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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7세손 이명식] 李命植孝行拔薦文(이명식효행발천문)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0:47

□용재공(慵齋公) 7세손 이명식(李命植)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①민학공(民學公) 정수(廷秀) → 4世孫 ②보국재공(輔國載公) 추(樞) → 5世孫 ①관가옹공(觀稼翁公) 지선(止善) → 6世孫 구충당공(求忠堂公) 세백(世白) → 7世孫 ②명식(命植)

 

 

李命植孝行拔薦文(이명식효행발천문)
-慶州進士(경주진사) 孫星岳(손성악) 外 一○八名(108명)

 

繡衣使道閤下伏以本州故士人李明植以至孝純行爲一州之所艶服合蒙 聖朝旌褒之典而落在遐裔天聽未及窮歿數十戰湮沒無稱在李生不足爲休慽而輿誠之鬱抑者多矣是以一鄕章甫呈官呈營達于繡衣非止一再屢蒙稱尙之題而事寢中塗九重隔遠至今爲多士之所共嗟惜矣何幸 使節適此輿菀之餘未知前日之蒙許未就者其或有待於今日之 閤下耶生等敢將其一二懿蹟以備 閤下之採擇焉李生生長僻隅早事詩禮博究經籍凡所事親之節自幼誠孝甘旨之奉溫凊之養固有大異於人者而父甞得沉痼之疾晝夜侍湯跬步不離側甞糞而驗其甜苦祝天而請以身代如是數十日病勢愈革更無餘望則斷指灌血得延時月之命人皆以爲孝感攸致焉其後母病一如父病之日及其歿也哭痛之節送終之禮靡不盡其哀敬葬前塩醬不入口一盂糜粥僅延縷息旣葬結盧墓側晨昏哭泣不癈風雨每日帶一鋤一箒掃塵去草其在守墓之時亦多異物感應之事而李生諱之不發不使人聞知是則生等不必校擧臚列也夷考其處家之道純儉律身一毫無浮躁態淡然窮巷讀書送老教督州里子弟多所成就歲乙卯因 朝令續成輿誌勝覽鄕人以其行採入孝行編書之善籍嗚呼世降俗渝民不興孝丸有片善集行之異於人亦冝表出而旌異之爲風化之勸而李生純孝篤行實求之古人而難得者也雖爵祿以榮其生旌褒以哀其死亦不爲過而旣不能羽儀明時竟未免草木同腐噫噫借哉李生生時有欲薦其行義於執事之官者李生聞之苦禁而止居盧日記及平日私藁仍爲付火盖盧後人之籍此爲口實也觀此一事亦豈非素養之高而逈出人數等者耶惟是天道無如身後寂寞其所闡揚之道惟在鄕人之公議故玆敢臚列大槩齊聲仰籲於奉 命詢諮之下而竊伏念斷指守墓者世或有千百之一而李生之再斷肢軆六年居盧實前古所罕見也至如鄕人之期欲褒揚雖出於公共之議亦視其子孫之盛衰以爲之前却而李生旣乏嗣續今纔繼絶家素零替無足可觀而鄕人之奔走控㦝者至於再三而不知止則苟無實行之孚於人而能如是乎伏顯 閤下勿視循常特 啓天陛俾此純孝篤行之人不終至於湮沒則不但爲生等之幸亦豈不有助於 朝家厲化敦俗之至義也耶無任祈㦝激切之至謹冐昩 以 達御使道 處分

 


●이명식효행발천문(李命植孝行拔薦文) 역문(譯文)
-경주진사(慶州進士) 손성악(孫星岳) 외 108명

 

경주(慶州) 사는 진사(進士) 손성악(孫星岳) 등 108명은 재배(再拜)하고 글을 수의사도(繡衣使道) 합하(閤下)께 엎드려 올립니다. 본 고을에 살던 옛 사인(士人) 이명식(李明植)의 지극한 효성과 순실(純實)한 행적(行蹟)이 한 고을 사람들의 흠모경앙(欽慕敬仰)하던 바라 마땅히 성조(聖朝)의 정려(旌閭) 포양(褒揚)의 은전(恩典)을 받을 터이나 멀리 사는 자손이 임금님께 미치지 못하고 궁(窮)함에 빠진 지 수십 년에 숨겨져 말하는 이가 없어지니 이생(李生)에 있어서는 족히 슬퍼할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 여론의 억울함이 많은지라 이 일향(一鄕)에서 글을 관가(官家)에 들이고 영문(榮問)에 올려서 수의사도(繡衣使道)에 알려짐이 한두 번이 아니고 가상하다는 비답도 여러 차례 있었건만 일은 중도에서 침체하고 구중(九重, 임금 계신 대궐)에는 들리지 않아서 많은 인사들이 답답히 여기고 함께 슬퍼하고 아끼던바 다행히 사도(使道)께서 오셨으니 알지 못하나 전일 이루지 못한 숙원을 오늘 합하(閤下)께 기다릴 수 있사오리까.
생(生) 등이 감히 한두 가지 이름다운 행적을 추려 어사또의 채택하심을 기다리나이다. 이생(李生)은 궁벽(窮僻)한 마을 구석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시례(詩禮)를 익히고 경적(經籍)을 배워서 어릴 때부터 어버이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여 감지(甘旨, 입에 맞는 음식)의 공괴와 온정(溫凊, 몸에 맞는 의복)을 받음이 보통사람과는 크게 다른 바 있었고 부친이 일찍 불치병으로 고생할 때 밤과 낮으로 간호할 때 잠시도 곁을 뜨지 않고 똥을 맞보고 병세의 차도를 증험(證驗)하고 하늘에 빌어 대신 죽기로 빌기를 오래 해도 병은 점점 더해서 희망이 없어지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몇 날 간 연명케 하니 사람들이 다 효성으로 이룬 바라 하더라. 그 뒤 모친 병에도 부친 병 때와 같이하고 죽음에 애통하니 절차와 초상 치르는 예를 슬퍼하고 공경함을 다 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장사 전에는 간장과 소금을 입에 넣지 아니하고 한 접시 싸락죽으로 근근이 숨만 붙었고 장사를 마친 뒤에는 상주여막(喪主廬幕)을 묘 곁에 짓고 밤과 낮 비바람 속에도 통곡을 그치지 않고 매일 호미와 빗자루를 가지고 묘소의 티끌을 쓸고 풀을 캐니 그 묘소 지킬 때 이상한 감응이 많았건마는 이생(李生)은 이를 숨겨서 발설치 않고 타인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생(生) 등이 열기(列記)할 필요는 없으나 상고하건대 그 집을 처리하는 도리와 검소하고 순진함으로 몸을 닦아 터럭만치라도 부정하고 조급함이 없이 태연히 궁항(窮巷)에 살면서 글을 읽고 늙음을 보내면서 마을 자제들을 가르쳐 성취함이 많았다.
을묘(乙卯, 1795)에 조정 명령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覺, 지방지)을 만들새 고을 사람들이 그 행실을 채택하여 효행편(孝行編)에 쓰다. 슬프다, 세상 풍속이 강쇠(降衰)하여 효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조그마한 일이라도 착한 행동이 보통사람과 다른 것이 있으면 마땅히 표창하고 정려(旌閭)를 해서 풍화(風化)를 위하여 권유할 것이거늘 이생(李生)과 같은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동은 옛사람에 찾아보아도 얻기 어려우니 비록 벼슬을 주어 그 삶을 영화롭게 하고 정표를 해서 그 죽음을 슬퍼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거늘 이미 밝았을 때 의식을 갖추지 못하고 초목(草木)과 같이 썩어가니 슬프고 아깝다.
이생(李生)이 살았을 때 그 행한 의리를 관에 천거(薦擧)하고자 하니 이생(李生)이 이를 듣고 억지로 말려서 그친 바 있고 여막(廬幕)에서 행한 일기와 평일 지은 글을 다 없앴으나 후인들이 이를 빙자해서 구실을 삼을까 염려함이니 이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수양의 높음이 보통사람에 뛰어남이 아닐까. 천도(天道)가 무심하여 사후에 자손이 미약하니 효행을 천양(闡揚)할 책임도 향중(鄕中) 사람들의 공의(公議)에 달렸으므로 그 대강을 추려서 향중(鄕中)이 함께 봉명(奉命) 어사또께 앙원(仰願) 하오니 엎드려 생각건대 손가락을 끊고 시묘(侍墓)를 하는 것도 천만인에 한 사람도 어렵거든 이생(李生)의 두 번이나 손가락을 끊고 6년이나 시묘(侍墓)한 일은 전고(前古)에 보고 듣지 못한 일이라 향인(鄕人)의 기대는 포양(褒揚) 코자 하는 것이 비록, 향중(鄕中)에서 나왔으나 또한 자손의 성취를 봐서 앞세울까 했더니 이생(李生)의 후사(後嗣)가 끊어진 것을 이제 겨우 양손(養孫)으로 이었으나 형편이 궁색하여 가히 믿을 것이 없으므로 향인(鄕人)이 분주히 간청하기가 두세 번에 이르러도 알아주지 않으니 실행(實行)을 남이 믿지 않아서 이 같은 것인가.
복원 합하(閤下)께서는 심상을 보지 말고 임금께 품계(品階)하여 이 순효(純孝) 독행(篤行)한 사람으로 적막한데 이르지 않게 함인즉 다만 생(生) 등의 다행일 뿐 아니라 또한 조정에서 교화에 힘쓰고 풍속을 두렵게 하는 지극한 의리에 도움이 될까 간절한 기원함이 헛되지 않을 줄 믿어 삼가 어둠을 무릅쓰고 이 청원을 올리노니 어사또는 처분하소서.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