현 신촌(新村)에 살았다. 성품이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간결하고 고아(古雅)했다. 효성과 우애가 진실로 돈독했고, 제사를 받들매 예를 다하였다. 고을에 있을 땐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며,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이웃 중에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나누어 구휼해 주었다. 여든살이 넘어 죽었다.

김 진(金 璡)
자가 영중(瑩仲) 으로 대대로 천전리(川前里) 에 살았다. 가정 을유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행(性行)이 엄하고 씩씩했다. 남을 가르침에 일정한 방향을 두었고 시속(時俗) 에 구애되지 않았다. 곧은 마음으로 의를 실천 하였다. 아들 다섯을 가르치어 ‘발월(發越)’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임금을 섬기는 방법은 마땅히 정성을 쌓아서 신뢰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범안(犯顔) 하여도 간언이 받아들여질 수 있느니라.” 하고, 또 가로되, “사람은 직도(直道)2)로써 죽을지언정 왕도(枉道)3)를 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집안에서는 효우(孝友)가 지극히 돈독했으며 제사에 대해서는 더욱 치성(致誠)을 드렸다. 운명할 때에 편한 모습으로 자제들에게 가로되, “내 나이가 대질(大耋)4)을 넘겼으니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복록이 후하구나. 다시 무었을 구하겠는가?”고 하였다. 아들 성일(誠一)이 귀해지자 이조판서 (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세상(金世商)
군수(郡守) 극신(克信)의 아들이요,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손자이다. 풍산현 사지리(笥池里)에 살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봉양(奉養)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모든 제사에는 반드시 몸소 맡아 공경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시묘살이 3년에 한번도 집으로 내려오지 않았으며, 채과(寀果)를 먹지도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孝子)’라고 칭송하였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 7. 영가지 권7 > 5) 선행(善行)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B006&sMok_Nmbr=121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6&sMok_Nmbr=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