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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3세손 가산공 이인형] 柯山處士月城李公墓碣銘(가산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1:03

□용재공(慵齋公) 13세손 가산공(柯山公) 이인형(李寅炯)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①민학공(民學公) 정수(廷秀) → 4世孫 ②보국재공(輔國載公) 추(樞) → 5世孫 ①관가옹공(觀稼翁公) 지선(止善) → 6世孫 구충당공(求忠堂公) 세백(世白) → 7世孫 ②명식(命植) → 8世孫 소(熽) → 9世孫 系子 양헌공(養軒公) 증규(增奎) → 10世孫 ①석일(碩一) → 11世孫 ①호영(顥泳) → 12世孫 ②상곤(相坤) → 13世孫 ①가산공(柯山公) 인형(寅炯)

 

 

柯山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가산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光山(광산) 金憲洙(김헌수) 撰(찬)

 

故柯山處士慶州李公之沒四十有五年癸亥春公之賢孫憲鎬君以公壙南之文峯譜渉遠而叩我寓扃懇責之第惟其無考據文字而只依譜書未免 畧之悔矧以不文神耗收拾實難安可免杜誣之責哉且念柯享之幽堂封築己完墓草成宿更無外來之患而玆汲汲於石事孝孫誠孝所格則其固辭非循例之科也乃按譜叙之公諱寅炯字德中號柯山慶州之李自新羅諱謁平佐命大臣賜姓李至諱居明官蘇判至諱金書三諱功臣累至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諱揆贊成諡貞烈至諱時敏俱中生進以兄忠愍公禁錮禍退隱于安東琴溪號琴湖子諱宗準號慵齋丁酉司馬乙巳文科選湖堂戊午被禍 贈副提學享鏡光院栢麓社子諱德淵參奉不仕高祖諱增奎號養軒曾祖諱錫一祖諱顥泳考諱相坤俱有文行妣淸州韓氏秀璇女以 高宗壬申生于第幼自好學執志堅大程課之餘繼攝經理而漸見世變晦跡林泉以承順怡愉爲日用常行退與羣季有征邁之樂風雨之爰止紹先徽之重而不贊門戶樹立之意聯床講勉且垂訓庭趍諸子以光丁寧告誠一家雍和人無他話且鏡光先院及墓所頹落也刻滅也兩處難愼而發議復事則孰敢不從而至今爲殫誠追孝之所著顯也盖士之事業不一許多而有以述先也裕後也門戶也入揚也各以其地與時操縱緩急斟酌早晩而當合於事適於義者是之爲君子事也今如公者無愧矣以疾不起于己卯六月十八日墓柯亭先兆下亥坐配月城崔氏世顯之女丙寅生戊戌十月八日卒墓西面道洞庚坐生一子配密陽朴氏奎鎬之女己卯生己丑四月二日卒墓西面巖峴午坐子在胤在鳳在晩在春在達女延日鄭東徽湖叟世雅后胤男憲鎬女月城崔鍾國鳳男起鎬大鎬柄鎬晩男永鎬宣鎬春男軫鎬信鎬達男宗鎬玟鎬憲鎬男泰宇泰植泰敦泰進起鎬男儀濬龍濬餘不盡錄銘曰
粤自新羅源溯華閥世襲勳業踵作名哲卓哉慵翁炳然高節攻諸東史罕見其匹公生是家責重殫誠修整于院改竪于塋趍庭之日承順孝情聯床之時以邁以征誰不讚之至今誦德君子人也一題着目柯亭之原其崇四尺勿以樵牧我銘必式

 


●가산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柯山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광산(光山) 김헌수(金憲洙) 찬(撰)

 

옛 가산처사(柯山處士) 경주이공(慶州李公)의 별세한 지 45년 후 봄에 공의 손자 헌호(憲鎬) 군이 비문(碑文) 일로 보첩(譜牒)을 받들고 먼 길을 걸어 내 집 삽작을 두드려 비문(碑文)을 위촉하니 생각건대 상고할 문자(文字)가 없고 다만 보첩(譜牒)에만 의거하니 너무 간소함을 면키 어려운데 항차 잘못하는 글에 정신조차 수습하기 어려운지라 어찌 속인 책임을 면할까. 또한 가정(柯享)의 묘소가 봉축(封築)이 완성되었고 묘에 풀이 난지도 해가 지났으니 다시 다른 근심이 없건만 비가 샘을 급히 서두르니 자손의 효가 대단하다.
굳게 사양하는 것도 예가 아니라 이에 쓰노니 공의 휘는 인형(寅炯)이요, 자는 덕중(德中)이며 호는 가산(柯山)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新羅) 때 휘 알평(謁平)이 좌명대신(佐命大臣)으로 성을 이씨(李氏)라 받았고 휘 거명(居明)은 벼슬이 소판(蘇判)이고 휘 금서(金書)는 삼한공신(三諱功臣)이며 여러 대를 내려와서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에 봉(封)해졌고 휘 규(揆)는 찬성(贊成)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고 휘 시민(時敏)은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했고 형(兄) 충민공(忠愍公) 화(禍)로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안동(安東) 금계(琴溪)에 와서 숨어 살으니 호는 금호(琴湖)다.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호는 용재(慵齋)인데 정유(丁酉)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사(乙巳)에 문과(文科)에 합격 호당(湖堂)에 뽑혔더니 무오(戊午, 1498)에 화(禍)를 입고 뒤에 부제학(副提學)을 받다.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柏麓里社)에 입향(入享)하다. 그 아들의 휘는 덕연(德淵, 계자系子임. 생부는 공준公準)이니 참봉(參奉)으로 벼슬은 아니했고 고조의 휘는 증규(增奎)요, 호는 양헌(養軒)이며 증조의 휘는 석일(錫一)이요, 조의 휘는 호영(顥泳)이고 고의 휘는 상곤(相坤)이니 유고(遺稿)가 있다. 비(妣)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수선(秀璇)의 따님이니 고종(高宗) 임신(壬申, 1872)에 공이 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뜻을 가짐이 굳고 커서 공부하고 남은 시간에는 계속하여 경서(經書)와 이학(理學)을 연구하더니 점점 세상이 변천함을 보고 산림(山林)에 자취를 갈무려서 부모 뜻을 순하게 받드는 것이 일상 행동이고 모든 동생과 우애가 돈독하니 위로는 선조의 아름다운 행적을 이어받아 문호(門戶)의 발전할 뜻을 품고 또 모든 자손에게 훈계를 주어 가문을 빛내고자 힘쓰다 경광서원(鏡光書院)이 퇴락하고 선조의 묘비(墓碑)가 헤어지니 두 일이 다 어려우나 수리할 계획을 발의하니 뉘 감히 따르지 않으리오. 그에 정성과 효심의 다한 바로 크게 드러난 일이라 선비의 일이 허다하나 조상을 위한 사업 후손을 위한 사업 문호에 관한 사업 입신양명을 위한 사업이 각각 위치와 때를 맞추어 완급과 조만을 침착 조종하되 의리에 적합하게 하는 것이 군자(君子)의 일이라 하겠으니 공과 같은 이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병으로 신음하다가 기묘(己卯, 1939) 6월 18일에 졸하니 묘는 가정(柯亭) 선영(先塋) 밑 해좌(亥坐)다.
배(配)는 월성최씨(月城崔氏) 세현(世顯)의 따님이니 병인년(丙寅年)에 나서 무술년(戊戌年) 10월 8일에 졸하니 묘는 서면(西面) 도동(道洞) 경좌(庚坐)다. 1남을 낳았고 계배(繼配)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규호(奎鎬)의 따님이니 기묘년(己卯年)에 났고 기축(己丑) 4월 2일에 졸하니 묘는 서면(西面) 암현(巖峴) 오좌(午坐)다. 아들에 재윤(在胤)·재봉(在鳳)·재만(在晩)·재춘(在春)·재달(在達)이고 딸은 연일(延日) 정동휘(鄭東徽)에 출가했고 재윤(在胤) 아들에 헌호(憲鎬)고 딸은 월성(月城) 최종국(崔鍾國)에 출가했으며 재봉(在鳳) 아들에 기호(起鎬)·대호(大鎬)·병호(柄鎬)고 재만(在晩) 아들에 영호(永鎬)·선호(宣鎬)고 재춘(在春) 아들에 진호(軫鎬)·신호(信鎬)고 재달(在達) 아들에 종호(宗鎬)·민호(玟鎬)며 헌호(憲鎬) 아들에 태우(泰宇)·태식(泰植)·태돈(泰敦)·태진(泰進)이며 기호(起鎬) 아들에 의준(儀濬)·용준(龍濬)이고 나머지는 다 수록 못 한다. 명(銘)에 가로대
저 신라(新羅)로부터 근원이 빛나는 문별(門閥)이다. 공명이 대를 이었고 명현(名賢)이 계승했다. 높다 용재옹(慵齋翁)이여, 빛나는 높은 절개로다. 동국사기(東國史記)에 상고해도 그 짝이 드물리라. 공이 이 집에 출생하니 재임은 무거운데 정성을 다했도다. 서원(書院)을 수리하고 선영(先塋)에 비석을 새로 세웠네. 어버이 앞에서는 숭순(承順)하는 효(孝)를 다하고 동기에는 우애도 지극했다. 뉘라서 찬성하지 않으리 지금까지도 군자라고 송덕(頌德)하네, 가정(柯亭) 언덕에 한 번 쓰니 그 높이 넉자로다. 초동목수(樵童牧豎)들아 비(碑)를 헐지 말지어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