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게시판/금석록◆정민록

신암공(愼庵公) 이억(李檍) 행장(行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3. 12:24

□신암공(愼庵公) 이억(李檍)

○1615년(광해 7, 을묘)~1637년(인조 15, 정축). 字는 여량(汝樑)이요, 號는 신암(愼庵). 광해을묘(光海乙卯) 4月13日生. 인조병자호란시(仁祖丙子胡亂時)에 이백의(以白衣)로 창의종사(倡義從事)하야 한산(韓山) 이충장공(李忠莊公)과 같이 정축(丁丑) 1月3日에 동일순절(同日殉節) 어쌍영지역(於雙嶺之役)하시니 향년(享年)이 23歲라. ○기시(其時)에 전마(戰馬)가 대의혈서(帶衣血書)하고 비명이래(悲鳴而來)하였음으로 혈서유의(血書遺衣)로 김치광고묘하(金峙光考墓下)에 의장(義葬). 숙종(肅宗) 임자년(壬子年)에 특명정려(特命旌閭)하고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 ○심암(心菴) 조상공(趙相公)이 행장(行狀)을 찬(撰)하고 귤산(橘山) 유원(裕元)이 묘갈(墓碣)을 찬(撰)하고 해장(海藏) 신상서석우(申尙書錫愚)가 정려중수기(旌閭重修記)를 찬(撰)함. 사적(事跡)이 정민록(鼎珉錄)에 실려 있다.
○配는 죽산박씨(竹山朴氏) 정지(挺芝)의 女. 임자(壬子) 1月16日生. 갑자(甲子) 6月4日卒. ○墓는 합폄(合窆).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贈兵曹參議李公行狀(증병조참의이공행장) 壬申(임신)
–鼓山(고산) 任憲晦(임헌회)

公諱檍。字汝樑。姓李氏。慶州人。高麗三重大匡月城君之秀。爲初祖。生諱揆。參贊 贈領相。諡貞烈。生諱元林。僕正。生諱蔓實。吏曹判書。號花軒。生諱良直。司導寺正。生諱思剛。吏曹參議。生諱季孫。執義。生諱瑭。學生。生諱以和。都事。寔公高祖也。曾祖諱躍龍。參奉。祖諱希壽。郡守。考諱碩立。縣監。妣咸平鄭氏。世恭之女。公以 萬曆乙卯三月十一日生。自齠齔。有器度。喜怒不形。動止中規矩。稍長。狀貌魁偉。膂力兼人。善騎射。喜讀兵家書。志節慷慨。恒言不離忠孝。治擧業。屢發解。丙子。赴會圍。見絀。從具綾川仁垕。李忠壯義培。互相諮訪。二公甚器重之。有剡用意。而公爲養親修業。退歸德山鄕廬。時建虜犯畿境。李忠壯節度湖西。遂以公有忠義。薦于朝而檄召之。公方食。推床而起。稟于母夫人曰。犬羊猖獗。乘輿播越。誠臣民共憤之秋也。何可有檄不赴。坐視其危乎。母夫人許之。顧謂其妻朴氏曰。善養老母。且保嬰兒。留衣帶爲訣。仍多率家丁。直赴廣州之雙嶺陣。是時我兵已亂。外援亦絶。事無可爲者。公不勝激烈。罵將佐之逃散者曰。君父受辱。主帥逼危。汝輩偸生將安之乎。遂向鄕山。揮淚再拜。脫藍袍。咋指出血。書其姓名。授從奴德金曰。吾自此訣矣。歸遺吾家。以識吾死日。留待孩兒長成示之也。乃彎弓射賊。矢盡兵逼。公植立不動。以劒摶擊。劒亦折。身被數十創。與李忠壯同殉。卽丁丑正月二日。而公年爲二十三矣。翌日夜半。公所乘馬。掛藍袍血書于鞍。來鳴門外。家人始知公遇害。而德金及戰卒之生還者。亦追來。道其事甚詳。馬仍日夜悲鳴。不食而斃。當時寇賊。火焚人屍。公骸竟亦未收。只以血書遺衣。葬于德山外北面金峙酉坐之原。其後縣人縣監李謹行等百餘人。摭實請褒。至 肅廟壬午。始 贈通政大夫,兵曹參議。兼帶如例。仍㫌其閭曰忠臣之門。公內行純篤。甫六歲。大父出外。雖夜深。不食以待。得美味。必獻父母。遇新物。不敢先嚼。定省溫凊。克殫其誠。有湯節。則憂形於色。左右刀圭。夜不解帶。齊家有法。閨門整肅。惇族撫姻。靡不浹洽。事長交友。一主敬信。蓋其至性出於天賦者然也。求忠臣。必於孝子之門者。信矣。朴夫人。竹山挺芝之女。于歸七年。便遭衣帶之訣。不堪終天之痛。屢欲自裁。不忍負君子老母嬰兒之托。隱忍未遂。六載居廬。哀動傍人。臨歿。遺命以其衣帶。納于棺中。語甚悲絶。祔葬公墓。嗚呼。亦可謂節義成雙也。擧一男。慶昌。參奉 贈參判。參判男。弘肇。同樞 贈判書。判書男喜夏。府使。府使男。彥培。郡守。郡守男。啓宗。通德。通德系男。浚郁。宣傳官。內外子孫。總屢百人。噫。丙丁之役。變出倉卒。賊勢如蛇奔豕突。官軍望風奔潰。當時事。誠凜然寒心矣。公靡有一障之責。眞所謂不識何狀而出萬死。不顧一生。赴難如樂地。授命於猘鋒之下而靡悔。有以愧王臣苟活之心。昔人所云赴君難。忠也。死王事。義也。死忠與義。亦何求哉者。卽公之謂也。何其烈哉。然方其縣人之呼籲也。朝論持疑。至於道査。或又謂敗軍之士。不可以褒美。若是者。何能勸忠義之士乎。江漢黃太史景源陪臣傳。其敍李忠壯事曰。義培陣雙嶺。淸人進薄。義培衣虎裘立陣前。射虜不已。諸將佐皆亡去。獨義士李億。營奴曹丑生在。海藏申尙書錫愚。正其謬曰。億。檍之訛也。趙東山晟漢。亦引趙重峯事。以破俗論。惟公忠魂毅魄之沉鬱者。於是可以少伸。而况朝家崇報之典。無復餘憾也耶。公後孫相翼。持心菴趙相公所爲傳。來謁狀德之文。余雖非不朽人者。服公忠節有素。託名爲榮。颺筆而書之如此。以竣後世立言君子之採擇焉。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3
*한국문집총간 > 고산집 > 鼓山先生文集卷之十七 > 行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636A_0170_010_0080_2009_A314_XML


●증병조참의신암이공행장(贈兵曹參議愼庵李公行狀) 역문(譯文)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찬(撰)

공의 휘는 억(檍)이요, 자는 여량(汝樑)이며 경주이씨(慶州李氏)니 고려삼중대광월성군(高麗三重大匡月城君) 지수(之秀)로 중시조(中始祖, 분파조分派祖)로 삼고 휘 규(揆)를 생하시니 참리(參理)요, 시호(諡號) 정렬(貞烈)이며 정렬(貞烈)이 생 원림(元林)하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휘 만실(蔓實)을 생하니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호는 화헌(花軒)이요, 휘 양직(良直)을 생하니 사도시정(司導寺正)이요, 휘 사강(思剛)을 생하니 이조참의(吏曹參議)요, 휘 계손(季孫)을 생하니 일집의(逸執義)요, 휘 당(瑭)을 생하니 익사공신(翼社功臣)이요, 휘 이화(以和)는 도사(都事)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가 되고 증조 휘는 약룡(躍龍)이니 참봉(參奉)이요, 조의 휘는 희수(希壽)니 군수(郡守)요, 부의 휘는 석립(碩立)이니 현감(縣監)이요, 비(妣)는 함평정씨(咸平鄭氏) 세공(世恭)의 따님이다.
공의 만력(萬曆) 을묘(乙卯) 3월 11일에 출생하니 어릴 때부터 그릇이 크고 희로(喜怒)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행동거지가 법에 맞으니 점점 장대하면서 모습이 석대하고 힘이 과인(過人)하여 활 쏘고 말타기를 잘하더니 또 병서(兵書) 읽기를 좋아하고 뜻이 강개(慷慨)하여 항상 충효(忠孝)를 말하고 능천(綾川) 구인후(具仁垕)와 충장(忠壯) 이의배(李義培)와 상종하여 서로 묻고 의논하니 두 공[二公]이 심히 중히 여겨 나라에 쓸 뜻이 있으니 공이 어버이 섬기기 위하여 덕산(德山) 집에 와 있었는데 그때 마침 북쪽 오랑캐가 침략해오니 이충장공(李忠壯公)이 호서(湖西)에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가 공이 충절(忠節)이 있다 하여 조정에 천거하여 공을 부르니 그때 공이 밥상을 받았다가 상을 밀고 일어나 모친에게 사뢰어 가로되 짐승 같은 것이 창궐하여 우리 땅에 침입하니 임금님이 피난하니 백성이 생명을 바칠 때라 어찌 앉아서 그 위태함을 구경만 하오리까. 모친이 허락하니 그 부인 박씨(朴氏)를 보고 말하기를 노모를 잘 모시고 어린아이를 잘 기르라 하고 옷과 띠를 벗어 작별하고 의병(義兵)을 끌고 광주(廣州) 쌍영진(雙嶺陣) 터로 달려가니 이때 아병(我兵)은 패전을 거듭하고 구원병은 아니오니 손쓸 곳이 없는지라,
공이 격분하여 장병들이 도망하는 자를 꾸짖어 가로되 임금이 욕을 당하고 주장(主將)이 곤경에 처했는데 너희들만 살기 위하여 도망을 친단 말이냐. 고향산천을 향하여 재배(再拜)하고 남색 도포를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저기 성명(姓名)을 써서 따라온 하인 덕금(德金)에 주어 가로되 나는 이 길로 전쟁에서 죽을 터이니 내 집에 가서 내 죽음을 알리고 이 옷은 두었다가 어린 것이 장성하거든 보이도록 하라고 부탁한 후 활을 당겨 적을 쏘다가 화살이 다하니 적이 달려들 거는 공이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칼로 적을 치니 칼이 또한 부러지니 몸에 수십 군데 중상을 입고 이충장공(李忠壯公)과 함께 전사(戰死)하니 그때가 정축년(丁丑年) 정월(正月) 초 3일이고 공의 나이 23세라. 이튿날 밤중에 공이 타던 말이 혈서를 쓴 도포를 안장에 걸고 본집 문밖에 와서 우니 온갖 식구들이 공이 전사(戰死)함을 알았고 덕금(德金)과 전졸(戰卒)들이 살아와서 그 전사하는 광경을 상세히 알려드리니 말도 밤과 낮에 슬피 울며 먹지 않고 죽다. 그 당시 적이 시체를 마구 불로 태워 공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혈서 쓴 옷을 덕산(德山) 외북면(外北面) 금치리(金峙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뒤 현감(縣監) 이근행(李謹行) 등 백여 명이 진정하고 그 포상을 청했더니 숙종(肅宗) 임오년(壬午年)에 처음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 벼슬을 증직(贈職)하고 정려각(旌閭閣)을 짓고 충신(忠臣)의 문(門)이라고 했다.
공의 행실(行實)이 독실(篤實)하여 겨우 6세 때 조부께서 출타하셔 돌아오지 않으면 밤이 깊어도 저녁밥을 먹지 않고 기다렸고 좋은 음식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드리며 새로 난 음식이나 과일을 얻어도 먼저 입에 넣지 않고 혼정신성(昏定晨省)1)과 동온하정(冬溫夏凊)2)을 성심성의껏 하고 부모가 편치 않으면 밤낮으로 약을 달여 옷을 벗지 않고 법도 있게 집을 다스리니 가문이 엄숙하며 친족과 연아 간에 화목하고 어른 대접과 벗 사귀는 데 공경과 신의를 위주하니 그 천성이 하늘에서 타고 남이라 충신(忠臣)은 효자의 집에 구한다더니 과연 옳은 말이로다. 부인 박씨(朴氏)는 죽산정지(竹山挺芝)의 따님이니 시집온 지 7년 만에 남편과 영결(永訣)하여 그 혈서로 안장하니 망극지통(罔極之痛)을 못 이겨 자결코자 여러 번 결심했으나 남편이 부탁한 노모와 유아를 생각하여 죽지 못하고 6년간 여막살이에 그 슬퍼함이 격해 사람을 울렸고 죽을 때 유언을 따라 남편의 띠와 옷을 자기 널 속에 넣으라 하니 그 정성이 얼마나 슬픈가. 공의 묘소 옆에 장사 지내니 충신 열녀의 쌍분(雙墳) 묘소라 할지라.
외아들 경창(慶昌)은 참봉(參奉)으로 참판(參判)을 받았고 참판(參判)의 아들 홍조(弘肇)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판서(判書)를 받았고 판서(判書)의 아들 희하(喜夏)는 부사(府使)요, 부사(府使)의 양아들 언배(彥培)는 군수(郡守)요, 군수(郡守)의 아들 계종(啓宗)은 통덕랑(通德郞)이고 통덕랑(通德郞) 양자(養子) 준욱(浚郁)은 선전관(宣傳官)이니 안팎 자손이 몇백 명이다. 슬프다, 병자(丙子) 정축년(丁丑年) 난리는 창졸(倉卒)간에 일어났고 적세(賊勢)가 너무 커서 관군(官軍)이 보기만 하고도 무너지니 당시의 일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공은 무슨 책임 있는 처지도 아니면서 일생을 돌아보지도 않고 난리판에 나가는 것을 즐거운 땅에 나가듯 하여 목숨을 적의 칼날 아래 바쳐도 뉘우침이 없으니 조정에 벼슬하던 자들의 살기 위하여 도망하던 자를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옛날에 임금이 어려울 때 몸을 바치는 것은 충(忠)이요, 의(義)라. 충(忠)과 의(義)에 죽는 이를 어디 가서 구할까. 곧 공이 그 사람이라. 그러나 뒷날 사람들이 공의 포상을 요구하나 조정공론이 의심을 두고 조사를 거듭한 후 패전한 장병에는 포상할 수 없다 하니 이러고 무슨 충의(忠義)를 권장하랴.
강한(江漢)의 황태사(黃太史) 경원(景源)의 배신록(陪臣錄)에 이충장공(李忠壯公) 사기(事記)를 쓸 때 의배(義培)가 쌍령(雙嶺)에 진을 치니 청인(淸人)들이 박(薄)으로 진격해오니 의배(義培)가 갑옷을 입고 진두(陣頭)에 서서 활로 오랑캐를 쏘기를 쉬지 않으니 모든 장병은 다 도망가고 홀로 의사(義士) 이억(李億)과 영노(營奴) 조축생(曹丑生)만 남아 있다고 했으니 신상서(申尙書) 석우(錫愚) 그 기록을 정정하여 억(億)은 억(檍)으로 고치고 조동산(趙東山) 성한(晟漢)이 또한 조중봉(趙重峯) 일을 인용하여 그른 것을 바로 잡으니 충혼의백(忠魂義魄)3)이 얼마라도 원통함을 풀었을까. 또 조정에서 내린 은전(恩典)은 감정이 없는지 공의 후손 상익(相翼)이 심암(心菴) 조상공(趙相公, 주두순趙斗淳)의 쓴 기록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공의 행장(行狀)을 청하니 내가 지을 자격은 없으나 공의 충절(忠節)에 감복한지라 이름이나마 부치는 겻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위와 같이 쓰고 위에 군자(君子)가 가려 주기를 기다린다.


-------------------------------------------
1) 혼정신성(昏定晨省) :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함을 이르는 말.
2) 동온하정(冬溫夏凊) :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더운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어 효도함을 이르는 말.
3) 충혼의백(忠魂義魄) :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이라는 뜻으로, 충성과 절개의 정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