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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0세손 봉계공 이작근] 鳳溪李公墓碣銘(봉계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19:56

□용재공(慵齋公) 10세손 봉계공(鳳溪公) 이작근(李爵根)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 5世孫 ②인암공(忍庵公) 자원(自原) → 6世孫 호은공(湖隱公) 숙(琡) → 7世孫 ①여명(汝命) → 8世孫 ①필우(必佑) → 9世孫 ②덕봉공(德峯公) 수영(秀永) → 10世孫 ①봉계공(鳳溪公) 작근(爵根)

 

 

鳳溪李公墓碣銘(봉계이공묘갈명) 幷序(병서)
-傍裔孫(방예손) 仁根(인근) 撰(찬)

 

公諱爵根字震範號鳳溪姓李氏本貫慶州始祖諱謁平新羅佐命功臣自是簪組連世不絶至麗季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生諱揆官至四宰諡貞烈公入鮮朝有諱蔓實吏判生諱繩直大司憲生諱時敏進士號琴湖生諱宗準文校理選湖堂 贈副提學以佔畢金先生門徒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於公間十世高祖諱琡號湖隱自安東移寓聞韶之長湖里子孫世居焉曾祖諱汝命祖諱必佑考諱秀永號德峯妣咸陽朴氏春榮女咸陽君忠佐后 正祖丙午生 哲宗癸亥卒壽七十八墓德谷先兆下亥坐原於乎公歿後百有餘禩而以畢方之厄文籍蕩殘當日事行細節無得以詳焉是固可恨而盖公之容秀而淸公之操端而雅公之才頴而敏嚴於律已篤於孝悌敦德行而簿才華愼言語而謹辭受窮漁樵供甘旨晨昏定省跪於門外入云則入坐云則坐應對唯謹平居早起盥櫛不脫冠帶待人接物必以其禮念絶世路隱居終老樂在書史頤養性情凡世之榮辱得喪少無嬰懷而孝友之政行於家忠信之風著於鄕窮達顯晦於公有所加損也哉配順天張氏甲辰生丙午卒墓德川先兆下子坐配仁同張氏己未生癸未卒墓德川先兆下乾坐生二男長玉雨次道雨玉雨男相勳相夏相春女金洛暉金海人朴友淳咸陽人李彙喆眞城人李玧相碧珍人道雨男相協相明女李元憲碧珍人申熙淳鵝洲人曾玄而下依例不悉日公之玄孫在英在憲氏貴公行錄及家牒訪余于大田旅舍責以幽竁之銘余非其人其在族親之地義不敢固辭譔依按本而序次如右係之以銘曰月城華閥慵爺世家公生是宅克修先徽晦跡林泉甘土肥我讀我書我耕我田種德裕後孫詞綿綿有崇四尺君子之阡我銘于石用詔來千

 


●봉계이공묘갈명(鳳溪李公墓碣銘) 병서(幷序) 역문(譯文)
-방예손(傍裔孫) 인근(仁根) 찬(撰)

 

공의 휘는 직근(爵根)이요, 자는 진범(震範) 호는 봉계(鳳溪)이며 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慶州)니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뒤로 벼슬이 끊이지 않으니 고려 때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을 봉했고 휘 규(揆)를 낳으시니 벼슬이 사재(四宰)에 시호(諡號)는 정렬공(貞烈公)이요, 휘 만실(蔓實)을 낳으시니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을 낳으시니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요, 휘 시민(時敏)을 낳으시니 호는 금호(琴湖), 진사(進士)며 금호공(琴湖公)이 휘 종준(宗準)을 낳으시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호당(湖堂)에 뽑혔으니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다. 나중에 부제학(副提學) 벼슬이 추증(追贈)되고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불렀으니 공의 10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숙(琡)이요, 호는 호은(湖隱)이니 안동(安東)으로부터 의성(義城) 장호리(長湖里)에 옮겨 살았고 자손들이 대로 살았다. 증조의 휘는 여명(汝命)이요, 조의 휘는 필우(必佑)며 고의 휘는 수영(秀永)이요, 호는 덕봉(德峯)이며 비(妣)는 함양박씨(咸陽朴氏)니 춘영(春榮)의 따님이요, 함양군(咸陽君) 충좌(忠佐)의 후손이다. 정조(正祖) 병오년(丙午年)에 나고 철종(哲宗) 계해년(癸亥年)에 별세하니 연세가 78세라. 덕곡(德谷) 선영(先塋) 밑 해좌(亥坐)에 안장하다.
슬프다, 공이 하세(下世) 한 지 백여 년이 지났고 국조(國朝)까지 바뀐 오늘에 공의 문적(文籍)이 없어졌으니 평일 행하던 모든 것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들은바 공은 용모가 수려하고 조행(操行)이 단아하며 재질이 경민(警敏)하여 수신하는데 엄격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께 공경하며 화려한 것을 가벼이 여기고 언어를 조심하고 주고받는데 삼가며 몸소 냇가에서 고기를 잡고 산에 가서 나무하여 부모봉양에 게을리 아니하였으며 쇄소응대(灑掃應對)1) 와 혼정신성(昏定晨省)2) 을 하루같이 하고 벼슬길에는 생각을 끊고 산림(山林)에서 늙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세상에 영욕(榮辱)은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진실로 산중군자(山中君子)라 하겠다. 배(配)는 순천장씨(順天張氏)니 갑진년(甲辰年)에 나서 병오년(丙午年)에 별세하니 묘는 덕천(德川) 선영(先塋) 밑 자좌(子坐)이다. 계 배(配)는 인동장씨(仁同張氏)니 기미년(己未年)에 나고 계미년(癸未年)에 별세하니 묘는 덕천(德川) 선영(先塋) 밑 건좌(乾坐)에 있다. 2남을 낳으니 장남에 옥우(玉雨)요, 차남에 도우(道雨)며 옥우(玉雨) 남에 상훈(相勳)·상하(相夏)·상춘(相春)이요, 따님은 김해(金海) 김락휘(金洛暉), 함양(咸陽) 박우순(朴友淳), 진성(眞城) 이휘철(李彙喆), 벽진(碧珍) 이윤상(李玧相)에 각각 출가했다. 도우(道雨) 남에 상협(相協)·상명(相明)이요, 따님은 벽진(碧珍) 이원헌(李元憲), 아주(鵝洲) 신희순(申熙淳)에 출가했다. 증손·현손 이하는 다 기록지 않는다.
어느 날 공의 현손(玄孫) 재영(在英)·재헌(在憲) 씨 공의 행장(行狀)과 보첩(譜牒)을 가지고 대전(大田) 여관에 나를 찾아 공의 묘소 비문(碑文)을 부탁하니 내가 그 적임이 못 되나 족친간(族親間) 처지로 감히 사양치 못하고 대략 위와 같이 쓰고 이어 명왈(銘曰)
월성명벌(月城名閥)이요, 용재(慵齋) 후예(後裔)라. 공이 이 집에 나서 선대의 미덕(美德)을 훌륭히 지켰도다. 임천(林泉)에 은거(隱居)하니 샘은 달고 땅은 기름지도다. 내 책을 내가 읽고 내 밭을 내가 갈다. 덕(德)을 후손에 끼치니 자손이 번성하다. 사척(四尺)의 높은 것이 군자(君子)의 무덤이라. 돌에 새겨 후세에 알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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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쇄소응대(灑掃應對) : 물을 뿌려 쓸고 응대한다는 뜻으로, 집 안팎을 깨끗이 거두고 웃어른의 부름이나 물음에 응하여 상대함을 이르는 말.
2) 혼정신성(昏定晨省) :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함을 이르는 말.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