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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3세손 삼은공 이민각] 三隱月城李公墓碣銘(삼은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2:42

□용재공(慵齋公) 3세손 삼은공(三隱公) 이민각(李民覺)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②금애공(琴厓公) 윤검(胤儉) → 3世孫 삼은공(三隱公) 민각(民覺)

 

 

三隱月城李公墓碣銘(삼은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永嘉(영가) 權中煥(권중환) 撰(찬)

 

古咸昌郡德谷平地原有宰如而封者卽故三隱慶州李公衣舃之藏也禮宜碣而尙未遑今其後孫諸氏惕焉謨竪石使族人相朝酩澣甫請銘于中煥辭不獲謹據其傍後孫俊鎬所撰遺事而叙之曰公諱民覺字君悟以新羅佐命大臣諱謁平爲肇祖自是簪組節義文行淸望代不絶書有若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月城君諱之秀官四宰諡貞烈諱揆判司僕寺事諱元林著于麗季入我 朝諱蔓實吏判諱繩直大司憲以淸白見重卽五世以上進士諱時敏以一世淸望被癸酉禁錮校理號慵齋諱宗準以佔畢門徒被戊午禍參奉諱德淵參奉號琴厓諱胤儉公高曾祖若考也妣東萊鄭氏贇之女公生于榮川之寓第自早歲才華氣量巳別等夷旣受學經史子傳河洛性理無不深究玩賾以承家學述先業爲志且志節慷慨不以科業爲進就及赤鼠亂以布衣扈駕南漢見城陷而和議成遂決意筮遯乃曰朝廷旣有大明忠臣草野豈無崇禎處士乎遂隱于酒水咸昌地與守默齋朴公相徃來旣又嫌山之不深更移居于咸寧之最窮峽別卜自號三隱盖取乎隱志隱書隱身之意而甞語曰古人有逃世遯跡不知所終者吾欲與此等人同歸遂絶交遊歛名聲托趣乎烟雲泉石蓬蓽蕭然簞瓢累空而不介懷敎子以課誦而餘力耕耰以孝友慈爲居家符以忠恕信敬爲號世箴竟爲元祐完人持此以可驗公天賦之有卓而自先世節我淸望之所襲亦不可誣也於乎以公富有之學範世之行展布乎明時則文章足以補王猷韻響足以鏗金石直截足以障頹波而遭時旣不良禍網又連仍只以大明日月春秋大義避名勢隱窮崍送一世于一穗經燈而當日嘉言媺蹟亦因兵燹及禍綱萬不一傳得玆豈非爲世道爲後生而可痛恨者乎以某年月日卒配德山尹氏麟齡女卒而葬于公墓左生三男尙堉尙墩尙堧堉男萬英墩男得英堧男震英最英得男貴良貴善震男時華元華益華復華春華最男天華盛華箕華日華挺華齊華餘不錄銘曰
抱宏才而莫展命之嗇也辦大義而隱跡志之確也吁嗟乎幽光潛德兮沈泯者歲閱三百今玆顯刻詔世千億光氣未昧與石俱屹始晦終顯天神可質凡厥有識疇不咸悅

 


●삼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三隱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永嘉) 권중환(權中煥) 찬(撰)

 

옛 함창군(咸昌郡) 덕곡(德谷) 평지 언덕 위에 있는 묘소는 삼은공(三隱公) 묘소라. 예의상 비(碑)를 세워야 할 터이나 미처 못했으니 이제 와서 그 후손 여러분이 걱정해서 비(碑)를 세우기로 합의하고 그 족인(族人) 상조(相朝)로 하여금 비명(碑銘)을 중환(中煥)에게 청하거늘 사양해도 아니 되므로 그 방후손(傍後孫) 준호(俊鎬)가 지은 유사(遺事)에 의거(依據)하여 이를 지으니 공의 휘는 민각(民覺)이고 자는 군오(君悟)니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니 이로부터 벼슬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 덕행(德行)과 청백(淸白) 명망(名望)이 대대로 끊기지 않으니 삼중대광광록대부월성군(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月城君) 휘 지수(之秀)와 사재(四宰) 벼슬을 지내고 정렬(貞烈)이란 시호를 받은 휘 규(揆)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휘 원림(元林)이 고려 말엽에 뛰어났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만실(蔓實)이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이요, 청백(淸白)함으로 세상에 드러났고 5대이래 진사(進士) 휘 시민(時敏)은 한때 청백(淸白)의 명망(名望)이 높았으나 계유(癸酉)에 금고(禁錮)를 당했고 교리(校理)로 호를 용재(慵齋)라 하는 분의 휘는 종준(宗準)이니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으로 무오년(戊午年, 연산4 1498년) 화(禍)를 입엇고 참봉(參奉) 덕연(德淵)과 참봉(參奉) 윤검(胤儉, 호 금애琴厓)은 공의 고조·증조·조부와 부친이 된다. 비(妣)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윤(贇)의 따님이니 공이 연천(榮川)에서 났다. 공은 어린 나이에 재주와 기국과 도량이 보통이 아니었고 글을 배우면서 경사(經史) 자전(子傳) 하도낙서(河圖洛書)1) 성리학(性理學)의 연구가 깊어 가통(家統)의 학문을 이어 선대의 업적을 창조하려는데 뜻을 두었고 또한 뜻이 강개(慷慨)하여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과거(科擧)에는 뜻이 없으니 적서란(赤鼠亂, 인조14 1636년 병자호란)에 포의(布衣)2) 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임금을 호위(扈衛)하더니 성이 함락됨에 화친(和親)할 움직임을 보고 은퇴하기로 결심하고 가로대 조정에 대명충신(大明忠臣)이 있는데 산중에는 어찌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없을까 하고 함창(咸昌) 땅에 숨어 살면서 수묵재(守默齋) 박공(朴公, 朴成敏박성민)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더니 이곳도 산이 깊지 않다고 해서 다시 함영(咸寧) 땅에도 가장 험한 산협을 가려서 옮겨 살면서 호를 삼은(三隱)이라 하니 삼은(三隱)의 뜻인즉 몸을 숨기고 글을 숨기고 뜻을 숨긴다는 의미다. 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자취를 감추려 죽은 것도 알지 못한 사람이 많으니 나도 이런 사람과 같이 되리라’ 하면서 친구와 교제도 끊고 이름도 숨기고 취미를 연운천석(烟雲泉石)에 부치니 가세가 빈한하여 양식이 자주 떨어지나 마음에 걱정을 아니 하고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시간이 남으면 밭 갈고 부모에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하며 자선(慈善)을 지표 삼아 나라에 충성하고 남을 용서하고 신의와 공경함으로 처세의 지침을 삼아 마침내 완인(完人)이 되었으니 이를 보면 공이 타고난 천품(天稟)이 탁월(卓越)하고 선대로부터 절의(節義)와 청백(淸白)함을 전해 받음을 속이지 못하리라. 공의 풍부한 학문과 모범이 된 행실은 밝은 세대에 났더라면 문장(文章)은 족히 임금을 보좌했을 것이요, 명성(名聲)은 금속 소리를 능가했을 것이요, 곧은 뜻은 험난한 세파도 막았으련만 때를 잘못 만나 화(禍)를 당함이 연속되어 다만 대명일월(大明日月)3) 과 춘추대의(春秋大義)4) 로 이름을 피(避)하고 궁벽한 산중에 숨어서 일생을 보냈으니 당시 아름다운 말과 자취가 병화(兵禍)로 인하여 만분의 하나도 전함이 없으니 나라를 위해서나 후손을 위해서나 통탄한 일이 아닐까 인하여 기일(忌日)조차 모르더라. 배(配)는 덕산윤씨(德山尹氏) 인령(麟齡)의 따님이다. 묘소는 공의 묘소 왼쪽에 있다. 삼남을 두니 상육(尙堉)·상돈(尙墩)·상연(尙堧)이고 상육(尙堉)의 남에 만영(萬英), 상돈(尙墩)의 남에 득영(得英), 상연(尙堧)의 남에 진영(震英)·최영(最英)이고 득영(得英)의 남에 귀량(貴良)·귀선(貴善)이고 진영(震英)의 남에 시화(時華)·원화(元華)·익화(益華)·복화(復華)·춘화(春華)이고 최영(最英)의 남에 천화(天華)·성화(盛華)·기화(箕華)·일화(日華)·정화(挺華)·제화(齊華)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 못 한다. 새겨 가로대
큰 재주를 가지고 피우지 못하니 운명의 비색 함이요, 대의를 분별하고 몸을 숨기니 뜻이 굳셈이라. 슬프다, 숨은 빛과 잠긴 덕(德)이 2백 년 긴긴 세월에 빛이 없다가 이제야 비로소 비(碑)에 새겨 천세(千歲)에 알리노니 훈훈하고 맑은 빛이 돌과 함께 높게 비치리라. 처음엔 어둡다가 급기야는 빛을 내니 하늘과 신명(神明)은 가히 믿음직하도다. 아는 자 있으면 뉘 즐기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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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도낙서(河圖洛書) : '하도'는 복희씨(伏羲氏) 때 황허 강[黃河]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그림이고, '낙서'는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에서 나온 신귀의 등에 쓰여져 있었다는 글이다. 복희는 하도에 의해 팔괘를 그렸고, 우는 낙서에 의해 홍범구주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2) 포의(布衣) : 예전에, 벼슬이 없는 선비를 이르던 말. 백의(白衣).
3) 대명일월(大明日月) : 대명일월(大明日月)은 그냥 밝은 해와 달이 아니다. 명나라 세월로 반드시 되찾아야 할 그 날이다.
4) 춘추대의(春秋大義) :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