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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5세손 관가옹공 이지선] 宣敎郎觀稼翁月城李公墓碣銘(선교랑관가옹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0:40

□용재공(慵齋公) 5세손 관가옹공(觀稼翁公) 이지선(李止善)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①민학공(民學公) 정수(廷秀) → 4世孫 ②보국재공(輔國載公) 추(樞) → 5世孫 ①관가옹공(觀稼翁公) 지선(止善)

 

 

宣敎郎觀稼翁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선교랑관가옹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月城(월성) 孫奎鎬(손규호) 撰(찬)

 

東都府西山內甘存坎龍子坐午向之原有四尺崇封故宣敎郎自如道察訪後 贈通政大夫月城李公之藏也目其十世孫憲鎬甫抱遺事而示余曰府君之下世殆三百有年所而尙無顯刻惟陵谷是懼願賜一言以徵來世余曰無傷也雖然顧此耄目+匱蔑學晩生公三百年之後讚述公三百年前事者恐不免僭越之誚然其懿行實德昭載遺事口碑銘舌相傳如昨摭實記眞無溢辭夸輝則庶幾免乎哉謹按公諱止善字而聖姓李氏觀稼翁其號也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後圭組碩德世不絶書入李韓世有諱宗準弘文館校理 贈副提學以佔畢高弟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高祖諱德淵參奉號天有堂曾祖諱胤讓大司成號慕先齋戊午禍作無意於世遯跡林泉自分天山逸民而時或杖屨逍遙於鹿門柴桑酣觴賦詩於風月烟霞不知世間之有何樣物事也祖諱廷秀朝奉大夫典涓司直長號民學考諱樞號輔國齋妣慶州崔氏參奉遇濂之女文貞公承老之后公生於萬曆己未(一六一九年)四月五日少習擧業累中鄕試竟屈禮闈 仁祖朝辛巳一六四一年官除宣敎郎自如道察訪性至孝事父母二養兼備家素不贍勢不可專事學業採山釣水不匱滋味冬溫夏凊盡誠養軆敎子以嚴御㒒以恩居家以孝悌爲先務文章爲餘事戊子遭艱哀毁踰制殆不自支而樹襄封築之節無不親自點檢盡禮無憾及葬三年廬墓始廬之夜有大虎當前垂頭曳尾傴僂屛息不作猛暴狀如有慇懃然而至○明乃潛跡夜夜如是終三年如一其孝感之異及於毛身四足之物者有如是耶當時鄕士有孝薦之狀而竟寢時人指其處曰居廬所康熙丁卯一六八七年八月十五日卒于寢享年六十九 贈通政大夫是年十二月日葬于慶州山內甘存坎龍子坐原配水原金氏松堂盡孝之女承文院校理淀之后天啓辛酉一六二一年四月二十八日生貞靜有婦德平居無疾言遽色公沒後家益窮喜怒不形於色肅宗壬申一六九二年八月十八日卒享年七十二葬于甘存先兆下子坐生一男曰世白號求忠堂世白生四男一女男長命材次命植命相號南厓季命桓女適崔南柱曾玄不錄銘曰
瓢巖舊墟毓氣孕精餘蔭綿綿不絶簪纓或佐邦祚或倡儒學由羅及麗迄我東國公篤其生有光先烈杞榟鄧林彩羽丹穴事親以誠實由天植令聲遠播有冠南服遭艱廬墓馴致山君王恩優渥有鄖○天豈惟公榮寔勵凡百甘存之陽奉葬巾舃刻此貞珉海沽不泐

 


●선교랑관가옹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宣敎郎觀稼翁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월성(月城) 손규호(孫奎鎬) 찬(撰)

 

동도부(東都府, 경주慶州) 서산내감존(西山內甘存) 자좌(子坐) 언덕에 넉자 높이 봉영(封塋)의 옛 선교랑(宣敎郎)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월성이공(月城李公)의 묘소라. 하룻날 10대손 헌호(憲鎬)가 유사(遺事)를 가지고 나에게 보이며 가로대 부군(府君)이 하세(下世)한 지가 3백 년이 넘었으되 아직 비명(碑銘)이 없으니 능곡(陵谷)이 될까 두려우니 원컨대 한 말을 빌려 후세에 증거로 삼겠다 하거늘 내 대답이 괜찮다. 그러나 나같이 늙은 것이 공보다 3백 년 뒤에 낳고 3백 년전 공의 일을 짓는 것이 참람(僭濫)한 죄를 면치 못하나 그러나 공의 떳떳한 행실(行實)과 충실한 덕(德)이 유사(遺事)에 밝게 실려있고 입으로 전하는 것이 어제와 같은, 즉 실기(實記)를 빼는 것이 허장(虛葬)된 말이 아닐진대 참람(僭濫)은 거의 면할진저 공의 휘는 지선(止善)이요, 자는 이성(而聖)이며 성은 이씨(李氏)요, 관가옹(觀稼翁)은 그 호다.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높은 벼슬과 큰 덕이 대대로 끊기지 않더니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휘 종준(宗準)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입었으니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고조의 휘는 덕연(德淵)이니 참봉(參奉)이고 호는 천유당(天有堂)이며 증조의 휘는 윤양(胤讓)이고 벼슬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 대사성(大司成)이고 호는 모선재(慕先齋)니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당한 뒤로 세상에 뜻이 없어 자취를 산림(山林)에 숨기고 스스로 천산일민(天山逸民)이라고 때로는 지팡이 짚고 녹문(鹿門) 시상(柴桑)에 거닐며 술에 취해서 풍월(風月)과 연하(烟霞) 속에서 시(詩)를 지으며 세상에는 무슨 일이 있든지 아랑곳 아니하다. 조의 휘는 정수(廷秀)니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이고 호는 민학(民學)이며 고위 휘는 추(樞)며 호는 보국재(輔國齋)고 비위(妣位)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참봉(參奉) 우렴(遇濂)의 따님이며 문정공(文貞公) 승노(承老)의 후손이다.
공이 만력(萬曆) 기미(己未, 1619) 4월 5일에 낳다. 젊어서 과거(科擧) 공부를 하고 여러 번 향시(鄕試)를 치렀으나 마침 예문(禮文)에서 떨어졌다. 인조조(仁祖朝) 신사(辛巳, 1641)에 벼슬이 선교랑(宣敎郎)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제수받다. 성품(性稟)이 지극히 효도하여 부모를 섬기되 뜻과 몸 두 가지를 다 갖추었고 집이 가난하여 형편이 학업만 할 수 없어 산에 가서 나무하고 물에 가서 고기 잡아 반찬 공괴를 끊이지 않았고 겨울에 따스하게 하고 여름에 시원케 하여 지성으로 봉양하고 자제를 교육하되 엄하게 하고 종을 부리되 사랑으로 하며 집에 있을 때는 효제(孝悌)로 먼저하고 문장(文章)은 뒤로하더니 무자(戊子)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슬픔이 정도에 지나쳐서 건강이 위태로울 뻔했고 묘소(墓所)에 봉분(封墳)만 드는데도 일일이 친히 점검하여 유감이 없이 했으며 안장(安葬)을 마친 후에는 시묘(侍墓) 3년을 시작하여 첫날밤 묘소 곁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범이 나타나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끌며 숨을 숙이고 맹폭(猛爆)한 현상을 짖지 않아 은근한 뜻이 있는 것같이 하다가 날이 새면 자취를 숨기기를 밤마다 하루같이 3년을 지냈으니 그 효성에 감동함이 네발 가진 짐승에까지 미치다. 당시 향중(鄕中)에서 효자 추천이 있었으나 여의치 못하고 행인이 그곳을 가리켜 거려소(居廬所)라 한다. 강희(康熙) 정묘(丁卯, 1687) 8월 15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69라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다. 이해 12월에 경주산내감존(慶州山內甘存) 감룡(坎龍) 자좌(子坐) 언덕에 안장하다.
배위(配位)는 수원김씨(水原金氏) 송당(松堂) 진효(盡孝)의 따님이고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정(淀)의 후손이다. 천계(天啓) 신유(辛酉, 1621) 4월 28일 생하다. 정숙하여 부덕(婦德)이 있어 평상시에 바른말과 창졸한 빛이 없더니 공이 별세 후에 집 형편이 더욱 궁색하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더니 숙종(肅宗) 임신(壬申, 1692) 8월 18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72라. 감존(甘存) 선영(先塋) 아래 자좌(子坐)에 안장하다. 1남을 낳으니 세백(世白)이요, 호는 구충당(求忠堂)이고 세백(世白)이 4남 1녀를 낳으니 맏아들에 명재(命材)고 다음이 명식(命植) 명상(命相)이니 호는 남애(南厓)고 끝은 명환(命桓)이며 따님은 최남주(崔南柱)에 출가했다. 증손과 고손 이하는 다 수록 못 한다. 이어서 명(銘)을 쓰니 명(銘)에 가로대
표암(瓢巖) 옛터는 기운이 차고 정기가 어렸도다. 남은 음덕(蔭德)이 길고 벼슬이 끊기지 않네. 혹 나라를 돕고 혹은 유학(儒學)을 일으키니 신라로부터 고려를 거쳐 동방에 이르렀다. 공이 일생을 독실(篤實)히 사니 선열을 빛냈도다. 기재(杞榟) 등림(鄧林)이요, 채우(彩羽) 단혈(丹穴)이라. 어버이 섬기는 효성은 하늘이 내셨네. 아름다운 소리가 멀리 들리니 사방에서 으뜸으로 추대하더라. 상주되어 시묘하니 호랑이도 순해졌네. 임군 은혜 지중하나 주검은 하늘이라 이 어찌 공의 영화뿐이랴. 백방에 미쳤도다. 감존(甘存) 땅 남쪽 산에 공을 안장하였네. 이 비석에 새기노라. 바다가 마르도록 영원무궁할지어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