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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3세손 만귀헌공 이민석] 晩歸軒先生月城李公墓碣銘(만귀헌선생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1:17

□용재공(慵齋公) 3세손 만귀헌공(晩歸軒公) 이민석(李民奭)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②만귀헌공(晩歸軒公) 민석(民奭)

 

 

晩歸軒先生月城李公墓碣銘 幷序
(만귀헌선생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永陽(영양) 李龍九(이용구) 撰(찬)

 

公諱民奭字兩百姓李氏新羅佐命功臣謁平之後也佐命之後世以官冕相承至 世宗朝有諱繩直官至司憲府大司憲生諱時敏成均生員是爲公高祖曾祖諱宗準文科校理後 贈副提學卽慵齋先生也祖諱德淵參奉號天有堂考諱胤讓進士號先齋妣宜人光山金氏公生長琴溪里第晩寓商山之功城白雲山中自號晩歸軒卒某年葬以音白雲山某向原夫人李氏籍延安墓乾位合祔生男曰善彦善彦生欽生員生員生二子曰瑭通政暹大嘉善以不不錄初生員公以淸名重望遭景泰癸酉之難禍及公同氣遂被禁錮南歸副提學公亦以文章直節遭世罔極身陷大戮此所謂戊午史禍也可勝言哉可勝歎哉惟公生禍難之後移寓他鄕隱居求志飭躬修行有可以紹述緖餘而歷世旣遠文籍蕩逸第據譜系所載則有曰遯跡林樊無意世路敎迪後進有儒德望卽此而猶可想見公志行之大略矣顧淺弊耄及之人何能冐昧下乎如瞽者之模相爲別有一般人也哉後孫在寅濬浩等將伐石以修墓因其華宗成鎬而貴余碣陰之記又不可得以終辭也遂爲之銘曰
翳惟我公名祖肖孫簪纓華族詩禮高門于嗟蒙難百六運丁凡係雲仍痛結幽明捨彼科臼樂我林坰所樂伊何敎迪後生斯林厚望當時月評白雲之原有封三尺慈孫克孝鑱辭勒石我述不作表玆幽阡嗟爾來者母忘祖先

 


●만귀헌선생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晩歸軒先生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양(永陽) 이용구(李龍九) 찬(撰)

 

공의 휘는 민석(民奭)이요, 자는 양백(兩百)이며 성은 이씨(李氏)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계승하더니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휘 승직(繩直)은 벼슬이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고 휘 시민(時敏)을 출생하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인데 공의 고조가 되고 증조의 휘는 종준(宗準)이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뒤에 부제학(副提學)을 증직(贈職) 받으니 이분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요, 조의 휘는 덕연(德淵)이니 참봉(參奉)이고 호는 천유당(天有堂)이며 고의 휘는 윤양(胤讓)이니 진사(進士)에 호는 선재(先齋)이고 비(妣)는 의인(宜人) 광산김씨(光山金氏)다.
공이 금계리(琴溪里) 자택에 성장하여 만년(晩年)에 상산(商山, 상주尙州) 공성백운산(功城白雲山)에 옮겨 살며 스스로 호를 만귀헌(晩歸軒)이라 하다. 졸년은 모르고 이음(以音) 백운산(白雲山)에 장사하니 부인(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 묘도 합폄(合窆)이다. 생남(生男)하니 선언(善彦)이고 선언(善彦)이 흠(欽)을 생하니 생원(生員)이고 흠(欽)이 2남을 생하니 당(瑭) 통정(通政)이요, 선대(暹大)는 가선(嘉善)이고 이하는 다 수록지 않는다.
처음에 생원공(生員公)이 청백(淸名)으로 명망이 높으니 계유난(癸酉難)을 만남에 공의 형제들이 금고(禁錮)의 형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부제학공(副提學公, 용재선생慵齋先生)이 또한 문장(文章)과 곧은 절개(節槪)로 망극(罔極)한 세상을 만나 몸이 극형을 당하니 이것이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라. 가히 다 말하며 탄식(歎息)인들 다하랴, 오직 공이 화란(禍亂)의 뒤에 탄생하여 타향(他鄕)에 옮겨 숨어서 살며 뜻을 기르고 몸과 행실을 닦았으니 선대(先代)를 이어지는 자취가 있음 직하나 지나온 대수(代數)가 멀고 문적(文蹟)은 흩어져서 족보(族譜)에 실린 바에는 산중에 숨어서 출세에는 뜻이 없고 후진을 가르쳐 유림에 덕망이 있었다고 했으니 이로 미루어 공의 뜻과 행실의 대략을 엿볼 수 있으나 90세에 가까운 늙은 폐물이 어찌 어두운 것을 무릅쓰고 봉사[瞽者]가 상(相) 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할까.
후손 공의 재인(在寅)·준호(濬浩) 등이 장차(長次)들을 묘소에 세울새 그 족인(族人) 성호(成鎬)로 인해 나에게 비(碑)에 새길 글을 부탁하니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 드디어 명(銘)하여 가로대 오직 공은 이름있는 착한 집 자손이며 잠영(簪纓)의 씨족이고 시례(詩禮)의 명벌(名閥)이라.
슬프다. 난(難)을 입음이여, 백육운(百六運, 액운厄運)을 만났도다. 뭇 자손들은 죽으니 산이 사이에 원통함이 맺혔도다. 벼슬길은 버리고 산속에서 즐겨 살았네. 즐거움이 무엇인고, 후생(後生) 가르침에 있었네. 유림(儒林)에 명망(名望)이 두터운 것이 그때의 정평(定評)일세. 백운산(白雲山) 언덕에 세자높이 통영이 있도다. 자손들이 능히 효성이 있어 돌에 글을 새기니 내 지은 것이 옳지 않으나 유택(幽宅)에 표를 하니 슬프다, 후세(後世)들은 선조(先祖)를 잊지 말지 어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