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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3세손 오천공 이봉희] ⺮+梧泉處士慶州李公諱鳳熙墓碣銘(오천처사경주이공휘봉희묘갈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3:50

□용재공(慵齋公) 13세손 오천공(⺮+梧泉公) 이봉희(李鳳熙)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②금애공(琴厓公) 윤검(胤儉) → 3世孫 삼은공(三隱公) 민각(民覺) → 4世孫 ②상돈(尙墩) → 5世孫 득영(得英) → 6世孫 ②귀선(貴善) → 7世孫 ②준명(俊明) → 8世孫 ②통정공(通政公) 석현(碩賢) → 9世孫 ②성춘(成春) → 10世孫 ②익로(益魯) → 11세손 ①섭우(燮雨) → 12世孫 ②상준(相俊) → 13世孫 오천공(⺮+梧泉公) 봉희(鳳熙)

 

 

⺮+梧泉處士慶州李公諱鳳熙墓碣銘
(오천처사경주이공휘봉희묘갈명)
-傍后孫(방후손) 인근(仁根) 撰(찬)

 

聞慶郡 籠岩面 內西里 中山亥坐原에 四尺封塋이 있으니 故處士李公의 幽宅이라 어느 날 公의 曾孫 濟萬甫가 公의 遺墨과 譜牒을 가지고 大田旅舍로 나를 찾아와 이르되 吾曾王考下世하신지 半百年이 지난 今日에 이르는 동안 家勢가 기울고 生活이 困窮하여 墓前儀物이 多闕하였으니 子孫된 者로서 悚懼함을 禁할 길이 없어 이제 短碣이나 竪立코저한다며 碣銘을 請하거늘 나의 不文無知로 責任을 堪當키 어려우나 至親의 處地로서 辭讓할 수만 없어서 平日門父老께 들은 바와 譜牒에 所載한 것을 參考로 하여 아래와 같이 쓰노니 公의 諱는 鳳熙요 字는 應韶며 自號曰⺮+梧泉이니 新羅佐命功臣諱謁平의 後孫이요 高麗때 金紫光祿大夫 月城君이 派祖가 되며 李氏朝鮮에 들어와서 世宗朝때 諱蔓實은 吏曹判書요 三傳而諱宗準은 弘文館校理로 燕山君 戊午史禍를 입었으니 世上이 慵齋先生이라 불렀고 後日에 副提學을 받았다 여러 代를 내려와서 諱成春諱益魯諱燮雨가 高曾祖가 되고 考의 諱는 相俊이요 字는 德仲이며 妣는 丹陽張氏 華春의 따님으로 一八七三年 癸酉에 尙州君 咸昌面 胎奉里 自宅에서 出生하시다 公이 容貌가 端正하고 才藝가 過人하드니 長成하면서 孝誠이 出天하고 性稟이 剛直하여 爲先之道와 事親之方과 待人接物之法이 無不至誠터니 就學以來로 勤勉孜孜하여 不敎督而文理能通하니 鄕人의 稱頌이 籍籍하였다 志操가 高潔하여 世波의 險峻함을 보고 世路에 뜻이 없어 窮僻한 山中을 棲身處로 삼고 學文에만 熱中하여 ⺮+梧泉格致家學이란 十卷의 册을 著述하고 醫學과 山書에도 硏究가 深奧하여 많은 遺書를 남겼으며 筆法이 精妙하여 聖經賢傳을 詳細히 謄寫하여 子孫들이 읽어 爲人之方을 强調하였으며 爲先之策은 累代先山의 封塋을 增築하고 石物을 具備하여 墓儀를 完成하니 公의 平生行蹟은 爲先裕後에 最善을 다했도다 老患으로 一九四八年 戊子 十二月 三日 七十五歲를 一期로 世上을 뜨시니 슬프다 公의 豊富한 抱負는 朝延에 섰으면 治國治民에 偉勳을 남겼을 것을 時與命違하여 如意치 못하고 山林에서 守分修身하면서 一生을 마치었으니 아깝도다 配는 南原梁氏 柱學의 따님이니 二男을 두었다 長男에 在鴻 次에 在鵬이요 鴻의 男에 鼎鎬允鎬昇鎬唱鎬며 鵬의 男에 觀鎬요 鼎鎬男에 濟萬濟生이니 濟生은 書記官이며 允鎬男에 濟哲濟薰이고 昇鎬男에 濟敦濟億濟珉이며 唱鎬男에 濟赫이고 觀鎬男에 濟元濟潤濟命이며 濟萬男에 東秀東珍이요 濟生男에 東昱이고 濟元男에 東律이며 濟潤男에 東郁이요 濟敦男에 東錫이며 濟億男에 東勳이다 命曰慶州古閥이요 瓢巖의 遠裔라 月城君을 派祖로 慵齋先生이 顯祖로다 材本은 鄧林에서 자랐고 玉은 崑崗에 싸였도다 公이 是宅에 出生하니 大竹이 生筍이라 古今經傳을 博渉하였으나 䆠路에는 뜻이 없었다 祖先을 爲하고 子孫을 爲해서는 誠意를 다하였다 行蹟을 碑石에 새겨서 後人에 보이노라

 


●오천처사경주이공휘봉희묘갈명 역문
(⺮+梧泉處士慶州李公諱鳳熙墓碣銘 譯文)
-방후손(傍后孫) 인근(仁根) 삼가 지음

 

문경군(聞慶郡) 농암면(籠岩面) 내서리(內西里) 중산해좌원(中山亥坐原)에 사척봉영(四尺封塋)이 있으니 고처사이공(故處士李公)의 유택(幽宅)이라. 어느 날 공의 증손(曾孫) 제만보(濟萬甫, 甫는 아무개)가 공의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과 보첩(譜牒, 족보)을 가지고 대전여사(大田旅舍)로 나를 찾아와 이르되 오증왕고하세(吾曾王考下世, 曾王考는 증조부)하신지 반백년(半百年)이 지난 금일(今日)에 이르는 동안 가세(家勢)가 기울고 생활(生活)이 곤궁(困窮)하여 묘전의물(墓前儀物, 묘 앞의 석물)이 다궐(多闕, 빠진 부분이 많다)하였으니 자손된 자로서 송구(悚懼)함을 금할 길이 없어 이제 단갈(短碣)이나 수립(竪立, 꼿꼿하게 세움)하고자 한다며 갈명(碣銘)을 청하거늘 나의 불문무지(不文無知)로 책임(責任)을 감당(堪當)키 어려우나 지친(至親)의 처지(處地)로서 사양(辭讓)할 수만 없어서 평일(平日) 문부로(門父老)께 들은 바와 보첩(譜牒)에 소재(所載)한 것을 참고(參考)로 하여 아래와 같이 쓰노니 공의 휘는 봉희(鳳熙)요, 자는 응소(應韶)며 자호왈(自號曰) 오천(⺮+梧泉)이니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요, 고려(高麗)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이 파조(派祖)가 되며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세종조(世宗朝)때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삼전(三傳) 휘 종준(宗準)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연산군(燕山君)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으니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불렀고 후일에 부제햑(副提學)을 받았다.
여러 대를 내려와서 휘 성춘(成春), 휘 익로(益魯), 휘 섭우(燮雨)가 고조(高祖)·증조(曾祖)·조부(祖父)가 되고 고(考)의 휘는 상준(相俊)이요, 자는 덕중(德仲)이며 비(妣)는 단양장씨(丹陽張氏) 화춘(華春)의 따님으로 1873년 계유(癸酉)에 상주군(尙州君) 함창면(咸昌面) 태봉리(胎奉里, 현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 자택(自宅)에서 출생하시다. 공이 용모가 단정하고 재예(才藝, 재능과 기예)가 과인(過人, 뛰어나다) 하더니 성장하면서 효성이 출천(出天)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위선지도(爲先之道, 조상을 위하는 도리)와 사친지방(事親之方, 어버이를 섬기는 방법)과 대인접물지법(待人接物之法, 사람을 대하고 사물에 접한다는 법)이 무불지성(無不至誠) 터니 취학이래(就學以來)로 근면자자(勤勉孜孜)하여 부교독이문리능통(不敎督而文理能通)1) 하니 향인(鄕人)의 칭송(稱頌)이 적적(籍籍, 명성이 자자하다)하였다. 지조(志操)가 고결(高潔)하여 세파(世波)의 험준(險峻)함을 보고 세로(世路, 벼슬길)에 뜻이 없어 궁벽(窮僻, 후미진 곳)한 산중(山中)을 서신처(棲身處, 사는 곳)로 삼고 학문(學文)에만 열중(熱中)하여 오천격치가학(⺮+梧泉格致家學)이란 10권(十卷)의 책을 저술하고 의학(醫學)과 산서(山書)에도 연구(硏究)가 심오(深奧)하여 많은 유서(遺書)를 남겼으며 필법(筆法)이 정묘(精妙)하여 성경현전(聖經賢傳, 성현이 지은 여러 가지 책)을 상세(詳細)히 등사(謄寫)하여 자손들이 읽어 위인지방(爲人之方)2) 을 강조(强調)하였으며 위선지책(爲先之策, 다른 것에 앞서서 계책)은 누대선산(累代先山, 累代는 여러 대)의 봉영(封塋)을 증축(增築)하고 석물(石物)을 구비(具備)하여 묘의(墓儀, 석물)를 완성(完成)하니 공의 평생행적(平生行蹟)은 위선유후(爲先裕後, 선조를 위하고 이를 이어받아)에 최선(最善)을 다했도다.
노환(老患)으로 1948년 무자(戊子) 12월 3일 75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뜨시니 슬프다. 공의 풍부(豊富)한 포부(抱負)는 조연(朝延, 조정)에 섰으면 치국치민(治國治民)에 위훈(偉勳)을 남겼을 것을 시여명위(時與命違, 시운時運이 운명과 어긋나서)하여 여의(如意)치 못하고 산림(山林)에서 수분수신(守分修身, 몸 닦고 분수 지키는)하면서 일생을 마치었으니 아깝도다.
배(配)는 남원양씨(南原梁氏) 주학(柱學)의 따님이니 2남을 두었다. 장남에 재홍(在鴻), 차(次)에 재붕(在鵬)이요. 재홍(在鴻)의 남에 정호(鼎鎬)·윤호(允鎬)·승호(昇鎬)·창호(唱鎬)며 재붕(在鵬)의 남에 관호(觀鎬)요, 정호(鼎鎬) 남에 제만(濟萬)·제생(濟生)이니 제생(濟生)은 서기관(書記官)이며 윤호(允鎬) 남에 제철(濟哲)·제훈(濟薰)이고 승호(昇鎬) 남에 제돈(濟敦)·제억(濟億)·제민(濟珉)이며 창호(唱鎬) 남에 제혁(濟赫)이고 관호(觀鎬) 남에 제원(濟元)·제윤(濟潤)·제명(濟命)이며 제만(濟萬) 남에 동수(東秀)·동진(東珍)이요, 제생(濟生) 남에 동욱(東昱)이고 제원(濟元) 남에 동률(東律)이며 제윤(濟潤) 남에 동욱(東郁)이요, 제돈(濟敦) 남에 동석(東錫)이며 제억(濟億) 남에 동훈(東勳)이다.
명왈(命曰) 경주고벌(慶州古閥, 경주의 옛 문벌)이요, 표암(瓢巖)의 원예(遠裔, 먼 후대의 자손)라. 월성군(月城君)을 파조(派祖)로 용재선생(慵齋先生)이 현조(顯祖)로다. 재본(材本, 인재는 본래)은 등림(鄧林)3) 에서 자랐고 옥(玉)은 곤강(崑崗)4) 에 싸였도다. 공이 시택(是宅)에 출생하니 대죽(大竹)이 생순(生筍, 죽순이 돋아나다)이라. 고금경전(古今經傳)을 박섭(博渉,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많이 읽음)하였으나 환로(䆠路,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다. 조선(祖先, 조상)을 위하고 자손을 위해서는 성의를 다하였다. 행적(行蹟)을 비석(碑石)에 새겨서 후인(後人)에 보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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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교독이문리능통(不敎督而文理能通) : 문리(文理)가 능통하여 가르치며 감독할 필요가 없다.
2) 위인지방(爲人之方) : 사람이 처신함에는 규모가 있어야 함을 밝혔는데, 효우부모(孝于父母)로부터 입신(立身)·망신(亡身)에 이르기까지 40여 가지를 나열하여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
3) 등림(鄧林) : 좋은 나무만 있다는 숲으로, 신선이 구름을 타고 다니며 노는 곳이라 한다.
4) 옥출곤강(玉出崑崗) : 옥(玉)이 곤륜산에서 난다. 崑은 山名이니 在荊山之陽이라 楚人卞和 得玉於此하여 獻於成王하니 名和氏璧이라 後爲秦璽하니라. (곤崑은 山이름이니 형산의 남쪽에 있다.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이 산에서 옥을 얻어 성왕에게 바치니, 화씨벽이라 이름하였는데, 뒤에 진나라는 이것으로 옥새를 만들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