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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5세손 관가옹공 이지선] 德南齋記(덕남재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0:32

□용재공(慵齋公) 5세손 관가옹공(觀稼翁公) 이지선(李止善)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①민학공(民學公) 정수(廷秀) → 4世孫 ②보국재공(輔國載公) 추(樞) → 5世孫 ①관가옹공(觀稼翁公) 지선(止善)

 

 

德南齋記(덕남재기)
-昌山(창산) 曺圭喆(조규철) 記(기)

 

月城西至永川之界鉅野延數舍中於其間培塿忽從野心起環作一區曰富山或曰德山頗有田園之樂故自如道察訪觀稼翁李公之居也今諸後孫以公生老於斯藏修於斯不可以無寓慕之所搆一屋於山之陽竹林之間名之曰德南齋余聞李氏槪業農僅以卒歲而未有以饒名者族又不甚蕃而爲是役者惟集誠而致之豈不善哉而原其始觀稼翁實啓之也公家貧親老躬採漁以供甘至于大故則廬墓終三年虎來守 閭鳥遺爨火事聞于 朝除自如道察訪則其爲孝可知耳孝爲百行之原餘可類推夫人之精神氣脈流於子孫音容惟情之際自有世纇之美無遠不暨况近在數百年之間乎公之九世孫在晩請余記之顧不辭而樂爲之言者以公之孝可揚而諸後孫之誠爲可賀也曾子曰愼終追遠民德歸厚朱子解之曰終者人所易忽也而能謹之遠者人所易忘也而能追之厚之道也自爲則己之德厚民化則其德亦歸於厚今諸李氏能不忽不忘矣益謹之追之有厚己德俾人感則於察訪公尤有光焉齋以德名由山而爲之然亦若有非偶然者因傳會其說以爲記

 


●덕남재기(德南齋記) 역문(譯文)
-창산(昌山) 조규철(曺圭喆) 기(記)

 

월성 서쪽에서 영천(永川)까지 오육십리(五六十里) 큰들 사이에 조그마한 산이 맺어서 한 구역을 이루니 부산(富山)이라고도 하고 덕산(德山)이라고도 하나 자못 전원(田園)의 운치가 있고 고로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관가옹(觀稼翁, 이지선李止善) 이공(李公)이 살건 곳이라 이제 모든 후손들이 써 하되 공이 여기에서 낳고 늙고 죽고 했으나 나중에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덕산의 남쪽 죽림(竹林) 사이에 집 한 채를 지으니 정자(亭子) 이름을 덕남재(德南齋)라 하다.
내들이니 이씨(李氏)는 농업에 종사하여 근근이 살며 부자라는 이름도 없었고 자손도 대단히 번성치도 않은 터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오직 정성으로 이룸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그 근원을 살펴보면 실상은 관가옹(觀稼翁)이 열어놓음이라. 공은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어 산에 나무하고 물에 고기 잡아 봉양을 지극히 했고 상고(喪故)를 당해서는 시묘(侍墓) 삼 년을 했는데 범이 와서 여막(廬幕)을 지켜주고 까마귀가 불을 땐 일이 나라에 들려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제수받았으니 그 효자임을 알 지라. 효도는 백행실(百行實)의 근본이 되니 이런 정신이 남에게 전해지고 기맥(氣脈)이 자손의 얼굴 음성 성품에까지 흘러 멀다고 안 미치는 일이 없을진대 하물며 수백 년 사이 일가 공의 9대손(九代孫) 재만(在晩)이 나에게 정자기(亭子記)를 청하니 사양 않고 즐거이 붓을 든 것은 공의 효성은 가히 들어냄 직하고 후손들의 성력(誠力)은 가히 하례함 직하니 증자(曾子) 이르되 마침[終]을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두터운 덕이 돌아온다 했고 주자(朱子)가 해석해 이르기를 마침은 사람이 소홀히 하기 쉽고 먼일을 잊어버리기 쉬운지라 능히 추모하는 것은 두터운 도리니 자기가 하면 자기의 덕이 두터울 것이요, 남에게 교화가 되면 그 덕이 또한 돌아가리라.
이제 이씨들이 능히 소홀히 아니하고 잊어버리지 않아서 사람으로 감동케 하니 찰방공(察訪公)의 빛이 새롭도다. 집 이름을 덕(德) 자와 산(山) 자로 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닐세. 그 이유를 전해 모아 기(記)를 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