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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1세손 화봉공 이인우] 通訓大夫承政院右副承旨月城李公墓碣銘(통훈대부승정원우부승지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1:31

□용재공(慵齋公) 11세손 화봉공(化奉公) 이인우(李鱗雨)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②만귀헌공(晩歸軒公) 민석(民奭) → 4世孫 선언(善彦) → 5世孫 노곡공(老谷公) 흠(欽) → 6世孫 ①통정공(通政公) 당(璫) → 7世孫 ①증가선공(贈嘉善公) 학만(學萬) → 8世孫 ②노헌공(魯軒公) 후걸(厚杰) → 9世孫 ③수동추(壽同樞) 용철(龍喆) → 10世孫 ②돈녕도정공(敦寧都正公) 종택(鍾澤) → 11世孫 ③화봉공(化奉公) 인우(鱗雨)

 

 

通訓大夫承政院右副承旨月城李公墓碣銘 幷序
(통훈대부승정원우부승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宣城(선성) 李會春(이회춘) 撰(찬)

 

公諱鱗雨字華瑞號化峯姓李氏慶州人以新羅佐命功臣謁平爲肇祖羅麗以降宏儒碩輔史不絶書爲東方巨族我 康靖王時有諱繩直慶尙道觀察使大司憲以淸白著有諱宗準號慵齋以佔畢齋門人被戊午禍昭雪復官 贈副提學享鏡光祠於公間十一世五傳至諱欽成均生員曾祖諱厚杰號魯軒 贈司僕正祖諱龍喆同樞 贈兵曹參議考諱鍾澤敦寧都正工曹參判妣淑夫人晉州姜氏福永女公以 純祖辛卯三月十二日生神采瀅朗才氣超穎甫就學己有成人器度稍長以參判明治功令業己巳登文科除司憲府持平尋遷司諫院正言以親病辭歸竟丁內外憂而哀禮備至服闋後除司憲府掌令自是出入兩司十餘年始通淸籍歷弘文館校理至承政院右副承旨其在玉署屢登慶筵隨事陳勉惟權貴門未甞一跡及也俄而見朝著不淸辭職還鄕遂堅臥不得問仕䆠事閑居遊心書卷遇文學人與談經說禮盖有意於炳燭之工而不知年歲之暮也以 洪陵辛丑五月十七日終享年七十一是歲某月某甲葬宇靑里修善山小隱谷先塋下後因嗣孫璣炳移寓醴泉聽明師改窆于甘泉芙蓉山大谷向甲原公有二配安東權氏炳祚女順興安氏倖黙女俱淑夫人有婦儀有一男相遠通德郞安氏出也相遠無育以從弟相海之子璣炯字之璣炯君亦以文雅世其家而因世故多端未遑顯刻於公之墓今以狀徵余銘余雖耄廢不文義不能固拒謹撰如右系之以銘銘曰
孤直廉潔或不利於晉述有以愧墦間饜足之徒安吾居讀吾書外物何于於吾十世家傳惟淸白二字符

 


●통훈대부승정원우부승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通訓大夫承政院右副承旨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선성(宣城) 이회춘(李會春) 찬(撰)

 

공의 휘는 인우(鱗雨)요, 자는 화서(華瑞)며 호는 화봉(化峯) 경주이씨(慶州李氏)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신라와 고려를 지내면서 큰 문장과 높은 벼슬이 대를 이어 배출하니 동방(東方)에 거족(巨族)이 되었고 조선조(朝鮮朝)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휘 승직(繩直)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지내 청백(淸白)함으로 드러났고 휘 종준(宗準) 호는 용재(慵齋)는 점필재(以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戊午, 1498) 화(禍)를 입었다가 뒤에 신원(伸冤)되어 부제학(副提學)을 받고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配享)되니 공에게는 11대조가 된다. 5대를 내려와 휘 흠(欽)은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증조의 휘는 후걸(厚杰)이요, 호는 노헌(魯軒)이니 사복정(司僕正)에 증직(贈職)됐고 조의 휘는 용철(龍喆)이니 동추(同樞)며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됐으며 부친 휘는 종택(鍾澤)이니 돈녕도정(敦寧都正) 공조참판(工曹參判)이요,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진주강씨(晉州姜氏) 복영(福永)의 따님이다.
공이 순조(純祖) 신묘년(辛卯年, 1831년) 3월 12일 출생하다. 공은 심신이 명랑하고 재기(才氣)가 초일(超逸)하여 겨우 입학하면서 벌써 어른의 도량이 있으니 성장하면서 참판공(參判公)의 명으로 과거(科擧)에 힘을 써서 기사년(己巳年, 186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기자 친환(親患)으로 인하여 사직(辭職)하고 돌아왔더니 마침 양친상(兩親喪)을 당하여 애통과 예절을 극진히 다하고 복(服)이 끝나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제수(除授)받으니 이로부터 양사(兩司)에 출입한 지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청직(淸職)에 통해져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이르다. 그 옥서(玉署)에 있을 때 여러 번 경연(慶筵)에 오른 바 있고 일에 따라 힘을 썼으나 권문세가(權門勢家)에는 한 번도 발을 들어놓지 않으니 조정이 점점 혼탁해짐을 보고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시는 벼슬에 대한 일은 묻지도 않고 서책에만 마음을 묻혀 문학(文學)하는 사람을 만나면 정서를 의논하고 예절을 말하니 명촉(明燭)의 공부에 뜻이 있어 세월이 가는 줄 모르더라. 홍릉(洪陵) 신축년(辛丑年, 1901년) 5월 17일에 별세하니 향년 71이라. 이해에 청리수선산소은곡(靑里修善山小隱谷) 선영(先塋) 아래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손자 기형(璣炳)이 예천(醴泉)에 이주하여 풍수에 말을 좇아 감천부용산(甘泉芙蓉山) 큰골 경자(庚坐) 자리에 이장했다.
공이 두 배(配)가 있으니 안동권씨(安東權氏) 병조(炳祚)의 따님이고 순흥안씨(順興安氏) 행묵(倖黙)의 따님이니 다 숙부인(淑夫人)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1남이 생하니 상원(相遠)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니 안씨(安氏)의 소생(所生)이라. 상원(相遠)은 아들이 없고 종제(從弟) 상해(相海)의 아들 기형(璣炯)으로 양자(養子)를 하니 기형(璣炯) 군이 또한 아사(雅士)로 그 집을 이을만하나 세상일이 복잡하여 공의 묘소에 이제까지 비(碑)를 못 세웠으니 이제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하니 내가 늙고 글을 못 하나 도의상 거절할 수 없어 삼가 위와 같이 짓고 이어서 명(銘)을 하니 명(銘)에 가로대
외로이 정직함이 앞길에 불리함이 있으나 호화 사치한 무리와는 부끄럼이 있으리오. 내 집에 편히 살고 내 글을 읽으니 바깥 물건이 어찌 내게 간섭하리오. 10대로 전하는 것이 오직 청백(淸白) 2글자로 증거를 삼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