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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공(嘉崖公) 이홍조(李弘肇) 행장(行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3. 12:32

□가애공(嘉崖公) 이홍조(李弘肇)

○字는 군원(君遠)이요, 號는 가애(嘉崖). 관(官)은 가의대부(嘉義大夫) 행한성부좌윤(行漢城府左尹) 차자(次子) 원종(原從) 일등훈(一等勳)으로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현종임인(顯宗壬寅) 12月24日生 영조갑자(英祖甲子) 9月17日卒 향년(享年) 83歲. 자유(自幼)로 효우(孝友)가 순독(純篤)하야 자란지병(慈䦨之病)에 열지규고(裂指刲股)함으로 장보재(章甫齋) 진영읍(陣營邑) 급수의이상미상달(及繡衣而尙未上達)하고 사수침(事遂寢)하니 가승통재(可勝痛哉)이 사적(事蹟)이 상재(詳載) 행장(行狀) ○墓는 위와 같이 유좌석물(酉坐石物)이 있음. ○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 ○墓는 합폄(合窆).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同知中樞府事贈戶曹判書李公行狀
(동지중추부사증호조판서이공행장)

–任憲晦(임헌회) 撰(찬)

公諱弘肇字君遠自號嘉崖李氏繼出雞林新羅佐命功臣謁平鼻祖也世襲簪紳入 本祖有諱蔓實吏曹判書號花軒歷一世諱思剛吏曹參議傳至諱希壽郡守寔公高祖也曾祖諱碩立縣監祖諱檍丙子入慬 贈兵曹參議旌閭考諱慶昌參奉 贈戶曹參判妣貞夫人平壤趙氏僉樞慶哲之女公以 顯廟壬寅十二月二十四日生自幼有至性得一果輒獻父母父母有不安節暫不離側夜不交睫勤粥飮粥飮進然後始食及長盡志物之養母病裂指進血以甦幾絶之命前後喪毁幾滅性墓在一舍強而朔望省掃不以寒暑或廢此其孝之終始也友愛篤至己嫁娣妹各居弟姪盡心顧護平生不以利祿留其中惟勤於治産産旣饒又能散每當大侵設私賑救民命不知其數雖轑槖掃庾不爲後日計留也盖其喜施非當也天性然耳年至稀以長子貴除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仍陞嘉義旣歿又以次子原從勳 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帶如例公以 英廟甲子九月十七日歿壽八十三 葬于德山外也面金峙里新棠山酉坐之原參議公兆也配貞夫人南原尹氏內贍直長就甲之女壬寅生壬子歿合祔如禮舉五男三女男長喜夏嘉善府使次喜集亦嘉善府使奮武一等功臣次喜成次喜福次喜輔女長適士人沈得謙次適察訪鄭習良次適及第張懿紹內外曾玄總百餘人噫參議公殉國之忠焜燿一世公又以孝名夫忠孝軓乎一故曰求忠臣必於孝子之門而孝子多出於忠臣之世是以君子尙其類也若公豈非其人歟公旣享大耋富貫康寧子姓又蕃衍天之報始善仁可謂至矣而人猶有所憾焉者以其行義未及闡揚也亦可見公議之久益不泯也公玄孫相翼旣請參議公文字殷以公狀德辭不獲爲之敍次如此以俟後之立言者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동지중추부사증호조판서이공행장 역문
(同知中樞府事贈戶曹判書李公行狀 譯文)

   -임헌회(任憲晦) 찬(撰)

공의 휘는 홍조(弘肇)요, 자는 군원(君遠)이며 자호(自號)는 가애(嘉崖) 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대로 벼슬이 계승하더니 본조(本祖, 조선朝鮮)에 들어와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호는 화헌(花軒)이요, 그 뒤에 휘 사강(思剛)은 이조참의(吏曹參議)요, 누전(累傳)하여 휘 희수(希壽)는 군수(郡守)니 공의 고조부가 되고 증조의 휘는 석립(碩立)이니 현감(縣監)이요, 조부의 휘는 억(檍)이니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전사(戰死)하여 병조참의(贈兵曹參議)에 정려(旌閭)까지 받다. 고의 휘는 경창(慶昌)이니 참봉(參奉)으로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이요,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니 첨추(僉樞) 경철(慶哲)의 따님이라.
현묘(顯廟) 임인(壬寅) 12월 24일에 공이 출생하다. 어릴 때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 과일 한 개가 생겨도 반드시 부모께서 편치 못한 기색이 보이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도 자지 않고 미움을 조금이라도 자셔야 공도 음식을 입에 넣고 하더니 장성하여 모친 병환이 위중할 때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널어 소생케 하고 양친 전후 상(喪)에 애회(哀懷)로 혼절까지 하다. 30여 리밖에 묘소에 삭망(朔望)마다 가서 쓸고 살피기를 춥고 덥다고 폐(廢)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효행(孝行)의 대강이요. 우애가 돈독하여 출가한 남매간과 사방에 흩어져 사는 동생과 조카들에게까지 마음껏 보호하며 평생 이해관계로 중심이 요동되지 않고 오직 치산(治産)을 부지런히 하여 형편이 조금 부유해지면 재물을 흩어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고 창고에 양식이 바닥이 나도 남겨놓지 않으니 그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부자를 꺼리는 것은 공의 천성(天性)이라. 70을 당하여 장자의 귀(貴)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증직(贈職)받고 뒤에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다. 별세 후 차자의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대여례(帶如例)를 추증(追贈)받다. 공이 영묘(英廟) 갑자(甲子) 9월 17일에 졸하니 수(壽)가 83이다. 덕산(德山) 외야면(外也面) 금치리(金峙里) 신당산(新棠山) 유좌(酉坐)에 안장하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니 내섬직장(內贍直長) 취갑(就甲)의 따님으로 임인년(壬寅年)에 출생하고 임자년(壬子年)에 별세하니 공의 묘소에 합폄(合窆)이다. 5남 3녀를 생하니 장남은 희하(喜夏)니 가선부사(嘉善府使)요, 다음 희집(喜集)도 가선부사(嘉善府使)로 분무(奮武) 일등공신(一等功臣)이요, 다음은 희성(喜成)이요, 다음이 희복(喜福)·희보(喜輔)요, 장녀는 심득겸(沈得謙)에 출가했고 차녀는 찰방(察訪) 정습량(鄭習良)에 출가, 다음 딸은 급제(及第) 장의소(張懿紹)에 출가했다. 내외(內外) 증현손(曾玄孫)이 백여인(百餘人)이라.
참의공(參議公)의 순국(殉國)한 충절이 한세상 빛이 났고 공이 또 효행으로 유명하니 충(忠)과 효(孝)는 같은 관계로 충신은 효자의 집에서 구하라 하였고 효자도 충신의 집에서 많이 나고 이러므로 군자는 충효를 숭상하나니 공과 같은 분은 과연 그 사람일진대, 공은 상수(上壽)를 살았고 부귀강녕(富貴康寧)까지 겸했으며 자손이 또 번성하니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함이 지극하다고 할지나 사람으로 오히려 감정은 공의 아름다운 행적이 세상에 찬양이 안 된 일이라 하겠으나 또한, 그 위대한 공적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을 조짐이 있으니 공의 현손(玄孫) 상익(相翼)이 참의공(參議公)에 대한 글을 갖추어 놓았고 공의 가장(家狀) 덕행(德行)도 나에게 요청하니 사양치 못해 대략 기록하여 뒷날 증언할 군지(君誌)를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