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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2세손 기남공 이상민]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府君行略(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부군행략)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1:38

□용재공(慵齋公) 12세손 기남공(杞南公) 이상민(李相敏)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②만귀헌공(晩歸軒公) 민석(民奭) → 4世孫 선언(善彦) → 5世孫 노곡공(老谷公) 흠(欽) → 6世孫 ②가선공(嘉善公) 섬대(暹大) → 7世孫 ②통정공(通政公) 계봉(戒鳳) → 8世孫 ②참봉공(參奉公) 중걸(重杰) → 9世孫 증군자감정공(贈軍資監正公) 자철(滋喆) → 10世孫 증호조참의공(贈戶曹參議公) 종무(鍾茂) → 11世孫 ①증공조참판공(贈工曹參判公) 범우(範雨) → 12世孫 ①기남공(杞南公) 상민(相敏)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府君行略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부군행략)
-孫(손) 在祺(재기) 書(서)

 

府君諱相敏字元浩慵齋先生後成均生員諱欽之七世孫高祖諱重杰參奉曾祖 贈軍資監正諱滋喆祖贈戶議諱鍾茂考 贈工參諱範雨連三代 贈職以公之追恩也妣慶州崔氏仁同張氏幷有八男時稱荀龍公居最長以 純廟辛卯公生于鎭岺校洞里第自在襁褓眉目淸秀形容端雅王考參議公鍾愛之期以堂構之望而親授孝經小學等書略通大義蔚有聲譽年至弱冠文藝漸就傍治擧業累屈場屋孝友實行著於鄕黨有儒林薦狀公聞而牢拒之竟未登徹時論慨惜焉粵在中世簿遊京師時宰勸之仕不獲己赴公車官歷參奉都事等職旋歸鄕里以獎進後學爲己任仍築書室扁額杞南而敎育之從公學者稱曰杞南先生後以年七十優老之恩除通政未幾陞資嘉善同中樞亦云榮矣竟以天年考終于正寢用禮月擇葬于杞城老谷負甲之原夫人仁川李氏無育取弟相勳之男春熙爲嗣竊念公志操高亢與人交不狹長而必友其德故西海有一塩商嘗受知於公公獨知其姓名而至於家人摠不知誰某者也歲必艹+存存書而繼夜酬唱詩文講論講學例以春秋衣資一襲助給焉此非隱德之神交者歟易簀前一日命子若侄使之列座略有遺訓且淨掃室堂取著述私稿借貸文券而幷燒之洙浴更衣翛然而逝識我者稱以知命君子云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부군행략 역문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府君行略 譯文)
-손(孫) 재기(在祺) 서(書)

 

부군(府君)의 휘는 상민(相敏)이요, 자는 원호(元浩)요, 용재선생(慵齋先生)에 후손이요, 성균생원(成均生員) 휘 흠(欽)의 7대손이다. 고조의 휘는 중걸(重杰)이니 참봉(參奉)이요, 증조의 휘는 자철(滋喆)이니 증군자감정(贈軍資監正)이요, 조부는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휘 종무(鍾茂)요. 부친은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 휘 범우(範雨)니 연 3대 증직(贈職)은 공에 따른 은택(恩澤)이라.
비(妣)는 경주최씨(慶州崔氏)와 인동장씨(仁同張氏)니 두 분이 8남을 두신지라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 불렀다. 그 중에도 공이 가장 맏분으로 순묘(純廟) 신묘년(辛卯年, 1891년)에 진잠교동리(鎭岑校洞里) 집에서 출생했다. 강보(襁褓)에 있을 때부터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고 형용(形容)이 단정하니 조부 참의공(參議公)이 가장 사랑하시며 문호(門戶)를 일으킬 희망을 걸고 친히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가르치니 대략이나마 대의를 통달하니 기리는 소리가 자자하였다.
나이 20에 당도하니 문장(文章)이 점점 성취하여 과업을 힘써 보았으나 여의치 못했고 효우(孝友)와 실행(實行)이 향당(鄕黨)에 드러나니 유림(儒林)의 추천장(推薦狀)이 있었으나 완강히 거절하여 마침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니 그때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세상의 말업(末業)을 만나 서울에 갔더니 벼슬하라는 권함을 따라 벼슬길에 올라 참봉도사직(參奉都事職)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것으로 임무로 삼고 서실(書室)을 짓고 기남(杞南)이란 현판을 걸고 교육을 하니 공을 따라 배운 사람들이 공을 기남선생(杞南先生)이라 불렀다 한다. 뒤에는 70 나이로 통정(通政)을 제수받고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승직(陞職)하니 또한 영광이다. 마침 정명(定命)으로 자택에서 별세하니 예월(禮月)을 가려 기성(杞城) 노곡리(老谷里) 갑좌(甲坐) 자리에 안장하다.
배(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니 무후(無後)함으로 동생 상훈(相勳)의 아들 춘희(春熙)를 양자(養子)했다. 생각건대 공은 지조(志操)가 높아 남과 사귀는데 있어 귀함을 자처하지 않으며 연장(年長)을 구애함이 없이 그 덕을 벗한 고로 서해변(西海邊)에 한 소금장수가 있었는데 일찍부터 공과 알았으니 공만이 혼자 그 이름을 알고 집안사람들은 전부 뉜 줄 모른다. 해마다 한자리에 모여 낮부터 밤을 새워가며 시(詩)를 짓고 학문을 강론(講論)해서 춘추시대(春秋時代)와 같이하고 옷 한 벌을 주니 이것이 덕으로 사귐이 아닐까.
별세하기 하루 전에 아들과 족하(族下)들은 자리에 불러놓고 유훈(遺訓)을 남기고 단정하게 방과 마루를 쓸고 닦게 하고 지은 글과 남에게 지어준 글을 전부 불에 태우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홀연히 운명하니 아는 사람들은 천명(天命)을 아는 군자(君子)라고 말했다 한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