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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1세손 학산공 이옥우] 鶴山李公墓碣銘(학산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0:08

□용재공(慵齋公) 11세손 학산공(鶴山公) 이옥우(李玉雨)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 5世孫 ②인암공(忍庵公) 자원(自原) → 6世孫 호은공(湖隱公) 숙(琡) → 7世孫 ①여명(汝命) → 8世孫 ①필우(必佑) → 9世孫 ②덕봉공(德峯公) 수영(秀永) → 10世孫 ①봉계공(鳳溪公) 작근(爵根) → 11世孫 ①학산공(鶴山公) 옥우(玉雨)

 

 

鶴山李公墓碣銘(학산이공묘갈명) 幷序(병서)
-永陽(영양) 李裕民(이유민) 謹撰(근찬)

 

公諱玉雨字琢汝號鶴山姓李氏本貫慶州始祖諱謁平新羅佐命大臣自後冠冕蟬聯至麗季有諱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諱揆官至贊成諡貞烈公入鮮朝有諱蔓實吏曹判書生諱繩直仕于世宗朝行楊州牧使慶尙道觀察使以大司憲終淸白見重於朝生諱時敏號琴湖俱中生進以淸望名於世生諱宗準號慵齋文校理選湖堂以佔畢先生門徒被戊午禍 贈副提學享鏡光栢麓院寔公十一代祖也高祖諱汝命曾祖諱必佑祖諱秀永號德峯考諱爵根號鳳溪妣順天張氏仁同張氏 純祖癸酉生公于長湖里第儀表端重禀性聰明幼有至行父母有所命不彈勞苦必敬謹將事稍長篤於彝倫就學誦讀不少懈家勢淸寒滫㵦之奉恐或有闕乏耕稼樵牧必躬親檢飭餘力之暇輒對案危坐手不釋卷朝出耕夜歸讀古人書者眞公之謂也出而有異味䄂致以進之聞一善事則返面而必詳陳之孝友之政行於家忠信之聲著於鄕以孟子窮不失義達不離道爲終身符戒子姪勉學不怠遭內外艱己踰不毀之年而守制甚嚴幾至滅性 哲宗庚申十二月二十七日卒墓德谷先兆下亥坐配慶州金氏慶華女辛未生有婦德丁丑七月十三日卒墓同麓酉坐生三男四女長相勳次相夏相春女金洛暉金海人朴友淳咸陽人李彙喆眞城人溫溪瀣厚李珍相碧珍人相勳男敬熙相夏男容熙女李章文永川人紫巖民寏后金正韶慶州人李章倬永川人紫巖后申仁燮鵝洲人鄭泰植延日人圃隱后相春男敬熙出觀熙女李潤和碧珍人餘不錄日公之曾孫在英在紀持公行錄及譜牒訪余達城寓舍題公墓爲囑甚勤不獲己按其狀而叙次如右係之以銘曰
寧拙無巧寧檏不華園芋陌桑樂哉田家生順沒寧夫復何嗟有崇斧堂德谷之岡刻之貞珉視此銘章

 


●학산이공묘갈명(鶴山李公墓碣銘) 병서(幷序) 역문(譯文)
-영양(永陽) 이유민(李裕民) 근찬(謹撰)

 

공의 휘는 옥우(玉雨)이요, 자는 탁여(琢汝) 호는 학산(鶴山)이며 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慶州)니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뒤로 벼슬이 끊이지 않으니 고려 때 휘 지수(之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을 봉했고 휘 규(揆)를 낳으니 벼슬이 찬성(贊成)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요, 조선(朝鮮)에 들어와 휘 만실(蔓實)이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을 낳으니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세상을 마치시니 청백(淸白)함으로 명망이 높았고 이분이 휘 시민(時敏)을 낳으시니 호는 금호(琴湖)요, 생원진사(生員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청백(淸白)으로 이름이 세상에 높았고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호는 용재(慵齋)다. 문과교리(文科校理)로 호당(湖堂)에 뽑혔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했고 나중에 부제학(副提學)을 받고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社)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공에 11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여명(汝命)이요, 증조의 휘는 필우(必佑)며 조의 휘는 수영(秀永)이요, 호는 덕봉(德峯)이며 고의 휘는 작근(爵根)이요, 호는 봉계(鳳溪)며 비(妣)는 순천장씨(順天張氏), 인동장씨(仁同張氏)니 순조(純祖) 계유년(癸酉年)에 장호리(長湖里) 본댁에서 출생하다.
공이 나면서 형용이 단정하고 성품이 총명하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의 명령이 있으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모든 일을 치렀고 크면서 인륜에 분명했으며 입학한 후 글을 읽을 때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소홀할까 두려워하여 친히 밭 갈고 곡식 심으며 나무하고 짐승을 길러 부모께 드리고 남은 시간에 글을 읽을 때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으니 옛말에 아침에 밭 갈고 저녁에 글 읽는다는 말이 공을 두고 있음이로다. 바깥에 나갔다가 맛있는 음식을 보며 반드시 소매 속에 넣어와서 부모에 드렸으며 좋은 소리를 들었을 때는 반드시 기억했다가 돌아와 부모께 일일이 보고해드렸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애통함이 극에 이르렀다. 철종(哲宗) 경신(庚申) 12월 27일에 별세하니 묘는 덕목(德谷) 선영하(先塋下) 해좌(亥坐)에 안장하다.
배(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경화(慶華)의 따님이니 신미생(辛未生)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정축(丁丑) 7월 13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같은 산 유좌(酉坐)이다. 3남 4녀를 출생하니 장남에 상훈(相勳)이요, 다음에 상하(相夏), 상춘(相春)이요, 따님은 김해(金海) 김락휘(金洛暉), 함양(咸陽) 박우순(朴友淳), 진성(眞城) 이휘철(李彙喆, 온계溫溪의 후손), 벽진(碧珍) 이진상(李珍相)에게 출가했다. 상훈(相勳)의 아들은 경희(敬熙)요, 상하(相夏)의 아들에 용희(容熙)며 딸은 영천(永川) 이장문(李章文, 자암紫巖 민환民寏의 후손), 경주(慶州) 김정소(金正韶), 영천(永川) 이장탁(李章倬, 자암紫巖 민환民寏의 후손), 아주(鵝洲) 신인섭(申仁燮), 연일(延日) 정태식(鄭泰植,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후손)에 출가했다. 상춘(相春)의 아들에 경희(敬熙)니 출계(出系)하고 다음이 괸희(觀熙)다. 벽진(碧珍) 이윤화(李潤和)에 출가했고 나머지는 다 수록 못 한다.
어느 날 공의 증손 재영(在英)·재기(在紀)가 공의 행장(行狀)과 보첩(譜牒)을 가지고 나의 달성(達城) 집을 찾아와서 공의 묘문(墓文)을 부탁함이 간절하여 사양치 못하고 행장(行狀)을 참고로 위와 같이 서록(書錄)하다.
명왈(銘曰) 오졸함을 좋아하고 교식함이 없으며 검소함을 가지고 사치를 아니 하며 뒤안에 토란과 밭둑에 뽕나무는 전원생활이 즐겁도다. 편히 살다가 편히 죽으니 무슨 슬픔이 있을까. 높은 묘소는 덕곡(德谷)의 묘(墓) 언덕이라. 비석에 새기어서 이글을 전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