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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인공(三角山人公) 이홍진(李弘震) 가장(家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3. 10:48

□삼각산인공(三角山人公) 이홍진(李弘震)

○字는 언기(彦起)요, 號는 삼각산인(三角山人)이라 官은 서사참봉(筮仕參奉)인데 광해조(光海朝)때를 만나 삼각산(三角山) 조계동(曹溪洞)에 은거(隱居)하야 사문불출독서(社門不出讀書)로 소일하고 과학(科學)길에 나가지 아니하다. 인조(仁祖)께서 왕위(王位)에 오르기전(前) 상친(相親)하던 중 인조(仁祖) 개기후(改紀後)에 수차(數次) 부름을 받고서도 나가지 아니하니 세인(世人)이 삼각산은사(三角山隱士)라 칭(稱)하였다. ○墓는 해등촌(海等村) 인좌(寅坐).
○配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참의(參議) 붕(鵬)의 女. 규(圭) 1男. ○墓는 논산군(論山郡) 연산면(連山面) 덕암리(德岩里) 도고머리에 있음.
○配는 여산송씨(礪山宋氏) 현감(縣監) 시철(時哲)의 女. ○墓는 해등촌(海等村) 공묘하(公墓下) 갑좌(甲坐).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參奉三角山人公家狀(참봉삼각산인공가장)
–七世孫(칠세손) 鳳雨(봉우) 述(술)

府君諱弘震字彦起系出慶州新羅元臣諱謁平麗季月城君諱之秀后 我朝雞川君諱從直六世孫也高祖諱䎸縣監曾祖諱嗣宗文吏曹參議祖諱昉通德考諱文幹成均進士妣溫陽鄭氏縣監磁女公生而天姿穎悟自在齠齡己通經學及長以文章嗚於世無意於名利之場以參奉不仕隱居三角山下漕溪洞自號曰三角山人高臥林樊杜門讀書以道義二字爲守身之要盤桓於林壑之下嘯咏於泉石之間一點塵累不到於耳目大爲當也之矜式矣 肅廟潛邸時遊於漕溪洞 駐駕公宅或圍碁或談文遂爲布衣之交逮夫 臨御之後使之出任欲成都兪吁咈之樂而鶴書赴隴終不應起則乃以 御筆書漕溪瀑布四字刻之于石以表公之考般且以公謂有山水之樂而 特賜漕溪十里地後又加 賜五里地而竪加五里碑不泐于今於乎盛哉其密勿深契即光武之於子陵宋祖之於圖南而其奈富貴功名非公素志何易簀時有遺順以三角山人題之則尤可見公之素操超然塵埃矣當時往復 御札及公平日著述文蹟傳來於宗孫家矣中年回祿之變盡入於灰燼更無尺紙之可徵而遂使非常之蹟泯沒於世非但爲世道嗟惜其在後昆亦豈非竆天之恨耶今其故老相傳之說片紙遺來之蹟不足以闡揚公之卓異而幸或顯晦有時秉筆之君子特書闡幽則庶幾無萬一之恨於後昆否耶配令人安東權氏參議鵬女繼配令人礪山宋氏縣監時哲女生一男諱民瞻嘉善是生七男四女內外雲仍不可盡錄而今此所記雖不得顯揚先祖之美蹟俱以猥越仍無一言則百世之下誰有知公之道義哉姑著略干實蹟以俟立言君子云爾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참봉삼각산인공가장(參奉三角山人公家狀) 역문(譯文)
   -7세손(七世孫) 봉우(鳳雨) 술(述)

부군(府君)의 휘는 홍진(弘震)이요, 자는 언기(彦起)니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신라원신(新羅元臣) 휘 알평(謁平)을 시조(始祖)로 하고 고려말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의 후손이며 아조(我朝, 朝鮮) 초에 계천군(雞川君) 휘 종직(從直)의 6대손이다. 고조의 휘는 오(䎸)니 현감(縣監)이요, 증조의 휘는 사종(嗣宗)이니 문과(文科) 이조참의(吏曹參議)며 조의 휘는 방(昉)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고의 휘는 문간(文幹)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라. 비(妣)는 온양정씨(溫陽鄭氏)니 현감(縣監) 자(磁)의 따님이라.
공이 나면서 자질이 영특하여 어린 나이로 벌써 경전(經典)을 통달했고 장성하면서 문장(文章)으로 세상을 울렸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벼슬은 참봉(參奉)으로 그치고 삼각산(三角山) 아래 조계동(漕溪洞)에 숨어 살면서 스스로 삼각산인(三角山人)이라 호를 하고 산림(山林)에 높이 앉아 문을 닫고 글을 읽고 도의(道義) 두 글자로 몸을 다스리는 목표로 삼아 산림(山林)과 천석(泉石)에 깃들이니 한 점에 티끌도 침노(侵擄)를 못 하니 당세에 모범이러니 숙종(肅宗) 임금이 임금되기 전에 조계동(漕溪洞)에 놀 때 수레를 공의 집에 머물고 공과 더불어 바둑도 두고 혹 글도 의논하여 포의(布衣)의 교분을 맺었으니 숙종(肅宗)이 임금이 된 뒤에 공의 벼슬을 시키고자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으니 임금이 어필(御筆)로 조계폭포(漕溪瀑布)란 넉 자를 써서 돌에 새겨 공의 거처를 표하고 또 공이 산수(山水)에 낙(樂)이 있다 하여 특별히 조계십리(漕溪十里) 땅을 하사하고 뒤에 또 오리(五里) 땅을 더 주고 오리비(五里碑)를 세운 것이 지금까지 헐리지 않고 있으니 그 사귐이 깊은 것이 중국 한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와 엄자릉(嚴子陵)이요, 송태조(宋太祖)와 도남(圖南)과 같으나 공명(功名)을 싫어하는 공인지라 고결한 뜻을 굽히지 않으니 나중에 훈계를 남겨 삼각산인(三角山人)이라고 글씨를 써주니 더욱 공의 지조와 성품이 고결함을 볼지라. 그때 임금과 주고받은 서찰과 공의 저술한 글이 증손의 집에 간직해 두니 그 뒤 화재로 인하여 잿더미가 되고 한 장의 문적(文蹟)도 남은 것이 없으니 세상을 위해서도 애석한 일이나 후손에 있어서는 궁천(竆天)의 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옛 늙은이의 전하는 말과 각처 왕래하는 편지 자취가 있으나 이것이 공의 탁월한 행적(行蹟)에 몇분의 일도 안되나 다행히 어둡고 밝음이 때가 있어 뒷날 붓을 잡는 군자(君子)가 있어 묻혔던 공의 일을 세상에 밝힘이 있다면 자손의 한이 만분의 일이나 한이 풀릴까 한다.
배(配)는 영인(令人) 안동권씨(安東權氏)니 참의(參議) 붕(鵬)의 따님이요, 계배(繼配)는 영인(令人) 여산송씨(礪山宋氏)니 현감(縣監) 시철(時哲)의 따님이다. 1남을 생하니 휘 민첨(民瞻)에 벼슬은 가선(嘉善)이요, 이분이 7남 4녀를 생하니 안팎 자손을 다 기록지 못하고 이제 이 기록이 선조의 아름다운 모든 행적(行蹟)을 밝히지는 못하나 이 기록도 하지 않으면 뒷날 누가 공의 행적(行蹟)을 알 일인가. 약간의 실적(實蹟)을 적어 뒷날을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