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중종실록] 죄인들을 공초하다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2. 10:45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윤1월 26일 경오 1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죄인들을 공초하다


○庚午/趙廣佐供曰: "本月二十日間, 因借家事, 往朴耕家, 曰: ‘汝知文瑞龜乎?’ 臣答曰: ‘是我妻三寸叔也。’ 曰: ‘余亦知是汝三寸也。 今到金湜家, 可往見之。’ 臣與, 偕往家, 相打話, 大槪論文字而已, 別無他語。 但云: ‘儒生等拘於科擧之學, 不硏窮性理。’ 余乃問爲學向方, 答曰: ‘無如熟讀《中庸》《大學》。’" 再供曰: "更思之則臣以借家讀書事, 往朴家, 曰: ‘文瑞龜今到金湜家, 汝可與我。’ 偕往見之, 卽與偕往, 則文瑞龜趙光祖果先至矣。 臣等問, 以爲學之方, 曰: ‘學者當讀《庸》《學》, 學者所以業未高明者, 科擧之學, 爲之累也。’ 瑞龜曰: 古有鄕擧里選之法, 今之科擧可罷乎? 循資之法, 亦可勿用乎? 庶孽有才藝者, 可擢用乎?’ 答曰: ‘鄕擧里選之法, 非三代之治, 不能行矣。 苟有才藝者, 當躐等用之矣。 我國貴賤名分其嚴, 然有才能者, 則雖賤亦可用之。’ 又曰: ‘柳子光朴元宗等, 作弊殊甚, 以鄭眉壽爲相, 則風俗自然可變矣, 金勘李繼孟授以崇品, 則善治可臻。 金公著李長吉等, 雖負罪名, 亦可用之矣。’ 臣聞此等語而已, 他不能盡記。 李長吉供曰: "退計十五日間, 及昨日, 往見金公著, 初問針灸事, 後因借鷹事往還而已, 別無他語。" 命栲訊二次, 不服。 趙光祖供曰: "退計七八日間, 臣往文瑞龜家, 瑞龜留臣同宿, 翌日早朝, 携臣到朴耕家。 瑞龜趙廣輔所言, 語曰: ‘果有是事否?’ 曰: ‘有之。 然欲擧大事, 無操兵權者, 事將不集。 李繼孟欲說此事於柳順汀, 而勢難不果耳。 鄭眉壽金勘金公著李長吉, 則已與知之。 金公著亦已言於柳崇祖矣, 南袞則聞此事, 而驚懼。’ 云云, 此外他語, 未能悉記。 傳于推官曰: "朴耕所言, 上有疾之語, 當窮極推之。" 推官僉啓曰: 事干人, 皆歸一於朴耕, 而則不服, 請更刑問。 刑問又不服, 則用烙刑何如。 【烙刑事, 柳子光發也。】 且柳崇祖金公著曰: ‘此事使湯老, 潛啓于內, 然後爲之可也。’ 然湯老難信等語及出家藏《象緯考》, 指太白星入太微垣’, 則有兵事處以示公著等事, 亦當刑推。" 上依啓。 金湜供曰: "本月二十一日, 文瑞龜趙光祖等, 先到臣家, 瑞龜曰: ‘朴耕當至, 須炊食, 食我等及朴耕。’ 有頃, 趙廣佐繼至, 共坐庭中而食。 曰: ‘男兒生世, 當立大事。 柳子光興戊午之亂, 朴元宗奔走於利, 欲宜除此兩人, 以鄭眉壽爲政丞。 金勘李繼孟亦可授大任。’ 又曰: ‘天變屢作, 人心厭之, 要當扶持。’ 又曰: ‘金公著李長吉三兄弟、柳崇祖亦與焉。’ 又曰: ‘崇祖公著交親。’ 又曰: ‘此意言於南袞, 聞之戰慄。’ 又曰: ‘功臣等奔走於利欲之中, 何其樂哉?’ 又曰: ‘宗親宜用之於六曹, 且庶孽不見用, 故自知其分, 不自修飭, 此豈樂乎? 可許通用。’ 又曰: ‘科擧與循資格, 亦當罷之。’ 此等言話, 非徒臣聽之, 凡在座者, 無不聞知。" 柳崇祖供曰: "公著疾臣摘發其陰謀, 以必使湯老爲先導之言, 爲臣所言。 公著是日, 欲考星變, 臣出示《文獻通考》《象緯考》一冊, 則公著方考視。 臣更思之, 星文付冊, 不可示之於人, 故卽還奪取矣。 臣與公著, 比隣而居, 雖屢相從, 得聞其言久矣。 然無證人, 未卽啓達, 今始與南袞, 同議啓達。" 命栲訊一次, 不服。 朴耕栲訊二次後, 供曰: "去冬金公著, 被推于司憲府, 在永同京邸, 臣往見, 公著語臣曰: ‘朴元宗柳子光等, 將爲不軌, 去此二人, 以鄭眉壽爲相, 則朝廷當大治。’ 臣答曰: ‘如此則好矣。’ 此外別無所言。" 金公著栲訊一次, 杖至二十四度, 供曰: "其實日不記, 前年冬, 朴耕語臣曰: ‘今金勘爲兵曹判書, 鄭眉壽府院君, 且有李繼孟可與共事。 如使尹湯老高原尉輩, 具由道達于內, 而與朝廷共議爲之, 則其去朴元宗柳子光何難?’ 臣言於李長吉曰: ‘汝何不下鄕家, 而在京乎?’ 長吉答曰: ‘胸背受箭亦同。 寧在京而死, 何必下卿乎?’ 又曰: ‘得與右議政、吏曹判書爲事, 則事可成也。’ 臣將此意, 就說於鄭眉壽金勘處, 皆答曰: ‘有過失, 朝廷臺諫論駁, 則可也? 如爾所言, 是乃盜賊事也, 愼勿復言。’ 臣再度言之, 其所答如前。 朴耕又曰: ‘余告其事于大司憲, 使通于右議政、吏曹判書, 則答曰: 「此不可言之時。」’ 臣與柳崇祖比隣, 言其事于崇祖已久。" 至用烙刑, 不服。 朴耕供曰: "金公著以臣言, ‘金勘爲兵曹判書, 鄭眉壽爲府院君, 且有李繼孟可與共事, 如使尹湯老高原尉輩, 具由道達于內, 而如朝廷共議爲之, 則其去朴元宗柳子光何難。’ 又以臣言, ‘得如右議政、吏曹判書爲事, 則事可成也。’ 此則實臣所言也。 其曰: ‘告其事于大司憲, 使通于右議政、吏曹判書, 則答曰, 此不可言之時。’ 云者, 非臣所知也。 但退計十五日間, 臣往李繼孟家, 談話間言曰: ‘儒生等, 以柳子光前者多殺文士, 今又懼及於禍, 怨之已甚, 何不除之?’ 繼孟叱曰: ‘汝妄人。 宜退去。’ 臣卽還家。" 推官等僉啓曰: "朴耕事證皆實, 而不服。 且文瑞龜曰: ‘汝告此事, 所成何事?’ 【當推問時, 耕亟目視瑞龜, 再三叱勑有是言。】 此語綢繆。 請用烙刑。" 傳曰: "依啓。" 卽更啓曰: "朴耕金公著等相議事, 雖開端, 而不告以實, 請竝烙刑。" 上依啓。 柳子光啓曰: "臣前於戊午年啓大事時, 非臣獨啓, 臣與盧思愼尹弼商韓致亨, 共議啓之。 其時李宗準茂豐正被罪竄(滴) 〔謫〕 , 共到北靑地, 宗準茂豐正曰: ‘吾出來時, 見臺諫, 皆曰: 「柳子光何以知史冊所載, 而發此事? 吾等欲駁擊之。」 未久而汝乃知之。’ 以是觀之, 非但其時, 歸咎於小臣, 至今人人, 皆向我怨甚。 且近者柳崇祖被駁時, 臣獨論啓, 以此崇祖向臣切齒腐心, 欲與臺諫, 吹毫覓疵, 每以罪我爲事, 而未得其端, 未果耳。 臣已錄如此之事欲達, 而恐朝廷物議, 以我爲過, 故未啓耳。 然心常未安, 每懷危懼耳。" 傳曰: "戊午年之事, 知而告之, 乃忠臣也。 以其忠於君, 故爲在下憸小之所忌。 今者奸細之徙, 欲剪除元勳, 因事起事, 當窮極治之。" 推官等啓曰: "金公著至今不服, 將欲窮推。 且其供招, 再往鄭眉壽金勘等處說道, 而不答云云, 而不以直啓。 如此擧事, 則參謀者豈獨此乎? 歷歷推問, 則自然見矣。 且鄭眉壽金勘等大臣也, 不待再度往說, 卽來啓之可也。" 傳曰: "事苟至此, 其黨必多。 當窮極推之。" 朴耕栲訊四次, 杖至二十度, 加以烙刑, 供曰: "金公著之外, 他無共謀人矣。 其實前日, 臣往語大司憲李繼孟曰: ‘除去兩相之事, 通于右議政、吏曹判書處可也。’ 答曰: ‘此不可言之時。’ 臣與宗親永貞守金陵守等, 素善, 知其可人, 故前與文瑞龜相話時, 臣云: ‘宗親中可爲六曹堂上、郞廳者非一。’" 推官僉啓曰: "朴耕雖已服招, 而與金公著招辭, 或同或異, 且李繼孟鄭眉壽, 交結非常, 凡事專不以實告。 請加刑。" 命依啓。 推官等啓曰: "朴耕所引事干永貞守金陵守等, 拿來推問何如?" 依啓。 當朴耕等獄起, 李長城長培兄弟亡命, 依强盜例, 懸賞購捕。


조광좌(趙廣佐)가 공초에서 말하기를,

"이 달 20일께, 집을 빌리는 일 때문에 박경(朴耕)의 집에 갔더니, 이 말하기를, ‘네가 문서귀를 아느냐?’ 하기에 신이, ‘그는 나의 처삼촌이다.’ 하니, 경의 말이, ‘나도 그가 너의 처삼촌인 줄을 안다. 지금 김식의 집에 왔으니, 가 보자.’고 하므로, 신이 과 함께 의 집으로 가서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문자에 관한 것을 논하였을 뿐 별로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다만 의 말이, ‘유생들이 과거 공부에 구애되어 성리(性理)를 연구하지 않는다.’ 하므로, 내가 학문하는 방향을 물으니, 이 대답하기를, ‘《중용(中庸)》·《대학(大學)》을 숙독하는 것이 제일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재차 공초에서는,

"다시 생각하니, 신이 집을 빌려 글 읽는 일로 박경의 집에 갔었는데, 이 말하기를, ‘문서귀가 지금 김식의 집에 왔으니, 나와 함께 가 보자.’ 하므로, 곧 함께 갔더니, 문서귀·조광조(趙光祖)가 과연 먼저 와 있었습니다. 신 등이 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이 말하기를, ‘학자는 마땅히 《중용》·《대학》을 읽어야 한다. 학자의 학업이 고명해지지 못하는 것은, 과거 공부가 누가 되기 때문이다.’ 하므로, 서귀에게 묻기를, ‘예전에는 향리에서 선거하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의 과거 제도는 파하여야 할 것인가? 자격을 따라 쓰는 법 역시 쓰지 말아야 할 것인가? 서얼(庶孽) 중에 재주있는 자는 뽑아 써야 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의 대답은, ‘향리 선거법은 삼대(三代)092) 의 정치가 아니니 행할 수 없다. 정말 재주가 있는 자라면 등급을 건너 뛰어 등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는 귀천의 명분이 매우 엄하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천하더라도 써야 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유자광(柳子光)·박원종(朴元宗) 등은 작폐가 아주 심하니, 정미수(鄭眉壽)로 정승을 삼으면, 풍속이 자연 변할 수 있을 것이요, 김감(金勘)·이계맹(李繼孟)에게 숭품(崇品)을 제수하면, 좋은 정치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김공저(金公著)·이장길(李長吉) 등도 죄명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쓸 만하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런 말을 들었을 뿐, 다른 것은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장길은 공술하기를,

"15일쯤 전과 어제, 김공저를 가서 보았지만, 처음에는 침구(針灸)에 관한 일을 물었고, 뒤에는, 매[鷹] 빌리는 일로 왕복하였을 뿐 별로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니, 명하여 2차의 고신(栲訊)을 하게 하였는데, 자복하지 않았다.

조광조(趙光祖)는 공술하기를,

"7∼8일쯤 전에 신이 문서귀의 집에 갔는데 서귀가 신을 만류하여 함께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신을 데리고 박경의 집으로 갔습니다. 서귀조광보(趙廣輔)가 하던 말을 가지고 에게 말하기를, ‘과연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니, 의 말이, ‘있었다. 그러나 큰일을 하려는데, 병권을 잡은 자가 없으니, 일이 장차 잘 안 될 것같다. 이계맹(李繼孟)이 이 일을 유순정(柳順汀)에게 말하려 하였으나, 형편이 어려워 못하였다. 정미수·김감·김공저·이장길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김공저유숭조에게 말하기도 하였으며, 남곤(南袞)은 이 사실을 듣고서 놀라고 두려워한다.’ 하였습니다. 그 밖의 다른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추관(推官)에게 전교하기를,

"박경의 말한 바, 상에게 병이 있다는 말은, 끝까지 추문(推問)하여야 하겠다."

하니, 추관들이 아뢰기를,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박경에게로 귀일(歸一)되는데 이 불복하니, 다시 형문(刑問)해야 하겠습니다. 형문을 해도 불복한다면 낙형(烙刑)을 쓰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낙형에 대한 말은 유자광이 꺼낸 것이다.】 또 유숭조김공저에게 말하기를 ‘이 일은 탕로(湯老)로 하여금 비밀히 대궐 안에 아뢰게 한 뒤에 하는 것이 가하지만, 그러나 탕로를 믿기 어렵다.’는 등의 말과 집에 간직하고, 있는 《상위고(象緯考)》093) 를 내놓고, ‘태백성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면 병란이 있다.’는 대목을 가리키며 공저 등에게 보여준 일 역시 형추(刑推)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김식(金湜)은 공술하기를,

"이 달 21일에 문서귀·조광조 등이 먼저 신의 집에 왔는데, 서귀가 말하기를, ‘박경(朴耕)이 올 것이니, 우리들과 박경에게 밥을 지어 달라.’ 하더니 좀 있다가 조광좌(趙廣佐)와 함께 뒤따라 와서 함께 뜰에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이때 이 말하기를, ‘남아가 세상에 났으면 큰일을 하여야 한다. 유자광(柳子光)은 무오년의 난094) 을 일으킨 자이고 박원종(朴元宗)은 이욕에 분주하니, 이 두 사람을 제거하고, 정미수(鄭眉壽)로 정승을 삼아야 하겠다. 김감·이계맹 역시 큰 소임을 맡길 만하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천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이반하니 어떻게든지 부지하여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공저·이장길 두 형제와 유숭조 역시 참여한다.’ 하였고, ‘숭조공저와 친교가 있다.’고도 했고, 또 ‘이 뜻을 남곤(南袞)에게 말하였더니, 이 듣고 두려워하며 떨었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공신들이 이욕에 분주하니, 무엇이 그리 즐겁겠느냐?’ 하고, 또 ‘종친(宗親)도 육조(六曹)에 써야 하며 또 서얼(庶孽)이 등용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신분을 생각하고 스스로 수신하고 칙려(飭勵)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좋은 일인가. 허통(許通)하여 써야 한다.’ 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과거의 자격을 따라서 사람 쓰는 법을 역시 파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런 말들은 신만이 들은 것이 아니라, 자리에 있던 사람이 모두 들은 것입니다."

하고, 유숭조는 공술하기를,

"공저는 신이 그의 음모를 적발할 것을 걱정하여 반드시 탕로로 길잡이를 삼아야 한다.’는 말을 신이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날 그가 성변(星變)을 상고하려 하므로, 신이 《문헌통고(文獻通考)》《상위고(象緯考)》 1책을 내어 보이니, 공저가 상고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다시 생각하니, 성문(星文)이 붙은 책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는 일이므로 곧 도로 빼앗았습니다. 신은 공저와 이웃해서 살므로 자주 상종하여 그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없으므로 곧 계달하지 못하였으며, 지금 와서야 남곤과 함께 의논하고 계달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명하여 1차 고신(拷訊)하게 하였으나, 불복하였다.

박경이 2차 고신을 받은 뒤에 공술하기를,

"지난 겨울 김공저(金公著)가 사헌부에서 심문을 받으며, 영동 경저(永同京邸)095) 에 있었는데, 신이 가 보니, 공저가 신에게 말하기를, ‘박원종·유자광 등이 장차 반역을 하려 하니 이 두 사람을 제거하고 정미수(鄭眉壽)로 정승을 삼는다면, 조정이 크게 다스려질 것이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다.’ 하였을 뿐, 그밖에는 별로 말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으며, 김공저는 1차 고신을 받고 형장(刑杖) 24도에 이르러 공술하기를,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전년 겨울에 박경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제 김감(金勘)이 병조 판서가 되고 정미수가 부원군이 되었으며, 또 이계맹(李繼孟)이 있으니, 일을 함께 할 만하다. 만일 윤탕로(尹湯老)·고원위(高原尉) 등으로 하여금 사유를 갖추어 궐내에 진달하게 하고 조정과 함께 의논해서 한다면, 박원종·유자광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이장길(李長吉)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시골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있는가?’ 하니, 장길의 대답이, ‘가슴에나 등에나 화살 맞는 것은 같다. 차라리 서울에 있다가 죽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시골로 내려갈 것인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耕)은 말하기를, ‘우의정·이조 판서와 함께 일을 한다면 성공할 수가 있다.’ 하므로, 신이 그 뜻을 정미수·김감에게 가서 말하였더니 모두 대답하기를, ‘·가 과실이 있으면, 조정이나 대간(臺諫)이 논박하면 될 것 아닌가? 네가 말하는 것 같이 한다면 이것은 도적의 일이니, 아예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재차 말하였으나, 대답은 전과 같았습니다. 박경은 또 말하기를, ‘내가 그 일을 대사헌에게 고하여, 우의정과 이조 판서에게 통하여 하니, 대답이,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때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은 유숭조(柳崇祖)와 가까운 이웃에 있으므로 그 일을 숭조에게 말한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하였다. 그에게 낙형(烙刑)까지 썼으나 불복하였다. 박경은 공술하기를,

"김공저는 신이, ‘김감은 병조 판서가 되고 정미수는 부원군이 되었으며, 또 이계맹이 있어 일을 함께 할 만하니, 만일 윤탕로·고원위 등으로 하여금 사유를 갖추어 귈내에 진달케 하고, 조정에서 함께 의논하여 한다면 박원종·유자광을 제거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했고 또 신이 ‘만일 우의정·이조 판서와 함께 일을 하게 되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사실 신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대사헌에게 고하여 우의정·이조 판서에게 통하게 하였더니,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때라고 대답하더라.’ 하는 말은 신의 아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15일쯤 전에, 신이 이계맹(李繼孟)의 집에 가서 담화하던 중 말하기를, ‘유생 등이, 유자광은 전에 문사를 많이 죽인 사람이라 지금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다면서 원망을 하고 있는데 어찌 제거하지 않는가?’ 하였더니, 계맹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망령된 사람이다. 물러가라.’ 하므로, 신이 곧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추관(推官)들이 함께 아뢰기를,

"박경은 사실 증거가 모두 실지인데도 끝내 불복합니다. 또 문서귀(文瑞龜)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 일을 고하여 된 일이 무엇이냐?’ 【심문할 때, 경이 성낸 눈으로 서귀를 보며, 재삼 질책하면서 이 말을 했음.】 하니, 이 말이 이상스럽습니다. 낙형(烙刑)을 시행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는데, 곧 다시 아뢰기를,

"박경·김공저 등이 상의한 일은 단서가 보였지만,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니, 다 함께 낙형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역시 아뢰 대로 하라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 무오년096) 에 대사를 아뢸 때 혼자서 아뢴것이 아니라,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과 함께 의논해서 아뢴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종준(李宗準)무풍정(茂豊正)과 함께 죄를 입어 귀양갔었는데, 함께 북청(北靑) 땅에 이르러 종준무풍정에게 말하기를, ‘내가 떠나올 때 대간을 만나보니 모두들, 「유자광이 어떻게 사책(史策)에 실린 것을 알고 이 일을 발설하였을까? 우리가 장차 논박하려 한다.」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그때에만 소신에게 허물을 돌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은 모두 나를 향하여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근자에 유숭조(柳崇祖)가 논박을 당할 때, 신이 혼자서 논계(論啓)하였더니, 이 때문에 숭조는 신에게 절치 부심(切齒腐心)하며, 대간들과 더불어 조그만 흠집도 찾아내려 하며, 매양 나를 죄주는 것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렇지만 단서를 잡지 못하여 아직 실행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벌써부터 이런 일을 적어서 계달하려 하였지만, 조정의 물의가 나를 잘못한다 할까 두려워서 아직까지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항상 미안하고 위구(危懼)스런 마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무오년의 일은 알고서 고하였으니 충신이다. 인군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아래 있는 소인들의 꺼림을 받는 것이다. 이번에 간세(奸細)한 무리들이 원훈(元勳)을 없애려 어떤 일을 가지고 일을 만드니, 끝까지 다스려야 하겠다."

하였다.

추관들이 아뢰기를,

"김공저가 지금도 불복하니, 끝까지 추문코자 합니다. 또 그 공초에, ‘두 번 정미수·김감 등에게 가서 말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하며, 바른 대로 아뢰지 않습니다. 이런 거사라면 모의에 참여한 자가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일일이 심문한다면 자연 나타날 것입니다. 또 정미수·김감 등은 대신이라, 두 번 가서 말하는 것을 기다릴 것 없이 곧 와서 아뢰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일이 정말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그 당이 많을 것이다. 끝까지 캐어 심문하여야겠다."

하였다.

박경(朴耕)은 4차 고신(拷訊)하고, 형장을 20도까지 때리며 낙형을 가하였더니, 공술하기를,

"김공저 외에는 달리 공모한 사람이 없습니다. 실은 전일 신이 대사헌 이계맹에게 가서 말하기를, ‘· 두 정승을 제거하는 일을 우의정·이조 판서에게 통하는 것이 좋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아직 말할 수 없는 때다.’ 하였습니다. 신이 종친 영정수(永貞守)·금릉수(金陵守) 등과 원래 잘 지냈고, 또 그가 쓸 만한 사람인 줄을 알기 때문에, 전에 문서귀(文瑞龜)와 이야기할 때에 신이, ‘종친 중에도 육조의 당상·낭청(郞廳)이 될 만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추관들이 함께 아뢰기를,

"박경이 자복 공초하기는 하였지만, 김공저와 초사 내용이 혹은 같고 혹은 다르며, 또 이계맹·정미수와 교제가 특별하여, 모든 일을 전혀 사실대로 고하지 않습니다. 형벌을 더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하게 하였다.

추관들이 아뢰기를,

"박경이 말한 일에 관련된 영정수(永貞守)·금릉수 등을 잡아다 심문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역시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박경 등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장성(李長城)·이장배(李長培) 형제는 망명하였는데, 강도의 예에 따라 상금을 걸어 잡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1장 A면 【국편영인본】 14책 119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註 092]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의 3왕조.
[註 093] 《상위고(象緯考)》 : 천문 서적.
[註 094] 무오년의 난 : 무오 사화.
[註 095] 영동 경저(永同京邸) : 지방 각 고을에서 서울에, 사무를 연락하거나 대행(代行)하는 사람들을 두어 일을 하던 곳. 김공저(金公著)가 임시로 들어 있던 영동 경저(永同京邸)는 곧 영동현의 일을 보던 서울 집을 말함일 것이다.
[註 096] 무오년 : 연산군 4년. 무오 사화가 난 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1126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