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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2세손 화포공 이상화] 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月城李公墓碣銘(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3:12

□용재공(慵齋公) 12세손 화포공(花圃公) 이상화(李相和)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②금애공(琴厓公) 윤검(胤儉) → 3世孫 삼은공(三隱公) 민각(民覺) → 4世孫 ②상돈(尙墩) → 5世孫 득영(得英) → 6世孫 ①귀량(貴良) → 7世孫 호명(好明) → 8世孫 ②가선공(嘉善公) 영수(韺守) → 9世孫 ①의춘(宜春) → 10世孫 ②진로(震魯) → 11세손 ③통덕랑공(通德郞公) 종우(鍾雨) → 12世孫 화포공(花圃公) 상화(相和)

 

 

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月城李公墓碣銘 幷序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族後孫(족후손) 俊鎬(준호) 撰(찬)

 

夫發源深者其流之不渴積德厚者其慶之逮遠豈非古今天理之固然者乎俊鎬自妙齡每有事西走逶迤於功城之以花村卽吳中一大門闌也得聞宗父老傳誦之辭則有如護軍公以遐鄕巖穴之士負深源之氣有積厚之德著名於時遺謨於後實罕世偉蹟余以宗親後生於公之宏猷碩德甞慣於耳而未得窺其萬一心常景仰者久矣日公之曾孫南鍵甫將伐石而用衛墓道袖其狀本東走三百里之遠請銘於俊鎬曰吾曾大父事行旣沈泯顯刻尙未遑而知吾祖實蹟者莫有如族侍也願賜一言爲闡幽之資顧余非其人而事係宗親誼不敢終辭謹按狀而叔之不其僣乎公諱相和字季賢姓李花圃其號也慶州其實也新羅佐命大臣諱謁平爲肇祖至麗季封月城君諱之秀爲遠祖卽慵齋先生十二世孫也高祖諱韺守曾祖諱宜春祖諱震魯考諱鍾雨而妣東萊鄭氏東奎之女公生于 哲廟庚戌五月二十七日禀性剛莊志行高潔孝於親而友于兄弟早遊京洛鶱騰摘髭智勇兼備才德俱全自筮仕累遷而至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卒以 高宗甲辰五月十二日壽五十五葬于先兆下艮坐之原嗚乎公之雄才大略旣顯于世則當日偉蹟實行必多有可傳於後者而仍孫旣不振世故又多端箱篋之所藏便同杞宋之無徵實所慨恨然而今其後姓蕃衍頗有昌大底氣像此豈非有積必發之理歟配淑夫人金海金氏進士斗定女有婦德生四男仕炯仁炯義炯進炯仕男在龍在鳳在東出在浩仁男在元在慶在五義男在東進男在燮龍男允鍵南鍵屬余銘者卽其人也允男洪哲餘不盡錄銘曰
於惟月城吾李肇鄕簪纓碩德輝映一方白雲儲精公又挺生出入朝壇恩帖寵榮層峯左右自先世藏地吉運合有崇斧堂載刻貞珉永示不忘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족후손(族後孫) 준호(俊鎬) 찬(撰)

 

무릇 근원이 깊으면 흐르는 물이 마르지 않고 덕(德)을 쌓음이 두터우면 그 경사가 멀리 간다고 하니 그 어찌 고금을 통해서 떳떳한 이치가 아닐까. 준호(俊鎬)가 젊을 때부터 일이 있으면 서쪽으로 가서 공성(功城)의 이화촌(以花村)에 들릴 지면 한 큰 문벌(門閥)이라 종중(宗中) 부로(父老)들의 전하는 말을 들은즉 호군공(護軍公) 같은 분이 있으니 하향(遐鄕)에 산림처사(山林處士)로 근원이 깊은 기질을 가지고 두터이 쌓은 덕(德)이 있어 이름이 당시에 드러나고 후세에 음덕(陰德)을 끼쳤으니 세상에 드문 위대한 업적이라 나는 종친(宗親)의 후예(後裔)로서 공의 큰 도량과 덕망이 귀에 젖었으나 그 만분의 하나도 규명해본 일이 없어 마음에 항상 흠모하고 우러러본 지가 오래되니 하루는 공의 증손 남건(南鍵)이 장차 비(碑)를 세우고자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3백 리 먼 길을 달려와서 나에게 비명을 청해 가로되 나의 증조부의 사실(事實)과 행적(行蹟)이 묻히고 비명도 아직 못 새겼으니 우리 조상의 실적(實蹟)을 아는 이는 족장(族丈)만한 사람이 없으니 한 말씀을 하여 달라 하니 내가 자격이 못 되나 일이 종친에 관계되는지라 더 사양치 못하고 가장(家狀)에 의거해서 글을 쓰니 그 외람되지 않을까.
공의 휘는 상화(相和)요, 자는 계현(季賢)이며 성은 이씨(李氏)고 호는 화포(花圃)며 관향(貫鄕)은 경주(慶州)라.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말에 봉월성군(封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원조(遠祖)가 되며 용재선생(慵齋先生)의 12대손이 된다. 고조의 휘는 영수(韺守)요, 증조의 휘는 의춘(宜春)이며 조의 휘는 진로(震魯)고 부친의 휘는 종우(鍾雨)며 모친은 동래정씨(東萊鄭氏) 동규(東奎)의 따님이다. 공이 철묘경술년(哲廟庚戌年, 1850년) 5월 27일에 출생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씩씩하며 행실이 고원하고 결백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다. 일찍 서울에 놀 때 저는 말을 달리며 갈기*) 를 잡으니 지혜와 용맹이 정비하고 재주와 덕망이 함께 갖춘지라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차례 옮겨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까지 올랐다가 고종갑진년(高宗甲辰年, 1904년) 5월 12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55세라. 선비묘하(先碑墓下)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하다.
슬프다, 공의 큰 도량과 뛰어난 재주는 이미 세상에 드러났으니 당시 위대한 업적과 실지 행실이 후세에 전할 일이 많으랴만 자손이 못나고 상자(箱子) 속 많은 문적(文蹟)조차 없어져서 상고할 바 없으니 한탄을 금할 수 없으나 자손들이 번성해서 문호를 창대 시킬 기상이 있는지라. 이것이 쌓이면 반드시 발복(發福)하는 이치가 아닐까.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진사(進士) 두정(斗定)의 따님이다. 부덕(婦德)이 있었고 4남을 생(生)하니 사형(仕炯)·인형(仁炯)·의형(義炯)·진형(進炯)이고 사형(仕炯)의 아들에 재룡(在龍)·재봉(在鳳)·재동(在東)은 출계(出系)하고 재호(在浩)가 있고 인형(仁炯)의 아들에 재원(在元)·재경(在慶)·재오(在五)며 의형(義炯)의 아들에 재동(在東)이요, 진형(進炯)의 아들에 재섭(在燮)이고 재룡(在龍)의 남에 윤건(允鍵)·남건(南鍵) 등이니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한 사람이 남건(南鍵)이다. 윤건(允鍵)의 남에 홍철(洪哲)이고 남은 사람은 다 기록 못 한다.
우리 이씨(李氏)는 월성(月城)이 고향이라. 높은 벼슬과 큰 덕망이 한 지방을 빛내도다. 백운산(白雲山)에 정기모여 공이 또 탁생(托生)하니 조정에 출입함에 은첩(恩帖)이 영광일세. 좌우 봉우리는 선대의 묘소라. 터는 좋고 운이 향하니 묘소가 높도다. 비(碑)에 새겨서 기리 보여 잊지 않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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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기 : 말, 사자 따위 짐승의 목덜미에 난 긴 털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