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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9세손 송헌공 이두서] 通政大夫松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통정대부송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1:10

□용재공(慵齋公) 9세손 송헌공(松軒公) 이두서(李斗瑞)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①민학공(民學公) 정수(廷秀) → 4世孫 ②보국재공(輔國載公) 추(樞) → 5世孫 ④부호군공(副護軍公) 진선(進善) → 6世孫 ②세적(世勣) → 7世孫 系子 명원(命元) → 8世孫 경윤(慶胤) → 9世孫 ②송헌공(松軒公) 두서(斗瑞)

 

 

通政大夫松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
(통정대부송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永嘉(영가) 權璛(권숙) 謹撰(근찬)

 

梁山周南內山亥坐原有皐如四尺之封寔故通政大夫松軒李公之藏也公後孫珽健渭濬持家狀一通訪余於千里冽舘責以顯刻之文謹按狀而叙之曰公諱斗瑞字燦徵松軒其號也月城其貫也新羅佐命功臣諱謁平爲鼻祖高麗金紫光祿大夫月城君諱之秀爲中祖我朝行弘文館 贈副提學慵齋先生諱宗準爲顯祖有諱進善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有諱世勣有諱命元有諱慶胤其高曾祖考高靈朴氏鳳岡女其妣也 英廟丁丑六月十八日生 憲宗三月二十七日終公神彩英秀宇量宏深有長者風早業公車文詞蜚英有聲塲屋間因得廣交當世賢大夫士許以道義交晩而歸隱于周南內盖榟里也有湖山巖林之勝耕雲釣月之趣學徒坌集隨才獎誘頻有作興之效配淑夫人龍潭高氏必升女戊辰八月二十九日卒墓同原生三男二女男衡錫根鍾出俊鍾女適李相民李慶燦衡錫男漢祚淵奎說雨蓍雨俊鍾男天雨漢祚男相有相甫說雨男相鶴相龍相耆相伯女適徐尙坤蓍雨男相彦相芷相祈天雨男相根相有系男錤炯相甫男錤炯出夏炯相鶴男晩炯相龍系男龜炯相耆男善炯相伯男鳳炯龜炯出相彦男祈炯桂炯相芷男臣炯杆炯嘉炯相祈男進炯鳳炯錤炯男在寅在馥在完在勳夏炯男在洛在陽在和晩炯男在春龜炯男在元先炯男在川鳳炯男在萬在雄在鎭祈炯男在東桂炯男在鎬臣炯男在玹在鶴杆炯男在祐在玉出嘉炯男在烈在根在和進炯男在守鳳炯男在瀚在璇在寅男聖鍵聖鍵男渭濬鍵行以下不盡錄但渭濬胄孫故收錄公之後孫在玹在春東鍵始終幹其事 魁偉之表卓犖之抱吐詞驚人運毫入神不于朝而老敀林 誰任其責煌玉緋優遊九旬所能者天用銘于珉昭示後人

 


●통정대부송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역문
(通政大夫松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 譯文)
-영가(永嘉) 권숙(權璛) 근찬(謹撰)

 

양산(梁山) 주남내산(周南內山) 해좌(亥坐)의 언덕에 높직하게 4척을 봉축함은 옛 통정대부(通政大夫) 송헌이공(松軒李公)의 묘소이다. 공의 후손 정건(珽健)·위준(渭濬)이 가장(家狀) 1통을 가지고 천 리길 서울 관사(館舍)에 나를 찾아와 묘갈(墓碣)에 새길 글을 청하므로 삼가 가장(家狀)을 안찰(按察)하여 서술한다. 공의 휘는 두서(斗瑞)이고 자는 찬징(燦徵) 송헌(松軒)은 그 호이며 월성(月城, 경주慶州의 고호古號)은 그 본관(本貫)이다. 신라(新羅)에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은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高麗)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는 중조(中祖, 분파조分派祖)가 되며 아조(我祖, 조선朝鮮)에 행직(行職)이 홍문관(弘文館)이고 증직(贈職)이 부제학(副提學)이신 용재선생(慵齋先生) 휘 종준(宗準)은 현조(玄祖)가 된다. 휘 진선(進善)이 있으니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고 휘 세적(世勣)·휘 명원(命元)·휘 경윤(慶胤)은 고조·증조·조고·선고이며 고령박씨(高靈朴氏) 봉강(鳳岡)의 따님은 어머니이다. 영조(英祖) 정축(丁丑, 1757) 6월 18일에 출생하여 현종(憲宗) 3월 27일에 돌아갔다.
공이 신채(神彩)가 준수하고 도량이 크고 깊어서 장자(長子)의 풍도가 있으며 일찍부터 과거에 종사하여 문장(文章)이 아름다웠으므로 과장(科場)사이에 명성이 있었다. 인하여 당세(當世)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널리 교제하여 도의의 친구로 허락했다. 만년에 주남내산(周南內山)으로 와서 은거(隱居)하였으니 대개 이곳이 선영(先塋)의 마을로 호산(湖山)과 암림(巖林)의 좋은 경치가 있으므로 구름을 갈고 달을 낚기는 취미가 끊이지 않았다. 학도(學徒)가 모여들며 재주를 따라 권장하고 교우하여 자못 후진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용담고씨(龍潭高氏) 필승(必升)의 따님인데 무진(戊辰) 8월 29일에 돌아가셨고 묘소는 같은 자리이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형석(衡錫)·근종(根鍾)은 출계(出系)하고 준종(俊鍾)이요, 딸은 이상민(李相民)·이경찬(李慶燦)에게 각각 시집갔다. 형석(衡錫)의 아들은 한조(漢祚)·연규(淵奎)·설우(說雨)·시우(蓍雨)이고 준종(俊鍾)의 아들은 천우(天雨)이다. 한조(漢祚)의 아들은 상유(相有)·상보(相甫)이고 설우(說雨)의 아들은 상학(相鶴)·상룡(相龍)·상기(相耆)·상백(相伯)이고 딸은 서상곤(徐尙坤)에게 시집갔다. 시우(蓍雨)의 아들은 상언(相彦)·상지(相芷)·상기(相祈)이고 천우(天雨)의 아들은 상근(相根)이다.
상유(相有)의 양아들은 기형(錤炯)이다. 상보(相甫) 아들 기형(錤炯)은 출계(出系)하고 하형(夏炯)이다. 상학(相鶴)의 아들은 만형(晩炯)이다. 상룡(相龍)의 양아들은 귀형(龜炯)이고 상기(相耆)의 아들은 선형(善炯)이고 상백(相伯)의 아들은 봉형(鳳炯)·귀형(龜炯)은 출계(出系)했다. 상언(相彦)의 아들은 기형(祈炯)·계형(桂炯)이고 상지(相芷)의 아들은 신형(臣炯)·간형(杆炯)·가형(嘉炯)이다. 상기(相祈)의 아들은 진형(進炯)·봉형(鳳炯)이다.
기형(錤炯)의 아들은 재인(在寅)·재복(在馥)·재완(在完)·재훈(在勳)이고 하형(夏炯)의 아들은 재락(在洛)·재양(在陽)·재화(在和)이고 만형(晩炯)의 아들은 재춘(在春)이고 귀형(龜炯)의 아들은 재원(在元)이고 선형(先炯)의 아들은 재천(在川)이고 봉형(鳳炯)의 아들은 재만(在萬)·재웅(在雄)·재진(在鎭)이고 기현(祈炯)의 아들은 재동(在東)이고 계형(桂炯)의 아들은 재호(在鎬)이고 신형(臣炯)의 아들은 재현(在玹)·재학(在鶴)이고 간형(杆炯)의 아들은 재우(在祐)·재옥(在玉)은 출계(出系)했다. 가형(嘉炯)의 아들은 재열(在烈)·재근(在根)·재화(在和)이고 진형(進炯)의 아들은 재수(在守)이고 봉형(鳳炯)의 아들은 재한(在瀚)·재선(在璇)이다.
재인(在寅)의 아들은 성건(聖鍵)이고 성건(聖鍵)의 아들은 위준(渭濬)이다. 건(鍵)자 항렬(行列)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으나 다만 위준(渭濬)은 종손(宗孫)이므로 기록했다. 공의 후손 재현(在玹)·재춘(在春)·동건(東鍵)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주간(主幹)하였다. 명(銘)에 이르되
위대한 의표(儀表)요, 동탁한 포부로 문장을 토출(吐出)할매, 사람을 놀라게 하고 붓을 대면 신묘(神妙)함에 들어갔는데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산림(山林)으로 돌아왔으니 뉘 그 책임을 담당할까? 황옥(煌玉)의 붉은 옷(통정대부通政大夫의 수직壽職을 이르는 듯함) 내리매 90의 높은 수(壽)를 한가롭게 지냈었으니 능했던 바는 하늘인가 싶다. 이것으로써 비석에 새기어 밝게 뒤 사람에게 보이노라.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고호古號임) 권숙(權璛)은 삼가 지음.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