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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공(嘉崖公) 이홍조(李弘肇) 묘갈명(墓碣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3. 10:34

□가애공(嘉崖公) 이홍조(李弘肇)

○字는 군원(君遠)이요, 號는 가애(嘉崖). 관(官)은 가의대부(嘉義大夫) 행한성부좌윤(行漢城府左尹) 차자(次子) 원종(原從) 일등훈(一等勳)으로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현종임인(顯宗壬寅) 12月24日生 영조갑자(英祖甲子) 9月17日卒 향년(享年) 83歲. 자유(自幼)로 효우(孝友)가 순독(純篤)하야 자란지병(慈䦨之病)에 열지규고(裂指刲股)함으로 장보재(章甫齋) 진영읍(陣營邑) 급수의이상미상달(及繡衣而尙未上達)하고 사수침(事遂寢)하니 가승통재(可勝痛哉)이 사적(事蹟)이 상재(詳載) 행장(行狀). ○墓는 위와 같이 유좌석물(酉坐石物)이 있음.
○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 ○墓는 합폄(合窆).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贈戶判嘉崖李公墓碣銘(증호판가애이공묘갈명)
–副學(부학) 李容殷(이용은) 撰(찬)

嘉崖李公以丙子節臣贈參議諱檍孫參奉諱慶昌子居於湖湖人士公在則服事之以禮公死則慕哀之以歌歷百數載其澤愈遠而愈不泯其愛逾久而逾不諼者盖以忠孝爲心仁義爲道卓然有吉君子風焉經曰事親孝故孝可移於忠事兄悌故順可移於長居家理故治可移於官是以君子行於內而名於後世儘乎其斯人之謂哉公之五世孫前縣令泰炯謀樹石於公墓袖狀請余曰先誼篤面雅深吾先祖墓文非公誰爲余雖蔑學莫敢固辭謹按公諱弘肇字君遠慶州人花軒尙書諱蔓實后縣監諱碩立曾孫也妣貞夫人平壤趙氏其考僉中慶哲公以 顯廟壬寅十二月二十四日生自幼潁敏讀書過目輒解得珍果懷而獻親非凡兒所及稍長率天性軒器局心不設畦畛行不喜文飾事父母愉色婉容左右就養靡不用極而力做農産裕而養甘旨之適口經煖之便體慈氏有患至苦劇輒刲股注血以甦幾殞此感天之誠也且與群弟篤友愛怡怡湛樂如塤箎之和至如待人接物脫略苛細辭氣溫正未有發人過失及其親歿執喪踰禮襄奉後不計春糧之遠朔望省謁雖寒暑不廢攀栢號泣視昔王傽元一矣制闋慨然歎曰曩吾怡産爲其養也財今焉用於是樂施爲善事棺槨衣襚以待送死之不及時者力不能嫁女取婦則爲治其資裝歲大侵設私脤救人命可以計萬口亦其數累年而親戚也朋黨也日支米薪者尤不可量其後丁酉之大荒傾儲均施以濟溝壑之塡比前益勤出種資勸耕俾得終飽而上念國家之恤民救急周施如是屢屢此乃忠厚之道也其時鄕中前縣監李喜相進士朴暾與諸章甫具狀于營邑及御史金公興慶己有嘉尙之稱而有具無時尙未得闡掦可勝惜哉 英廟甲子九月十七日卒距壬寅八十三歲葬于德山金峙先塋下坐酉原配貞夫人南原尹氏直長就甲女壬寅四月二十一日生壬子七月十六日卒合祔如禮男長喜夏嘉善守慈山府次喜集嘉善宰穩城府策奮武一等勳次喜成喜福喜輔女靑松沈得謙迎日鄭習良察訪仁同張懿紹武科其餘宗支內外孫多有顯達繁不盡錄總累百人嗚呼公以孝悌忠信之道事親友弟愛人治家無不盡節而寬仁好施以救邦邑之民亦曰分憂之忠也然則向謂經文之義信其然乎容殷聞而悅知而慕欲使後世之人知公之爲何如人銘曰 孝悌力田淳風厚俗忠良之材使可邦國仁愛喜施君子謂德然後爲賢人皆鮮能有此盡善得見於公萬家洪佛一門范庄徵諸輿誦彰斯嘉言德豊舊宅金峙先墳吁嗟鐫石不泐其傳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증호판가애이공묘갈명(贈戶判嘉崖李公墓碣銘) 역문(譯文)
   -부학(副學) 이용은(李容殷) 찬(撰)

가애(嘉崖) 이공(李公)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시 사절신(死節臣)으로 참의(參議) 벼슬을 받은 휘 억(檍)의 손자요, 참봉(參奉) 휘 경창(慶昌)의 아들로 호(湖)에 살 때 호(湖)의 인사들이 공이 살아있을 때는 모든 일을 예(禮)로 하는데 복종했고 공의 죽은 뒤에는 공을 애모하여 노래를 부르니 백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공의 은택(恩澤)이 유전하여 없어지지 않은 것은 공의 충효(忠孝)로 마음을 갈고 인의로 도(道)를 삼아 옛날 군자(君子)의 풍토가 있는지라 경서(經書)에 이르되, 부모 섬기기를 효(孝)로 하니 효(孝)는 충(忠)이 될 수 있고 형(兄)을 섬기기 공경(恭敬)으로 하는 고로 남의 어른에게 미칠 수 있으며 집에 있을 때는 집을 잘 다스리니 법이 관(官)에도 옮길 수 있음이라.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안으로 행했는데 이름은 후세에 전하니 공을 두고 이름일진대 공의 5세손 전현령(前縣令) 태형(泰炯)이 공의 묘소에 입석을 계획하고 나에게 청해 가로되, “선대부터 정의가 두텁고 안면이 깊으니 우리 선조 비문(碑文)은 공이 아니면 누가 하리오” 하니 내 비록 학문이 천박하나 사양치 못하고 쓰노니 공의 휘는 홍조(弘肇)요, 자는 군원(君遠)이고 경주인(慶州人)이니 화원(花軒) 상서(尙書) 휘 만실(蔓實)의 후손이요, 현감(縣監) 휘 석립(碩立)의 증손이라.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니 첨중추(僉中樞) 경철(慶哲)의 따님이다.
공이 현묘(顯廟) 임인(壬寅) 12월 24일에 출생하니 어릴 때부터 영민(穎敏)하여 글을 읽을 때 눈을 한번 보면 그 뜻을 해석했고 과일도 귀중한 것을 얻으면 부모님께 갖다 드리니 보통 아이들은 따르지 못하더라. 점점 장성하면서 천성(天性)이 헌앙(軒昂)하고 기국(器局)이 넓어 마음과 행동에 허식을 싫어하고 부모를 섬기되 화한 빛과 유순한 얼굴로 봉양하고 농사로 여유가 있으니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맞는 의복을 끊지 않으며 모친이 편찮을 때 손을 끊어 피를 입에 넣어 천명(天命)을 연장하니 이는 하늘이 감동할 효행(孝行)이라. 또 형제간에도 우애(友愛) 간 돈독(敦篤)하여 항상 화기애애(和氣靄靄)하고 타인을 대할 때도 까다롭고 번거로운 말과 행동은 버리고 따뜻한 말과 정직한 마음으로 남의 과실은 드러내지 않으며 부모가 죽은 뒤에 예(禮)에 따라 집상(執喪)하고 장사 뒤에는 삼십 리 길에 초하루 보름마다 성묘하되 한서(寒暑)를 불문하고 다니며 호읍(號泣)하니 옛날 왕위원(王傽元)과 같다 하더라. 삼년상을 끝내고 탄식해 가로되 옛날에 알뜰한 살림을 모은 것은 그 뜻이 부모 봉양에 있었으나 지금 재물(財物)은 흩어 좋은 일만 하되 널판과 염습(殮襲)할 옷을 만들어 가난한 초상집을 도우며 가난해서 며느리를 못 본다든지 혹은 딸을 출가시키지 못하는 사람에는 혼인에 필요한 예물을 사서 도와주고 흉년이 들면 곡식을 풀어 굶주린 사람을 도와 인명을 구한 것이 만여 명에 달하며 몇 해를 두고 친척과 붕우(朋友)에 양식과 나무까지 지급한 것이 다 헤아릴 수 없고 종자를 나누어 주고 농사를 권장하여 풍년을 만나 함포고 복케하니 이것이다. 충후(忠厚)한 행동이라 그때 향중(鄕中)에 전에 현감(縣監)을 지낸 이희상(李喜相)과 진사(進士) 박돈(朴暾)이 향내 유지와 함께 사실을 기록하여 감영(監營)과 어사(御使)에게 알렸으니 김공(金公) 흥경(興慶)이 가상(嘉尙)하고 칭찬은 하면서 아무 포상이 없으니 아까운 일이다. 영묘(英廟) 갑자(甲子) 9월 17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83세라. 덕산(德山) 금치(金峙) 선영하(先塋下) 유좌(酉坐)에 안장하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니 직장(直長) 취갑(就甲)의 따님으로 임인년(壬寅年) 4월 21일에 출생하여 임자년(壬子年) 7월 16일에 졸하니 공의 묘소에 합폄(合窆)하다. 장남은 희하(喜夏)니 가선(嘉善)에 자산부사(慈山府使)를 지냈고 차남은 희집(喜集)이니 가선(嘉善)에 온성부사(穩城府使)를 지내고 분무(奮武) 1등훈(一等勳)에 책봉되다. 다음은 희성(喜成)·희복(喜福)·희보(喜輔)요, 딸은 청송(靑松) 심득겸(沈得謙)과 영일(迎日) 정습량(鄭習良)과 인동(仁同) 장의소(張懿紹)에 출가하다. 내외손(內外孫)이 수백 명이라 기록지 못한다.
공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道)로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남을 사랑하고 집을 다스리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 베풀기를 좋아하여 향중(鄕中) 백성을 구원하니 근심을 논하는 중심이라. 용은(容殷)이 듣고 대단히 즐겁게 사모해서 후세 사람에게 공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리노라.
명왈(銘曰), 부모에 효(孝)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농사에 힘쓰니 순박하고 후한 풍속(風俗)이라 충량(忠良)한 재목은 나라에 쓰임 직하고 어질고 사랑으로 베풀기를 좋아하니 군자(君子)의 덕(德)이라 이르러라. 그런 뒤에야 어진 이가 되니 사람마다 실행하기 어렵도다. 어려운 일을 다 한 사람은 공에서 보았도다. 만민(萬民)을 살린 부처님이요, 한 문중(門中)에 범장(范庄)이라 사람마다 송덕(頌德)하니 이 글 짓는데 충분한 증거로 덕풍(德豊) 옛집과 금치(金峙) 묘소에 돌에 새겨 세우나니 길이 헐리지 말지니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