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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5세손 노곡공 이흠] 成均生員府君行略(성균생원부군행략)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1:24

□용재공(慵齋公) 5세손 노곡공(老谷公) 이흠(李欽)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②만귀헌공(晩歸軒公) 민석(民奭) → 4世孫 선언(善彦) → 5世孫 노곡공(老谷公) 흠(欽)

 

 

成均生員府君行略(성균생원부군행략)
-九世孫(9세손) 在祺(재기) 書(서)

 

府君諱欽字若昊自號老谷公於慵齋先生實爲五世孫曾祖諱胤讓進士僉樞祖諱民奭考諱善彦皆隱德不耀妣商山千氏賢而有範以萬曆末某甲之月日生公公早襲家庭文藝夙就宗黨稱詡粤自戊午禍後門運零替同堂至親稍稍離散公亦無意於永嘉舊基陪兩親依托於商山外第旋寓功東之以音村以其王考丘墓之鄕也奄遭外艱葬于白雲山先塋下居廬終制後入於牟西之老多里仍居焉事母至孝及其遭艱擇葬家後朝夕上墓不以雨雪而廢焉人皆稱道自强力學累中鄕解竟捷成均生員自是專心經學杜門講道在近人士之從公請業者甚衆絃誦不絶遂使樵牧之社不變文學之藪蓋公之力也間甞優遊於錦溪之孤栢堂北是宗先賢聾軒先生杖屨之所而其遺風尙存日與後學長德聯床請磨實多資益之工焉竟以天年考終用遺命繼葬于先妣墓階下配密陽張氏墓從公合附有二子長曰瑭通政次曰暹大嘉善後孫繁衍世傳詩禮不墜故家餘範往在丁未建景仰齋於墓下歲一享祀焉

 


●성균생원부군행략(成均生員府君行略) 역문(譯文)
-9세손 재기(在祺) 서(書)

 

부군(府君)의 휘는 흠(欽)이요, 자는 약호(若昊)며 호는 스스로 노곡(老谷)이라 하니 용재선생(慵齋先生)에 5대손이 된다. 증조의 휘는 윤양(胤讓)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에 대사성(大司成)이요, 조의 휘는 민석(民奭)이며 고위의 휘는 선언(善彦)이니 다 숨어서 드러나지 않는다. 비위(妣位)는 상산천씨(商山千氏)라 ‘어질고 규범이 있었다’ 한다. 공의 생년월일은 미상이다.
공은 일찍 가훈(家訓)을 받아 문필(文筆)이 성숙했고 족친(族親) 간에 칭송(稱頌)이 많았다. 무오년(戊午年) 사화(史禍) 뒤로 가문이 쇠퇴하여 집안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공동 안동(安東) 옛터에 살 생각이 있어 양친을 모시고 상산(商山) 외가(外家)에 의탁하여 공동(功東) 땅 이음촌(以音村)에 의거하니 그곳은 조부의 묘소가 있는 곳이더라. 또 부친상을 당해서 백운산(白雲山) 선산 아래 장사를 지낸 후 탈상을 한 뒤에 모서(牟西) 땅 노다리(老多里)에 가서 살았다. 모친 섬기기를 지극히 효도로 하다가 별세하니 집 뒤에 장사를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가서 성묘할 때 눈비를 가리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다 장하다고 칭송하다.
스스로 학문을 힘써 닦아 향시(鄕試)에 급제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된 후 마음에 경학(經學)에 열중하여 문(門)을 닫고 도를 닦으니 가까이 사는 인사들이 공에 배움을 청하는 자 많아서 들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초동목수(樵童牧豎)의 마을이 문학(文學)하는 마을로 변하니 모두가 공의 힘이라. 여기 있으면 금계(錦溪)의 고백당(孤栢堂)에 노니 이곳은 종친의 선현(先賢) 농헌선생(聾軒先生)이 노닐던 곳인데 그 유풍(遺風)이 상금(尙今)까지 남아 있어서 날마다 후학(後學) 장덕(長德)들이 얼굴을 맞대고 갈고 닦으니 공무(公務)에 보탬이 많았다. 마침내 천명(天命)대로 살다 돌아가니 유언(遺言)을 따라 선비묘(先妣墓) 아래에 안장하다.
부인은 밀양장씨(密陽張氏)니 묘는 공과 합편(合窆)하다. 2남이 있으니 장남에 당(瑭)이니 통정(通政)이요, 다음은 섬대(暹大)니 가선(嘉善)이라. 후손이 번성하고 대대로 시례(詩禮)를 계승하여 가법(家法)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지나간 정미년(丁未年)에 경앙재(景仰齋)를 묘 아래 세우고 해마다 한 번씩 제사(祭祀)하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