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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5세손 갈재공 이최영] 葛齋先生李公墓碣銘(갈재선생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3:57

□용재공(慵齋公) 5세손 갈재공(葛齋公) 이최영(李最英)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②금애공(琴厓公) 윤검(胤儉) → 3世孫 삼은공(三隱公) 민각(民覺) → 4世孫 ③행헌공(杏軒公) 상연(尙堧) → 5世孫 ③갈재공(葛齋公) 최영(最英)

 

 

葛齋先生李公墓碣銘(갈재선생이공묘갈명) 幷序(병서)
-永嘉(영가) 權相圭(권상규) 撰(찬)

 

故葛齋先生李公衣舃之藏在尙州院堂村庚坐之原其後孫在源請余以顯銘其請甚懇謹據其行狀而叙之按公諱最英字大化姓李氏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爲肇祖高麗光祿大夫諱之秀爲中祖入我鮮有吏判諱蔓實大司憲諱繩直進士諱時敏號琴湖是生諱宗準弘文館校理被燕山戊午禍後 贈副提學寔慵齋先生於公間五世高祖諱德淵薦參奉不就曾祖諱胤儉號琴厓祖諱敏覺自安東移居于別卜山中號三隱考諱尙堧妣南原梁氏黙齋后 孝宗甲午生在幼屹然若老成甫弱冠能振拔流俗不屑擧業專心 性理之學旣瀜實經傳而於庸學心經近思錄用工尤深體認而服行之是以隱微幽獨之中而戒愼恐懼動靜語黙之際而整齊嚴肅表裏交養德器渾成而世間榮名利綠視之若浮雲之過空也愛葛嶺山水之勝構小榭扁以葛齋日處其中窮經玩理暇亦登山而採臨水而漁管雲霞而吟風月囂然而自樂學者稱之爲葛齋先生云 肅宗甲午七月十八日終配草溪卞氏進士㑮之女墓合封生三男天華箕華盛華女適金學標後配南陽洪氏生三男日華挺華齊華以下不錄銘曰
俛焉先聖之學超然隱士之風豈欲果忘深懲戊午黨禍之凶恭銘于碣用示無窮

 


●갈재선생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葛齋先生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 찬(撰)

 

옛날 갈재선생(葛齋先生) 묘소가 함창(咸昌) 원당촌(院堂村) 경좌(庚坐)의 언덕에 있다. 그 후손 재원(在源)이 비(碑)에 새길 글을 나에게 청하되 그 청이 심히 간절한지라 삼가 그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글을 쓰노니 공의 휘는 최영(最英)이요, 자는 대화(大化)며 성은 이씨(李氏)고 관향(貫鄕)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高麗)조에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월성군(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중조(中祖)가 되며 조선(朝鮮)조에 들어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만실(蔓實)과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과 진사(進士) 시민(時敏) 호 금호(琴湖)가 있고 이분이 종준(宗準)을 낳으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연산무오(燕山戊午, 1498) 사화(史禍)를 입은 후 부제학(副提學)을 받으니 이분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공과 5대 상관이요.
휘 덕연(德淵)은 참봉(參奉)에 취임치 않았고 증조의 휘는 윤검(胤儉)이요, 호는 금애(琴厓)요. 조의 휘는 민각(敏覺)이니 안동(安東)으로부터 별복산중(別卜山中)에 옮겨서 살았으니 호는 삼은(三隱)이요, 고의 휘는 상연(尙堧)이요, 비(妣)는 남원양씨(南原梁氏) 묵재(黙齋)의 후손이다.
효종갑오(孝宗甲午, 1654)에 공을 낳다. 어릴 때부터 점잖기가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고 약관(弱冠) 지경에 벌써 보통에 빼어나서 과거(過擧)에는 즐기지 않고 마음을 성리학(性理學)에 정공하여 경전(經傳)에 깊이 통달했고 중용(中庸)·대학(大學)·심경근사록(心經近思錄)에 대해 더욱 공부를 깊게 하여 몸소 그대로 행하니 이러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움직이고 조용하게 말하고 묵묵한 사이에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모습을 항상 정제(整齊) 엄숙히 하며 안팎 없이 닦으니 큰 그릇을 이루에 세상에 영화와 이익은 공중에 뜬 그름같이 여기고 갈령(葛嶺)의 산과 물이 좋은 것을 사랑하여 조그마한 집을 짓고 갈재(葛齋)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곳에서 거처(居處)하며 글과 이수(理數)를 연구하고 여가로는 산에 올라 나물 캐고 물에 가서 고기 잡으며 구름과 나오리를 관상하고 바람 명월(明月)에 읊으니 거침없이 즐거운지라. 배우는 자가 갈재선생(葛齋先生)이라 불렀다 한다. 숙종갑오년(肅宗甲午年, 1714년) 7월 18일에 졸하다.
배(配)는 초계변씨(草溪卞氏) 진사(進士) 혼(㑮)의 따님이고 묘는 합폄(合窆)이다. 3남을 낳으니 천화(天華)·기화(箕華)·성화(盛華)요, 따님은 김학표(金學標)에 출가했고 후배(後配)는 남양홍씨(南陽洪氏)고 3남을 두니 일화(日華)·정화(挺華)·제화(齊華)고 이하는 기록지 않는다.
새겨 가로대, 성현(聖賢)의 글에는 굽히고 은사(隱士)의 풍채(風采)는 뛰어나니 어찌 무오당파(戊午黨派)의 화액(禍厄)을 있을쏜가. 삼가 돌에 새겨서 무궁토록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