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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3세손 봉강공 이경희] 鳳岡李公墓碣銘(봉강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0:19

□용재공(慵齋公) 13세손 봉강공(鳳岡公) 이경희(李敬熙)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 5世孫 ②인암공(忍庵公) 자원(自原) → 6世孫 호은공(湖隱公) 숙(琡) → 7世孫 ①여명(汝命) → 8世孫 ①필우(必佑) → 9世孫 ②덕봉공(德峯公) 수영(秀永) → 10世孫 ①봉계공(鳳溪公) 작근(爵根) → 11世孫 ①학산공(鶴山公) 옥우(玉雨) → 12世孫 ①상훈(相勳) → 13世孫 系子 봉강공(鳳岡公) 경희(敬熙)

 

 

鳳岡李公墓碣銘(봉강이공묘갈명) 幷序(병서)
-永陽(영양) 李裕民(이유민) 謹撰(근찬)

 

公諱敬熙字聖奎號鳳岡姓李氏本貫慶州始祖諱謁平新羅佐命大臣爾後冠冕連世不絶至麗季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生諱揆官至贊成諡貞烈公入鮮朝有諱蔓實吏曹判書生諱繩直大司憲生諱時敏進士號琴湖生諱宗準文校理選湖堂 贈副提學以佔畢金先生門徒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寔公之十三代祖也高祖諱秀永號德峯曾祖諱爵根號鳳溪祖諱玉雨號鶴山考諱相勳妣達城徐氏生考諱相春妣海州吳氏 高宗己丑公生于長湖里第姿相淸雅才性聰敏自幼不煩苛督而知好讀書又知內外輕重之分不輕擧妄動愼言語謹辭受篤於孝友嚴於律己睦於宗族待人接物必以其禮人無間言居處必精潔步履必安詳出入進止必有常度甞曰日用常行是吾道理也聖賢文字是吾門路也環堵蕭然滫瀡之供未甞乏絶遭故送終葬祭之節如禮無憾當先忌齊肅以致如在之誠琴湖慵齋兩先祖墓改碣石坪之敬慕亭長湖之景義齋建立同心協力無有踈漏設儒稧以彰先祖遺愛之思公之一生事爲無非闡先裕後則宗族之所推重固當何如也哉辛卯正月十六日終于寢葬于德谷先兆下乾坐原配咸陽朴氏瑠煥女丙申生戊申正月二十六日卒墓德谷乾坐生四男四女男在英在紀出在律在五女朴誠煥咸陽人崔濟慶慶州人朴晩七龜山人司空永㰒孝令人在英男宗鍵承鍵興鍵在律男東鍵忠鍵在五男學鍵尙鍵餘不盡錄日公之肖胤在英在律䝴公遺事訪余于達句寓舍請以銘墓余以不文固辭而請之不己不獲己謹依來錄而序次如右係以銘曰
承家緖而克勤紹述觀時象而自甘隱淪追先裕後先行後文六旬事業無愧前人爲詔紹來裔勒此貞珉

 


●봉강이공묘갈명(鳳岡李公墓碣銘) 병서(幷序) 역문(譯文)
-영양(永陽) 이유민(李裕民) 근찬(謹撰)

 

공의 휘는 경희(敬熙)요, 자는 성규(聖奎)며 호는 봉강(鳳岡) 성은 이씨(李氏) 관은 경주(慶州)니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된다. 뒤로 벼슬이 대를 이어 끊이지 않으니 고려 때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을 봉했고 월성군(月城君)이 휘 규(揆)를 낳으시니 벼슬이 찬성(贊成)이요,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조선(朝鮮)에 들어와 휘 만실(蔓實)은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을 낳으시니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요, 휘 시민(時敏)을 낳으시니 진사(進士)로 호는 금호(琴湖)요, 휘 종준(宗準)을 낳으시니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교리(校理)로 호당(湖堂)에 뽑혔다.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으니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르며 뒤에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을 받았다. 공에 13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수영(秀永) 호는 덕봉(德峯)이며 증조의 휘는 작근(爵根) 호는 봉계(鳳溪)며 조의 휘는 옥우(玉雨) 호는 학산(鶴山)이고 고의 휘는 상훈(相勳)이다. 비(妣)는 달성서씨(達城徐氏)요, 생고(生考)의 휘는 상춘(相春) 비(妣)는 해주오씨(海州吳氏)로 고종(高宗) 기축년(己丑年)에 장호리(長湖里) 본댁에서 출생하다.
나면서 모양이 맑고 재주가 총명하여 가르침을 독려 아니해도 스스로 글 읽기를 좋아하고 또 가볍고 무거운 분수를 알아 경거망동(輕擧妄動)을 아니 하며 말을 삼가고 주고받는 것을 분명히 하여 효우(孝友)를 돈독(敦篤)히 하고 수신하는데 엄히 하며 족친(族親) 간에 돈목(敦睦)하고 사람과 물건을 대할 때도 반드시 예(禮)로 하는 데 남이 찬성했으며 거처는 정결하고 행동은 안상(安詳)하며 출입하고 진퇴(進退) 하는데 법도가 있으며 항상 말하기를 날로 쓰는 행동이 나의 도리며 성현(聖賢)의 문자(文字)가 나의 길이라 하다. 거처가 궁색하나 진지를 끊지 않았고 부모상을 당해서도 모든 절차를 유감없이 치렀고 부모 제삿날을 당하면 생존 시기와 같이 정성을 다했으며 금호(琴湖, 이시민李時敏)·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두 선조 묘전개갈(墓前改碣) 때와 석평(石坪)에 경모정(敬慕亭) 장호(長湖)에 경의재(景義齋) 건립에 정성을 다해서 협력했고 유계(儒稧)를 만들어서 선조의 은혜에 보답하니 일평생 행사가 조상을 드러내고 자손을 위해 노력했으니 족친(族親) 간 추앙(推仰)함이 어떠했을까. 신묘년(辛卯年) 정월(正月) 16일에 상고하니 덕곡(德谷) 선영(先塋)아래 건좌(乾坐) 언덕에 안장하다.
배(配)는 함양박씨(咸陽朴氏)니 유환(瑠煥)의 따님으로 병신년(丙申年)에 출생하고 무신년(戊申年) 정월(正月) 26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덕곡(德谷) 건좌(乾坐) 언덕에 있다. 4남 4녀를 출생하니 남에 재영(在英)·재기(在紀)는 출계(出系), 재율(在律)·재오(在五)요, 딸은 함양(咸陽) 박성환(朴誠煥), 경주(慶州) 최제경(崔濟慶), 구산(龜山) 박만칠(朴晩七), 효령(孝令) 사공(司空) 영학(永㰒)에 각각 출가했고 재영(在英) 남에 종건(宗鍵)·승건(承鍵)·흥건(興鍵)이요, 재율(在律) 남에 동건(東鍵)·충건(忠鍵)이며 재호(在五) 남에 학건(學鍵)·산건(尙鍵)이요, 나머지는 다 기록 못 한다.
어느 날 공의 아들 재영(在英)과 재율(在律)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내 집을 찾아와서 비문(碑文)을 청하거늘 글을 잘못하는 내가 사양을 해도 듣지 않으므로 부득이 위와 같이 쓰고 명(銘)을 해 가로대
가훈(家訓)을 이으되 게을리 아니하고 시대의 변천을 따라 숨어 살기를 즐겼다. 선대를 추모하고 후손을 계도(啓導)하며 행실을 앞세우고 학문을 뒤로하여 60년 사업이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후세를 위하여 행적(行蹟)을 밝혀 비석에 새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