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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인공(三角山人公) 이홍진(李弘震) 전(傳)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3. 12:18

□삼각산인공(三角山人公) 이홍진(李弘震)

○字는 언기(彦起)요, 號는 삼각산인(三角山人)이라 官은 서사참봉(筮仕參奉)인데 광해조(光海朝)때를 만나 삼각산(三角山) 조계동(曹溪洞)에 은거(隱居)하야 사문불출독서(社門不出讀書)로 소일하고 과학(科學)길에 나가지 아니하다. 인조(仁祖)께서 왕위(王位)에 오르기전(前) 상친(相親)하던 중 인조(仁祖) 개기후(改紀後)에 수차(數次) 부름을 받고서도 나가지 아니하니 세인(世人)이 삼각산은사(三角山隱士)라 칭(稱)하였다. ○墓는 해등촌(海等村) 인좌(寅坐).
○配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참의(參議) 붕(鵬)의 女. 규(圭) 1男. ○墓는 논산군(論山郡) 연산면(連山面) 덕암리(德岩里) 도고머리에 있음.
○配는 여산송씨(礪山宋氏) 현감(縣監) 시철(時哲)의 女. ○墓는 해등촌(海等村) 공묘하(公墓下) 갑좌(甲坐).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三角山人傳(삼각산인전)
–族孫(족손) 承雨(승우) 撰(찬)

歲在玄黙涒灘嘉月初吉護軍泰炯顧承雨而言曰從姪在田曩自連庇兩州草譜單而來言其門有爲鳳雨名者其人佳可其堂內羣從銳文幹者亦數人爲本州之望也其先有三角山人以淸節卓然稱當世之師也鳳雨頌其來雖未早爲其山人公請得一文云覽詳其單我先祖大冢宰諱蔓實七世孫吏議諱嗣宗爲其曾祖也誼在惇親泰不敢拒但構數行開篋宗之又曰曾亦勉之承曰以我魯莽素質聞見固不廣矣雖未能贊辭亦豈無助言就而按狀出人諱弘震字彦起考曰成均進士文幹妣曰鄭縣監磁女也公才行絶倫文章著世以參奉無意競進遂屛跡于三角山下漕溪洞誧書樂道以山人號焉 肅廟潛邸時屢臨公家談文圍碁比之若玉樹契之如金蘭及夫甲寅 臨御之後使之欲出任 鳳綸日下 玉音間至時有權奸之用事公慨然不起 王曰咨嗟親書漕溪瀑布四字表其杖履之所題咏 特賜漕溪洞十里寓其棲息之安閒又 賜五里地以掦尊賢之盛德而國之東有加五里之竪石盖由此也鳴呼公以一布衣遯居山谷中如非淸節卓行曾何有 明王之待之以禮又不遇 明王後誰知山人之行之以義然則漢光武於子陵宋太祖於圖南足可像於千載之下而古之明王聖主多有不賓之士者此其謂歟我李之貫慶州名公巨卿大顯于王廷而或君子也處士也隱德行義甚多世稱淸族而及於公又此高潔以山人之號遺命題主信可爲後世之柯則著云繼之以詩曰
自守堅淸滌垢塵高山三角一高人諫議不受先生漢仙詔休敎處士陳加五里前名尙竪經千載後德何泯號之題主維公訓祭祀年年格感神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삼각산인전(三角山人傳) 역문(譯文)
   -족손(族孫) 승우(承雨) 찬(撰)

현묵(玄黙, 임壬) 군탄(涒灘, 신申)은 임신년(壬申年) 어느 날 호군(護軍) 태형(泰炯)이 나에게 이르기를 종질(從姪) 재전(在田)이 연비(連庇) 고을로부터 족보(族譜) 수단(收單)을 가지고 와서 말하되 그 문중(門中)에 봉우(鳳雨)란 사람이 있는데 행동이 착실하고 당내 모든 종반(宗班)이 글을 잘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 그 지방에 명망이 높고 그 조상에 삼각산인(三角山人)이 있어 청렴결백(淸廉潔白)으로 당세의 사표(師表)라고 하였으나 봉우(鳳雨)가 자기 조상인지라 찬양할 수 없다 해서 나에게 글을 청하기로 그 단자(單子)를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 선조 대총재(大冢宰, 이조판서吏曹判書) 만실(蔓實)의 7대손이요, 이조참의(吏曹參議) 사종(嗣宗)의 증손이라. 족친간(族親間) 정의(情誼)로 그 청을 거절하지 못하여 몇 줄 글을 지어 주고 이르기를 내가(승우承雨) 본시 우둔하여 격문이 넓지 못한지라 비록 찬양하는 글은 못되나 종간의 도움은 되리라 하고 보첩(譜牒)을 상고하니 삼각산인(三角山人) 이름은 홍진(弘震)이요, 자는 언기(彦起)며 부친은 성균진사(成均進士) 문간(文幹)이고 어머니는 현감(縣監) 정자(鄭磁)의 따님이다.
공은 재질(才質)이 뛰어나고 문장(文章)이 세상이 알렸으나 참봉(參奉)으로 벼슬을 끊고 삼각산하(三角山下) 조계동(漕溪洞)에 숨어 글을 읽고 도를 닦으며 산인(山人)이라고 호를 하였다. 숙종(肅宗)이 임금되기 전에 여러 번 공의 집에 왕림하여 글을 의논하고 바둑을 즐기니 비유컨대 옥수(玉樹)와 같고 교분은 금란(金蘭)과 같으니 임금이 되신 후에 공의 벼슬을 시키고자 여러 차례 불렀으나 그 당시 조정에는 권신(權臣)과 간신(奸臣)이 국사를 농간하는지라 결국 벼슬을 받지 않으니 왕이 가로대 ‘슬픈 일이다’ 하시며 조계폭포(漕溪瀑布)란 네 글자를 어필(御筆)로 친히 써서 공이 거처하는 곳을 표하고 또 조계동(漕溪洞) 10리(十里) 땅을 하사(下賜)하여 그 생활을 돕고 또 5리(五里)를 더 주어 임금이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성덕(盛德)을 밝혔으니 동쪽에 5리(五里)를 더했다는 비문(碑文)이 이에 관계되는 것이라.
슬프다, 공이 한 백성으로 산중에 숨어 사는데 청렴한 높은 행실이 아니었으면 어찌 임금이 예로 대접했으며 또 밝은 임금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찌 산인(山人)의 행금을 알았으리오. 그러니 한광무(漢光武)에 자릉(子陵)과 송태조(宋太祖)에 도남(圖南)이 족히 천년(千年) 뒤에까지 모범 되어 어진 임금도 신하를 삼지 못하는 선비가 있었음을 밝혔도다.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조정에서 날렸고 혹 군자(君子)와 은사(隱士)는 덕(德)을 닦고 의리를 행한 사람이 청족(淸族)이라 지칭하는 데 공에 이르러 높고 깨끗한 산인(山人)의 이름으로 후세 자손에게 기둥이 되었다. 새겨 가로대
스스로 청백함을 지켜 세상에 때 묻지 않으니 높은 삼각산(三角山)중에 높은 사람이다. 간의대부(諫議大夫)란 벼슬을 거절한 한나라 엄자릉(嚴子陵)과 조서(詔書)를 불응한 진박(陳搏)과 같도다. 5리(五里)를 더 준 기념비는 연구하니 천년(千年) 뒤라도 높은 덕(德)이 없어질까. 산인(山人)이란 호를 신주(神主)에 쓰게 한 유훈(遺訓)은 년년(年年)이 제사 때 흠격(歆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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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공거경(名公巨卿) : 이름난 정승과 훌륭한 판서라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