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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3세손 봉악공 이철희] 鳳岳處士月城李公墓碣銘(봉악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0:38

□용재공(慵齋公) 13세손 봉악공(鳳岳公) 이철희(李哲熙)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 5世孫 ②인암공(忍庵公) 자원(自原) → 6世孫 호은공(湖隱公) 숙(琡) → 7世孫 ①여명(汝命) → 8世孫 ①필우(必佑) → 9世孫 ②덕봉공(德峯公) 수영(秀永) → 10世孫 ②만근(萬根) → 11世孫 ②통정공(通政公) 화우(和雨) → 12世孫 상목(相穆) → 13世孫 ①봉악공(鳳岳公) 철희(哲熙)

 

 

鳳岳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봉악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永嘉(영가) 權中煥(권중환) 撰(찬)

 

余甞因南鄕士友習聞鳳岳李公之爲潛修隱行之君子而常欽慕之不己日公三從弟元熙述公遺事而使其孫章鉉道鉉請墓道文辭不獲謹按而叔之曰公諱哲熙字士明號卽鳳岳月城人也李之貫月城肇於新羅佐命功臣謁平簪組世襲至勝國而有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諱之秀貫四宰諡貞烈諱揆判司僕寺事諱元林入我朝諱蔓實吏判諱繩直大司憲諱時敏進士號琴湖諱宗準文校理 贈副提學以畢齋門徒被戊午禍世所稱慵齋先生諱德淵諱胤恭俱蔭參奉諱燦號黙愚軒以學行聞諱起實壽嘉善諱自原壽僉樞至諱琡始居義城之長湖寔公六七世以上高祖秀永號德峯有文行曾祖萬根祖和雨考相穆妣義城金氏東洛女 哲宗戊午十一月十八日生公于長湖里第神采氣宇聰明才識逈別等夷自幼好學師事李錦樵魯榮公以學業見解文辭筆法見稱於人志操又介潔簿於進就而安於守拙懲於浮誇而懋於實踐事親而甘旨之供不以貧窶而有缺處事而義利之辨不以威武而有屈凡御家接物持身涉世之方各盡其道及遭內外艱送終之節一遵嘉禮稱情無憾中歲見時事日非遂撤移于靑鳧普賢山中爲遯世自靖計而與趙誓山敬祐同閈共交以講詩書究易理爲消遣法又與李晩榮趙烓郁交誼深與之唱酬或叙情因有賢山處士之稱人有請學則隨才教誨俾有成就彬彬多文學士因又設契而尊慕之南鄕人之稱公以潛修隱行之君者其豈無所以哉於乎以公衆美之行富有之學出而需世則庶可扶世教振頹綱風采有可觀而世旣疎公公亦自疎於世如幽蘭之竟萎於空谷而止在公或無憾而於世道實非可慨者耶以六十九年壽終于丙寅十二月二十二日靑松舍谷癸坐原其藏也配義城金氏通政永奎女先公卒而墓同原雙墳生四男一女男在慶在寬在韶在斗女適申柱天慶男章鉉寬男龍鉉鳳鉉韶男道鉉斗男台鉉餘幼不錄銘曰
學博而精行修而潔謹守先範善繼善述如用于世頹俗可濟世竟疎公公亦疎世筮遯林樊不知不慍分甘耕讀守我本天旣全而生又全而歿一生行蹟雷人耳玆銘于珉用示千億

 


●봉악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鳳岳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양(永陽) 이유민(李裕民) 근찬(謹撰)

 

내 일찍이 남쪽 사우(士友)들로 인해 봉악(鳳岳) 이공(李公)은 조용히 학문을 갈고닦아 숨어서 행하는 군자(君子)라는 소문은 익히 듣고 항상 흠모(欽慕)했으니 하루는 공의 삼종제(三從弟) 원희(元熙)가 공의 유사(遺事)를 지어서 그 손자 장현(章鉉)·도현(道鉉)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청하거늘 사양하지 못해서 삼가 써 가로대 공의 휘는 철희(哲熙)요, 자는 사명(士明)이며 호는 봉학(鳳岳)이니 월성이씨(月城李氏)라.
월성(月城)이란 관향(貫鄕)이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에 시작되었고 나라에 으뜸가는 벼슬과 문헌(文獻)이 대로 이어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 휘 지수(之秀)와 사재(四宰) 벼슬을 지낸 시호(諡號) 정렬공(貞烈公) 휘 규(揆)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휘 원림(元林)과 같은 분이 있고 아조(我朝, 조선朝鮮)에 들어와 휘 만실(蔓實)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이요, 휘 시민(時敏) 호 금호(琴湖)는 진사(進士)요, 휘 종준(宗準)은 문과교리(文科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았는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으니 용재선생(慵齋先生)이다. 휘 덕연(德淵) 휘 윤공(胤恭)은 다 음직참봉(蔭職參奉)이요, 휘 찬(燦) 호 묵우헌(黙愚軒)은 학행(學行)으로 명망(名望)이 높았고 휘 기실(起實)은 수직가선(壽職嘉善)이요, 휘 자원(自原)은 수직첨추(壽職僉樞)요, 휘 숙(琡)에 와서 처음으로 의성(義城) 장호(長湖)에서 옮겨 살으니 공이 6·7대에 이상이 된다. 고조의 휘는 수영(秀永)이요, 호는 덕봉(德峯)이니 문행(文行)이 있었고 증조는 만근(萬根)이며 조부는 화우(和雨)요, 부친은 상목(相穆)이고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 동락(東洛)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무오년(戊午年, 1858년) 11월 18일에 장호리(長湖里) 자택에서 공이 출생하다.
영특한 기상과 총명한 재질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금초노영(李錦樵魯榮)을 스승으로 하다. 공이 글을 배우매 문자를 해석하고 필법(筆法)이 또한 남에게 칭찬을 받았다. 지조(志操)가 결백하여 출세에는 뜻이 적고 분수를 지키는 데는 편히 하며 뜬 허명(虛名)을 경계하고 실천에 힘을 쓰고 부모를 섬길 때 입에 맞는 음식은 집이 곤궁(困窮)하다고 권하지 않으며 처사(處事)에는 의리와 이해관계(利害關係)에서는 위력에 굴하지 않고 집을 다스리고 사물에 접할 때와 몸가짐이나 세상에 처할지는 각각 그 도리를 다했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초종장례(初終葬禮)를 일체가례(一體家禮)에 따라 심정에 맞도록 해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중년에 나라 형편이 날로 그릇되어 감을 보고 청부(靑鳧) 보현산중(普賢山中)으로 옮겨 세상을 숨어 조용히 살면서 조서산(趙誓山) 경우(敬祐)로 더불어 이웃을 같이하고 함께 사귀며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역학(易學)을 연구함으로써 세월 보내는 방편으로 삼고 이만영(李晩榮)·조계욱(趙烓郁)과 사귐이 깊어 글을 읊고 정(情)을 펴니 이로 인하여 현산처사(賢山處士)란 칭호를 붙였고 사람이 배움을 청한 즉 재주에 따라 가르쳐서 성취하니 훌륭한 문학사(文學士)가 많이 났으며 그로 인해서 계(契)를 모아 높이 사모하니 남향(南鄕) 사람들이 공을 조용히 수련하고 숨어 행하는 군자라 하는 것이 어찌 연유가 없을까.
슬프나 공의 아름다운 행실과 풍부한 학문으로 나아가 세상에 쓰임을 당하면 거의 세상 가르침을 붙들고 무너진 윤강을 진작시켜 풍채를 가히 불만함이 있었을 것이나 세상이 선생을 소원하니 공도 또한 세상을 멀리하여 난초가 빈 골짜기에서 시들고 마니 공에는 유감이 없으나 세상은 가히 슬퍼하지 않으랴. 69의 천수(天壽)로 병인년(丙寅年, 1926년) 12월 23일 별세하니 청송사곡(靑松舍谷) 계좌(癸坐) 언덕이 그 묘소이다,
배(配)는 의성김씨(義城金氏) 통정(通政) 영규(永奎)의 따님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 쌍분(雙墳)이다. 4남 1녀를 생하니 남에 재경(在慶)·재관(在寬)·재소(在韶)·재두(在斗)요, 따님은 신주천(申柱天)에게 출가했다. 재경(在慶)의 남에 장현(章鉉)이요, 재관(在寬)의 남에 용현(龍鉉)·봉현(鳳鉉)이요, 재소(在韶)의 남에 도현(道鉉)이요, 재두(在斗)의 남에 태현(台鉉)이고 남은 사람은 기록지 못한다. 명(銘)하여 가로대
배움은 넓고 정(情)하며 행실은 닦고 맑아 선대유법(先代遺法)을 삼가 지켜서 유훈(遺訓)을 이었고 착하게 실천궁행(實踐躬行)하였으니 세상에 쓰였으면 무너진 풍속을 가히 가졌으련만 세상이 공을 멀리하니 또한 세상을 멀리하도다. 산림(山林)에 숨어서 남이 나를 몰라주되 성내지 않고 분수를 달게여겨 갈고 읽으며 나의 본분을 고수하여 온전하게 세상을 살다가 온전하게 죽어가니 일평생 행적(行蹟)이 귀와 눈에 우레 같도다. 이에 비(碑)에 새겨서 천억(千億)에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