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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2세손 금애공 이윤검] 參奉琴厓月城李公祭壇碑陰記(참봉금애월성이공제단비음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2:31

□용재공(慵齋公) 2세손 금애공(琴厓公) 이윤검(李胤儉)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②금애공(琴厓公) 윤검(胤儉)

 

 

參奉琴厓月城李公祭壇碑陰記(참봉금애월성이공제단비음기)
-永嘉(영가) 權相圭(권상규) 撰(찬)

 

於乎噫唏燕山戊午實我東小來之會也佔畢金先生史獄起而一代善類之遊其門者擧爲虀粉慵齋李先生其一也先生之子德淵孫琴厓公胤儉俱以參奉痛懲史禍自琴溪舊庄移居于川城琴厓公之子三隱公民覺耻丙子南漢盟抗章斥和又移居于咸商地而連世不振琴厓公墓所因而失傳每春秋霜露奠省無地爲雲仍歷世之恨迺者李氏諸公惕焉合謨倣古設壇祭先之禮乃相地于咸昌之德谷將竪碑而表之旣而咸商雲仍更合謨移建于功城之白雲山爲其道里均適也石旣具公十一代孫在源在龍遠訪余請碑陰之記辭不獲謹據其譜牒而叙次之按公諱胤儉字士克號琴厓姓李氏貫慶州新羅佐命功臣謁平爲肇祖自羅麗及我鮮大官名賢連世赫舃高祖繩直大司憲曾祖時敏進士號琴湖祖宗準校理卽慵齋先生考德淵參奉妣原州邊氏生員廣女配東萊鄭氏贇之女生一男曰民覺卽三隱公女適高應曙民覺男尙堉尙墩尙堧昔朱夫子釋追遠之意曰祭盡其誠又曰遠者人之所易忘也能追之德之厚也今李氏能追慕十二代遠祖誠之篤也厚之至也古訓曰有其誠則有其神吾知琴厓翁之靈必悅懌降格曰余有後矣洋洋陟降錫以多祉亦理之必然也李氏之門其昌大矣乎謹書之以塞其請云

 


●참봉금애월성이공제단비음기 역문
(參奉琴厓月城李公祭壇碑陰記 譯文)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 찬(撰)

 

슬프고 슬프다. 연산(燕山) 무오(戊午, 1498년)는 실상 우리 동방(東方)에 액운의 모임이라.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 사옥(史獄)으로 인하여 일대명현(一代名賢)으로 그 문하에 놀던 자가 거의 망하다시피 했으니 용재선생(慵齋先生)도 그중의 한 분이라. 선생의 아들 덕연(德淵)과 손자 금애공(琴厓公) 윤검(胤儉)이다.
참봉(參奉) 벼슬로 사화(史禍)의 아픔을 안고 금계(琴溪)로부터 천성(川城)에 옮겨 살았다. 금애공(琴厓公)의 아들 삼은공(三隱公) 민각(民覺)이 병자년(丙子年, 인조14 1636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 맹서(盟誓)를 부끄러이 여겨 글을 올려 화친론(和親論)을 배척(排斥)하고 또 함상(咸商, 지금의 함창咸昌과 상주尙州) 땅에 옮겨 살더니 자손이 대대로 쇠약하게 살다. 금애공(琴厓公) 묘소도 실전(失傳)하고 봄가을에 잔을 드리고자 해도 드릴 곳이 없어 자손들의 역대의 한이 드니 이에 이씨 제인(諸人)들이 근심한 나머지 공론을 모아 옛사람들이 단(壇)을 모아 조상에 제사하는 예를 모방하여 함창덕곡(咸昌德谷)에 터를 잡고 장차 비(碑)를 세우고자 하다가 다시 함창(咸昌) 상주(尙州) 자손들이 공론에 따라 공성(功城) 땅 백운산(白雲山)에 세우게 되니 양쪽 길이 중앙이 됨이라.
돌이 완성됨에 공의 11대손 재원(在源)·재룡(在龍)이 멀리서 나를 찾아 비음기(碑陰記)를 청하거늘 사양하다 못하여 삼가 보첩(譜牒)을 근거로 펴니 공의 휘는 윤검(胤儉)이요, 자는 사극(士克)이며 호는 금애(琴厓)고 성은 이씨(李氏)니 관향(貫鄕)은 경주라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신라(新羅) 고려(高麗)로부터 조선조(朝鮮祖)에 이르는 동안 높은 벼슬과 명현(名賢)이 대를 이어 빛이 혁혁(赫赫)하니 고조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이요. 증조 시민(時敏)은 진사(進士)인데 호는 금호(琴湖)요. 조부 종준(宗準)은 교리(校理)니 곧 용재선생(慵齋先生)이며 부친은 덕연(德淵)이니 참봉(參奉)이다. 모친은 원주변씨(原州邊氏)니 생원(生員) 광(廣)의 따님이다. 배(配)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윤(贇)의 따님이다. 1남을 낳으니 민각(民覺)이니 곧 삼은공(三隱公)이고 여(女)는 고응서(高應曙)에 출가하고 민각(民覺) 남(男)에 상육(尙堉)·상돈(尙墩)·상연(尙堧)이다.
옛날 주부자(朱夫子, 명희名熹)가 먼 조상을 추모(追慕)하는 것은 그 정성을 다함이라 했고 또 가로대 대가 멀면 잊어버리기 쉬운데 능히 추모하니 덕(德)이 두렵다 했다. 이제 이씨(李氏)가 능히 12대 원조(遠祖)를 추모하니 정성이 있으면 그 귀신도 있다 했으니 내 아노니 금애공(琴厓公)의 혼령이 반드시 즐겨 내려 가로대 나도 자손이 있다면서 복을 많이 줄 것이 당연한 이치라. 이씨의 문중이 창성(昌盛)할진대 삼가 이 글을 써서 그 청(請)함을 들어주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