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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공(松齋公) 이광운(李光運) 가장(家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3. 10:42

□송재공(松齋公) 이광운(李光運)

○字는 형진(亨震) 號는 송재(松齋) 우야옹(又野翁). 영조계유생(英祖癸酉生). 순조을해(純祖乙亥) 4月14日卒. 公이 성도관홍(性度寬弘)하고 지기(志氣)가 강명(剛明)하여 효어친우어제(孝於親友於第)하니 향당(鄕黨)이 누천재행(屢薦在行)이나 미몽포전(未蒙襃典)하고 사적(事積)이 상재(詳載) 홍계공(鴻溪公) 삼효실기(三孝實記)하다. ○墓는 비홍치하(飛鴻峙下) 평등산(平嶝山)에 간좌(艮坐).
○配는 성산이씨(星山李氏) 연유(延維)의 女. 4月26日卒. ○墓는 순산(巡山) 등하절(嶝下節)에 손좌(巽坐).
○配는 양천허씨(陽川許氏) 진(進)의 女. 3月11日卒. ○墓는 순산(巡山) 등변록(嶝邊麓)에 묘좌(卯坐).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松齋公家狀(송재공가장)
–從孫(종손) 承雨(승우) 撰(찬)

公諱光運字亨震號松齋又稱野翁生而聰慧美風度通經史以才華聞人年甫十二得覽丙子日記掩卷奮然曰我東禮義之盛冠於天下 主辱臣死固百世之恥而至如斥和諸君子萬古綱常死而不死者也士大夫寧爲玉碎不可瓦全聞者莫不竦然稱之及長器量沉毅德性溫厚事父母至誠勢雖貧窶滫㵦之物必進時新畋山獵水不廢雨雪晨昏定省不失其節養志悅口之力無不備至與其羣弟友愛純篤怡怡然湛樂初無物我之相吝自是閨門雍穆人不敢間焉其鄕黨也宗族也恂恂然有寬仁敦愛之風後丁考妣之憂送終凡節一遵家禮前後廬墓泣血擗踊哀動傍人制闋潛心篤學每月朔望省楸感懷只切終身之慕若遇先忌肅然齋戒備盡如在之誠聚會門子弟敎養不怠以書戒之曰人之爲道以其仁與義也仁莫大於孝義莫重於忠則惟忠孝二字乃是萬世之綱紀而後之爲人子者必以此爲心法也文曰謹言行戒酒色母飾非母慢遊又曰吾家以名門裔族文章德行頂針不絶及余身雖不才但敎子之方願效韋贒之不遺金教一絰而己汝曹勉旃不忘無㤁先德且與鄕鄰長老每會于所居林亭習禮讀法由以行藍田之鄕約有善書籍推以衍何南之社會其餘微言細行指不勝僂而世皆矜式間有貳膳饋遺之獻雖輿儓賤卒舉皆欽頌遠近章甫具狀齊稟累入鄕薦知府朴公宗大族丈容奎致敬諮訪以南州之高士徐西山之孝子汪稱焉然則公之德行儘是仁孝中由出以得於天賦也夫嗚呼我李之根於雞林自新羅元勳諱謁平迄今二千載門基舃爀名碩磊落至參奉諱希白爲公高祖諱處仁世稱雙梧先生諱東尹隱德爲公曾大父大父也考諱宗赫號鴻溪以孝著聞妣晉州姜氏馹箸女有婦德幽閒靜貞奉舅姑盡誠事君子甚摯生五男一女公其長也公以簪纓后裔逸於草野雖不得闡揚嘉猷懿德繼襲庭訓而然之哉生於 英廟癸酉二月十八日卒于 純廟乙亥四月十四日墓鴻峙下平地山負艮原配星山李氏延維女無育繼配陽川許氏進女生一男一女男諱寅達女慶州金希吉寅達生二男二女男長夏雨次商雨女雞林金樂植月城崔秉瑞至內外曾孫幼不盡錄而公之篤行己具於鴻溪公三孝實紀余何敢虛張逸辭僣贅其間但追遠曠感以略干言㪅俟君子之秉筆焉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송재공가장(松齋公家狀) 역문(譯文)
   -종손(從孫) 승우(承雨) 찬(撰)

공은 휘는 광운(光運)이요, 자는 형진(亨震)이며 호는 송재(松齋) 또 야옹(野翁)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골(風骨)이 아름다우며 경서(經書)를 통독하니 재주로 소문이 났으니 나이 12세에 병자년(丙子年) 일기(日記)를 보고 분연히 말하기를 우리나라 예의는 천하에 으뜸이니 임금이 욕(辱)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것은 백대(百代)에 부끄럼이 없을진대 화친(和親)을 물리친 군자(君子)들은 만고에 떳떳함으로 죽어도 죽지 않음이라. 사대부(士大夫)가 차라리 무과(武科)같이 부서질지언정 기와같이 온전한지 말라 하니 듣는 사람이 다 칭찬하더라. 장성함에 국량이 넓고 덕성이 온후하며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집이 비록 가난하나 자시는 음식은 반드시 신품으로 하며 산에 가서 짐승 잡고 내에 가서 고기 잡아 봉친(奉親)을 게을리 않고 아침저녁 문안을 하루같이 하고 뜻에 맞도록 입에 맞도록 가진 노력을 다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화목을 위주로 하되 물건도 너와 나의 것이 따로 없으니 집안이 화목하여 남이 업신여기지 못하다. 향당(鄕黨)과 족친 간에 너그럽고 어질게 사랑으로 대접하다.
뒷날 양친 상을 당하여 초종장례(初終葬禮)를 가례(嘉禮)에 따르고 여묘삼년(廬墓三年)에 읍혈(泣血)에 통하니 곁에 사람이 다 슬퍼하다. 복(服)을 벗고부터 공부에 열중하니 잠심(潛心) 독학하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성묘를 빠짐없이 하여 종신토록 부모를 생각하고 선대 제삿날이 닥치면 숙연재계(肅然齋戒)하여 정성을 다하고 문내(門內) 자제들을 모아 놓고 교양하기를 ‘게을리 않으며 항상 경계하기를 사람이 도를 닦는 데는 인(仁)과 의(義)가 있으니 인(仁)은 효(孝)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義)는 충(忠)보다 더 중한 것이 없으니 오직 충효(忠孝) 두 글자는 만대의 기강이니 뒷날 남에 자손 된 이들은 반드시 충효(忠孝)로 법으로 삼아야 된다’ 했고 또 말과 행실을 삼가며 주색을 경계하고 남과 시비를 멀리하며 음탕하게 놀지 말라 하고 또 가로대 우리 집은 명문가 후예로 문장덕행(文章德行)이 면면히 끊이지 않더니 나의 몸에 이르러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은 금을 자손에 물려주지 말고 글과 책을 물려주라는 위현(韋賢)을 본받고자 하니 너희들은 힘써 잊어버리지 마라. 선대의 음덕(蔭德)을 더럽히지 말라 또 지방 늙은이로 더불어 임정(林亭)에 모여서 예(禮)를 익히고 남전(藍田)의 향약(鄕約)을 본받아서 미루어 하남(何南)의 모임을 방불케 하니 그 나머지 많은 언행은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세상이 모범은 삼아 노복(奴僕) 하천배(下賤輩)들도 송덕하여 선물을 바쳤고 원근(遠近) 인사들이 행장(行狀)을 들어 천거(薦擧)했더니 지부박공종대(知府朴公宗大)와 족장(族丈) 용규(容奎)가 찾아와서 공경이 예를 하고 남주(南州)에 고사(高士) 서(徐)씨와 서산(西山)의 효자왕(孝子汪)이라 칭하니 공의 덕행은 어질고 효(孝)에서 우러남이니 하늘이 낸 효자라 할진대 우리 이씨(李氏)는 경주(慶州)에 뿌리를 두고 신라원훈(新羅元勳) 휘 알평(謁平)이 지금부터 2천 년 전인데 문중(門中)이 번성하고 문장 고관이 대불필절하더니 참봉(參奉) 휘 희백(希白)은 공의 고조요, 휘 처인(處仁)은 세상이 쌍오선생(雙梧先生)이라 부르니 공에 증조가 되고 휘 동윤(東尹)은 공의 조부요, 고의 휘는 종혁(宗赫)이요, 호는 홍계(鴻溪)니 효자로 소문이 높고 비(妣)는 진주강씨(晉州姜氏) 일저(馹箸)의 따님이니 부덕(婦德)이 있었다. 성품이 유한 정숙하여 시부모를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남편은 예로 받들다. 5남 1녀를 생하니 공이 명문후예(名門後裔)로 초야(草野)에 묻혀 드러나진 못했으나 아름다운 행동과 덕은 가정에서 훈계 속에 살아온 보람일진대 영묘(英廟) 계유(癸酉) 2월 18일에 나서 순묘(純廟) 을해(乙亥) 4월 14일에 졸하니 묘는 홍치하(鴻峙下) 평지산(平地山) 간좌(艮坐)요.
배(配)는 성산이씨(星山李氏) 연유(延維)의 따님이니 아들이 없고 계배(繼配)는 양천허씨(陽川許氏) 진(進)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생하니 남에 휘는 인달(寅達)이요, 여는 경주(慶州) 김희길(金希吉)에 출가하다. 인달(寅達)은 2남 2녀를 생하니 장남은 하우(夏雨) 차남은 상우(商雨)요, 딸은 경주(慶州) 김락식(金樂植)과 경주(慶州) 최병서(崔秉瑞)에 출가하다. 내외(內外) 증현손(曾玄孫)은 어려서 다 기록 못 한다. 공의 독실한 행실이 홍계공(鴻溪公) 삼효자(三孝子) 실기에 실렸으니 내 어찌 쓸데없는 말을 참람(僭濫)이 하리오, 다만 감동된 바가 있어 약간의 글로 적어 후일 병필군자(秉筆君子)를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