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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3세손 민학공 이정수] 朝奉大夫民學李公墓碣銘(조봉대부민학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7. 00:25

□용재공(慵齋公) 3세손 민학공(民學公) 이정수(李廷秀)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③모선재공(慕先齋公) 윤양(胤讓) → 3世孫 ①민학공(民學公) 정수(廷秀)

 

 

朝奉大夫民學李公墓碣銘 幷序
(조봉대부민학이공묘갈명 병서)
-月城(월성) 孫奎鎬(손규호) 撰(찬)

 

士生斯世抱奇志懷經綸希覬僥倖得志處之金閨玉署論思之地則宜其足躡雲班高視銀漢展其所蘊優遊於漢城烟月振袂於錦江風雲而乃返命與仇謨垂天之翼伏而不飛淪地之鍾欝而不宣踸踔公車虛過平生歲月而燭嘯林壑命磨滅終無聞者脂不勝膢可勝歎哉朝奉大夫典涓司直長月城李公出其等夷者也以蘊中之抱需世之才出謨發慮致君澤民夷耀於一代晟世豈不偉哉其十一世孫在根甫仁明謹敕士也奉一副遺事來示曰府君之下世年過三百奇矣尙無顯刻惟陵谷是懼乃謨伐石願垂惠一言爲來世攷也自顧癃廢無文不敢當是寄孝裔之請無辭謹按公諱廷秀字景學號民學官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后至麗季有諱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諱揆官四宰諡貞烈是生諱元林入李韓世判司僕寺事是生諱蔓實吏曹判書是生諱繩直進士筮仕于世宗朝行楊州牧使慶尙道觀察使以大司憲終淸白自見重於朝爲公五世以上也高祖諱時敏俱中生進以文章名節負一世重望曾祖諱宗準號慵齋弘文館校理佔畢齋門人祖諱德淵號天有堂參奉考諱胤讓大司成號慕先齋戊午禍作遯跡林泉妣光山金氏嘉靖庚戌生公于里第公生而姿相明敏及長嶷嶷有成人儀度事親以誠處族以睦接人以和律己以謙自奉儉約衣不取華食不貳味至於祭祀賓客之需則務盡豊潔講究經理徵辭奥旨無不竅尋其源是故文詞德性日臻其閫域爲士友所推重畢竟皐鶴聞天奉職典涓寺直長淸名著於朝班及其謝恩歸鄕以獎進英才爲己任有請業者則隨其量而使之飮河各充其腹彬彬有玉成之美茍非學力之有素而能之乎以天年終于萬曆癸未十一月十四日葬于慶州府南伏安子坐配密陽孫氏廣理君兢訓后翮之女生嘉靖辛亥卒萬曆癸卯四月十四日墓伊助狐岩南星山丑坐生四男二女男長杙號野隱將仕郎參奉次樞號三樂堂次檼號省庵次桷號鰲山女適李知白碧珍人郭霳玄風人以下不錄於乎公之瓊章金篇必有表表可傳於後者而灾於白蟫厄於兵火餘存無幾雖爲可恨而一羽片臠足以知全鳳之彩大羹之味奚貴乎多哉雖然異日波斯之市若出碧樹珊瑚火蹄瑪瑠之珍則安知非赤水遺珠之前身也歟恭俊後日之波斯矣謹爲之銘曰
於赫世閥大聲東國麗澤深深不絶鴻碩詩禮箕裘簪纓古宅有炳丹穴公篤挺特錦繡膓肝鸞鵠標格足躡龍門五雲玲瓏蒙恩立朝大播芳名居官以廉懷民以德投紱歸園究經硏籍滿案圖書墳典邱索啓迪英才一方矜式斯文運閼少徵星落伏安南麓奉藏衣舃鬼頀人歆於千萬曆

 


●조봉대부민학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朝奉大夫民學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월성(月城) 손규호(孫奎鎬) 찬(撰)

 

선비가 세상을 사는데 기이한 뜻과 경륜(經綸)을 품고 요행(僥倖)을 엿봐서 뜻을 얻어 금규옥서(金閨玉署, 임금이 거처하는 대궐)에 처해서 국사를 의논했으면 마땅히 대신 반열에 서서 그 쌓은 바 포부를 펴고 한성(漢城, 서울) 연월(烟月)에 놀고 금강풍운(錦江風雲)에 옷깃을 떨칠 터이나 도리어 운명의 저해(沮害)를 받아 하늘에 오를 수 있는 나래가 엎드려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종(鍾)이 소리가 안 나니 벼슬길에서 허덕이다가 평생 세월을 허송하고 임학(林壑)에서 늙어가니 이름이 깎이고 소멸되어 기름진 음식으로 제사도 어려우니 탄식지 않을까.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 월성이공(月城李公)이 그와 같은 처지라 속에 쌓은 포부와 세상에 쓰일 재질(才質)을 않고 생각과 꾀를 내서 임금을 돕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주어 일대성세(一代晟世)를 빛냈으나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그 11대손 재근(在根)은 인명(仁明)하고 근칙(謹敕)한 선비라 한통 유사(遺事)를 받들고 나에게 보여 가로대 부군(府君)이 세상을 뜬 지가 2백 년이 지났으나 아직 비명(碑銘)이 없어 능곡(陵谷)이 될까 두려워 돌을 세우기로 하였으니 원컨대 한 말씀 주시어 후세에 고증(考證)이 되게 해달라고 하니 늙고 불문(不文)한 것이 이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효손(孝孫)의 청이라 사양할 수 없어 이에 쓰노니 공의 휘는 정수(廷秀)요, 자는 경학(景學)이며 호는 민학(民學)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다.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말(高麗末)에 이르러 휘 지수(之秀)는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요, 이 규(揆)를 낳으니 사재(四宰)에 시호는 정렬(貞烈)이고 휘 원림(元林)을 낳으니 조선(朝鮮)에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을 낳으니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마무리니 청백(淸白)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공에게는 5대 이상이 된다.
고조의 휘는 시민(時敏)이니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하고 문장(文章)과 높은 절개(節槪)로 한때 중망(重望)을 모았고 증조의 휘는 종준(宗準)이고 호는 용재(慵齋)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다. 점필재(佔畢齋) 문인(文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당하고 뒤에 부제학(副提學)을 받다. 조의 휘는 덕연(德淵)이고 호는 천유당(天有堂)이니 참봉(參奉)이며 고위(考位) 휘는 윤양(胤讓)이니 대사성(大司成)이고 호는 모선재(慕先齋)다.
비(妣)는 광산김씨(光山金氏)며 경술(庚戌) 향리(鄕里) 자택에서 공이 나타나면서 모양이 명민(明敏)하더니 장성함에 늠름한 성인의 품위가 있었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종족 간에는 화목하게 처하며 남에게는 융화로써 대접하고 자신은 겸손을 지키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옷은 화려한 것을 피하고 음식은 두 가지 반찬을 안 먹으며 제사 때와 빈객(賓客)을 위해서는 정결하고 풍후(豐厚)하게 하고 경서(經書)와 이학(理學)을 연구할 제적은 말과 깊은 뜻은 그 근원을 찾지 않음이 없는 고로 덕성(德性)이 날로 더하니 그 지방 사우(士友)들 간에 중한 대우를 받으니 결국은 착한 소리가 나라에 들려 전연사직장(典涓寺直長)을 받으니 맑은 이름이 조정에 드러났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영재(英才)길 임을 자기 책임으로 삼고 배움을 청하는 자 있으면 그 재량에 따라 충분한 교육을 주어 빈빈(彬彬)한 문사(文士)가 많이 나니 학력(學力)의 근본이 잊지 않고서 가능할 손가.
천년(天年)으로 세상을 뜨니 만력(萬曆) 계미년(癸未年, 1644년) 11월 14일이라. 경주부(慶州府) 남복안(南伏安) 자좌(子坐)에 안장하다. 배(配)는 밀양손씨(密陽孫氏) 광리군(廣理君) 긍훈(兢訓)의 후손 핵(翮)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신해(辛亥, 1551)에 나고 만력(萬曆) 계묘(癸卯, 1603)에 4월 14일에 졸하니 이조호암(伊助狐岩) 남성산(南星山) 축좌(丑坐)에 안장하다. 4남 2녀를 낳으니 장남에 익(杙)이니 호는 야은(野隱)이고 장사랑(將仕郎) 참봉(參奉)이다. 다음은 추(樞)니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며 다음은 은(檼)이니 호는 성암(省庵)이고 다음은 각(桷)이니 호는 오산(鰲山)이며 딸은 벽진(碧珍) 이지백(李知白)과 현풍(玄風) 곽융(郭霳)에 출가했다. 나머지는 다 수록 못 한다.
슬프다, 공의 훌륭한 문적(文蹟)과 서책(書冊)이 반드시 반반하게 후세에 전할 것이 있을 터이나 좀이 먹고 병화(兵火)를 겪은 탓으로 남은 것은 얼마 없으니 가히 한이 되나 한 깃에 상서(祥瑞)를 알고[일우지서(一羽知瑞)] 한쪽 고기에도 한솥 맛을 안다[일련지미(一臠知味)]고 전하니 어찌 공의 문적(文蹟)이 많음을 필요로 하리오. 비록 그러나 옛날 잃었든 벽수산호(碧樹珊瑚)와 화제마류(火蹄瑪瑠)의 귀중한 보배가 파사시장(波斯市場) 요샛말로 파시(波市)에 나니 이것이 적수유주(赤水遺珠)임을 알았으니 공의 문적도 뒷날 파사시(波斯市)를 기다리노라.
위와 같이 쓰고 이어 명을 하니 명(銘)에 가로대 빛나는 화벌(華閥)이 동국(東國)에 떨치니 공은 은택(恩澤)이 깊어 홍유(鴻儒) 석사(碩士)가 끊기지 않아 시례(詩禮)가 세업(世業)이 되고 잠영(簪纓, 벼슬)의 고택(古宅)이라. 빛나는 이 가문(家門)에 공이 특출하나 비단의 창자요, 난곡(鸞鵠)의 기상이라 용문(龍門, 벼슬길)에 일찍 오르니 오색구름이 영롱하도다. 은혜를 입어 조정에 서니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벼슬은 청렴을 주로 했고 백성은 덕으로 품었다. 벼슬을 버리고 전원(田園)으로 돌아와서 경적(經籍)을 연구하다. 도서는 책상에 가득하고 분전(墳典, 책이름)은 집에 찾도다. 영재(英才)를 육성하니 일향(一向)의 모범이라 문운(文運)이 비색(否塞)하여 문성(文星)이 떨어지네. 복안(伏安) 남쪽 기슭에 공을 안장하니 귀신도 보호하고 사람이 흠모(欽慕)하여 천만년 전하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