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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9세손 양헌공 이증규] 養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양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0:55

□용재공(慵齋公) 9세손 양헌공(養軒公) 이증규(李增奎)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①민학공(民學公) 정수(廷秀) → 4世孫 ②보국재공(輔國載公) 추(樞) → 5世孫 ①관가옹공(觀稼翁公) 지선(止善) → 6世孫 구충당공(求忠堂公) 세백(世白) → 7世孫 ②명식(命植) → 8世孫 소(熽) → 9世孫 系子 양헌공(養軒公) 증규(增奎)

 

 

養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양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月城(월성) 孫奎鎬(손규호) 撰(찬)

 

爲士者不得於朝則獨善其身謹守先業垂裕後昆耕田讀書飭躬自守振儒風整頹俗行垂文士之筆名傳野人之口者有幾人也養軒處士慶州李公其一也公自少聰慧超倫以天植之孝務悅親志適口之味便身之物莫不畢備早事學問用人一己十之工是以文詞暢達著述渾浩絶無斧鑿之態鄕紳中操觚弄墨之士莫先其鋒性又沉潛寡黙樂道人之善行耻言人之過失盡其在我之道而不求人之盡乎我謹厚之士皆樂與之遊從平居不近畦畛驕奢之態務盡修制束儉制之方外若拙虛而丙蘊聰敏律己處事頗有規矩而家而盡和睦之儀鄕而敦謙讓之風無忄+遀容無遽色雖處倉卒危迫之際必致三思然後應之門堂之間常融融也且篤於述先 純祖丙寅與同鄕宗員掌令鎭宅幼學亨黙奎泰景春折衝重仁諸公合謨鳩材責工伐石竪碑建閣於始祖瓢巖誕降之墟於是乎山川更觀喬木生輝數千載之下如見先靈之陟降公可謂爲人後者能事可畢有何餘憾也日其七世孫吉濬甫抱遺事而來諸顯刻之文誼不敢辭謹按公諱增奎字通膺姓李氏號養軒貫慶州新羅始祖佐命功臣諱謁平之後歷麗至李韓中世有諱宗準弘文館校理 贈副提學以佔畢齋門徒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生諱德淵參奉號天有堂生諱胤讓大司成號慕先齋戊午禍後決意遯世拔紱歸園婆娑於林亭泉石之間以終其也生諱廷秀朝奉大夫典涓司直長號民學生諱樞號輔國齋又號三樂堂公五世以上地高祖諱止善號觀稼翁曾祖諱世白號求忠堂祖諱命植考諱熽公以純祖甲戌八月十七日考終于寢葬于慶州山內乃日先塋右丑坐配鐵城李氏士人暹之女 純祖乙亥七月二十六日卒葬于慶州西面密耳巖峴先兆南丙坐生一男錫一錫一生一男顥泳曾玄不錄於乎以公之才德早處晟明石渠之地任玉署論思之責則其倚馬草制經綸抱負必不下帷幄決勝之人又使公講道山林扶植斯文正脉則所以啓廸開牗分析義理必不讓於皐比說經之士而困躓於身坎軻於世白頭儒巾終世於蓬蒿之下豈非吾道之不幸歟雖然公之一生事爲獎進後生亦可爲來世之模楷軌轍則豈流輩俗儒所擬比也謹爲之銘曰
未長鄧林玉彩崑山瓢巖苗裔曰有養軒世雖鴻荒其來有的羅麗及韓相繼名碩公生厥宅荀於大竹孤松瘦鶴秋天一鶚讀書博古不事塲屋心溯漢唐學究閩洛述先裕後務盡誠慤瓢巖舊墟竪碑建閣悅愡先塋悅預降陟極宿晦彩吾黨之厄衣舃之藏先兆之側庸銘旣章刻之片石

 


●양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養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월성(月城) 손규호(孫奎鎬) 찬(撰)

 

선비 된 자가 조정에 쓰이지 못하면 홀로 그 몸을 착하게 닦고 삼가 선대 업적을 지키며 뒤 자손을 위하여 물려줄지라. 밭을 갈고 책을 읽으며 몸을 닦아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무너진 풍속(風俗)을 바로잡아 행실(行實)은 붓에 기록되고 이름은 야인(野人)의 입에 전해지는 자 몇 사람이나 있는가.
양헌처사(養軒處士) 경주이공(慶州李公)이 그 한사람이라. 공이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고 하늘이 내린 효로 어버이 뜻을 즐겁게 하며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입을 의복은 준비하지 않음이 없고 글을 배우며 남이 한 글자 알 때 자기는 열 자 아는 공부를 하니 이러함으로 문사(文詞)가 창달하고 저술(著述)이 능란하여 다듬고 만드는 태도가 향중에 대[竹]를 잡고 먹[墨]을 희롱하는 선비들도 앞서는 사람이 없었고, 또 성품이 조용하고 말이 없어 남의 착한 행동은 말하기를 즐겨하고 남의 허물은 부끄럽게 생각하여 내가 할 도리를 다하고 남이 나에게 잘해주는 것을 구하지 않으니 근후(謹厚)한 선비들도 상종(相從)하여 놀기를 즐겨하다 교만하고 사치하는 일이 없고 삼가고 검소한 방법을 다하며 바깥으로 보기는 오졸한 것 같으나 안으로는 총민(聰敏) 함을 쌓았고 몸을 닦고 일을 처리하는데도 법이 있고 집에 있을 때는 화목하는 도리를 다하고 향내에서는 겸양하는 풍속을 돈독히 하며 게으른 모양이 없고 빠른 빛이 없어 비록 창졸(倉卒) 위급함을 당해도 반드시 세 번 생각한 뒤에 응하니 문중(門中)이 항상 융융(融融)하고 조상 일에 돈독하더니 순조(純祖) 병인(丙寅, 1806)에 족친(族親) 장령(掌令) 진택(鎭宅)과 유학(幼學) 형묵(亨黙)·규태(奎泰)·경춘(景春)·절충장군(折衝將軍) 중인(重仁) 제공(諸公)으로 더불어 꾀를 같이 하고 재목(材木)을 모으며 공인(工人)을 재촉하여 돌을 다듬고 비(碑)와 비집[碑閣]을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이 내렸다는 옛터에 세우니 이에 산천(山川)이 볼만하고 옛 나무도 빛이 나니 수천 년 후에도 선조의 혼령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보는 듯하니 공은 가히 남의 손자된 도리를 다했다고 이르니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
하루는 그 7대손 길준(吉濬) 군이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비(碑)에 새길 글을 부탁하니 인정상 사양치 못해 쓰노니 공의 휘는 증규(增奎)요, 자는 통응(通膺)이며 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고 호는 양헌(養軒)이니 신라(新羅) 시조(始祖)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요,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러 중세에 휘 종준(宗準)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했으니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휘 덕연(德淵)을 낳으니[사자嗣子임. 생부는 휘 공준公準] 참봉(參奉)이요, 호는 천유당(天有堂)이며 휘 윤양(胤讓)을 낳으니 성균진사(成均進士) 대사성(大司成)에 호는 모선재(慕先齋)니 무오사화(戊午史禍) 뒤로 세상 숨기를 결심하고 벼슬을 버리고 전원(田園)으로 돌아와 임정(林亭)과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거닐다가 그 세상을 마치다. 휘 정수(廷秀)를 낳으니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이고 호는 민학(民學)이며 휘 추(樞)를 낳으니 호가 보국재(輔國齋) 또는 삼락당(三樂堂)이며 공의 5대 이상이 된다.
고조의 휘는 지선(止善)이요, 호는 관가옹(觀稼翁)이며 증조의 휘는 세백(世白)이고 호는 구충당(求忠堂)이요, 조의 휘는 명식(命植)이고 부의 휘는 소(熽)이다. 공이 순조(純祖) 갑술(甲戌, 1814) 8월 17일에 졸하니 경주(慶州) 산내(山內) 내일(乃日) 선영(先塋) 오른쪽 축좌(丑坐)에 안장하다. 배(配)는 철성이씨(鐵城李氏) 사인(士人) 섬(暹)의 따님이니 순조(純祖) 을해(乙亥, 1815) 7월 26일에 졸하니 경주(慶州) 서면(西面) 밀이암현(密耳巖峴) 선영(先塋) 남쪽에 병좌(丙坐)에 안장하다. 1남을 낳으니 석일(錫一)이요, 석일(錫一)이 생 1남하니 호영(顥泳)이고 증손 이하는 다 수록 못 한다.
슬프다, 공의 재덕(才德)으로 벼슬길에 올라 정치를 요리하는 책임을 섰던들 그 경륜(經綸) 포부(抱負)가 유악(帷幄)에서 결정하던 사람에 못 하지 않았을, 또 공으로 하여금 산림(山林)에서 도학(道學)을 공론하고 사문(斯文)의 정맥(正脈)을 붙들게 했으면 앞길을 열어주고 의리를 분석(分析)함이 고비열경(皐比說經)의 선비에 못하지 않으련만 몸이 곤경에 쓰러지고 세상에서 흰머리에 유건(儒巾)쓰고 쑥질 아래서 세상을 뜨니 어찌 우리 도에 불행함이 아닐까. 비록 그러한 공의 일생동안 한 일이 후생을 장진(獎進)했으니 또한 가히 후세 모범이 되겠으니 어찌 시속 선비에 비교하리오. 삼가 명을 지으니 명을 가로대
나무는 등림(鄧林)에서 자랐고 옥(玉)은 곤산(崑山)에서 빛이 났네. 표암(瓢巖)의 후손으로 양헌(養軒)이 있도다. 세상이 비록 거치나 그 유래는 분명하다. 신라 고려 조선에 미치도록 명현(名賢)과 석사(碩師)가 계승했도다. 공이 이 집에서 출생하니 큰 대[大竹]에서 돋아나는 새싹이로다. 외로운 소나무에 페라운 학(鶴)이요, 가을하늘에 나는 새와도 같도다. 옛글을 널리 읽었으되 과거에는 힘쓰지 않았다. 마음은 한당(漢唐) 문장을 흠모하고 배움은 염락 성현(聖賢)을 연구하다. 조상을 위해서 나 자손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 힘쓰다. 표암(瓢巖) 옛터에 비(碑)와 비각(碑閣)을 세웠으니 황홀한 선조 영혼이 즐겨서 오르고 내리라는 별이 채색(彩色)을 갈무리니 우리 당(堂)에 액운(厄運)이로다. 선영(先塋)의 곁에 공을 안장하고 명(銘)을 지어 돌에 새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